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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드니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크림슨은 뒤로 돌아 눈앞에 보이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에서부터 계속 미행해온 검은 로브도 크림슨을 뒤따랐다. 검은 로브는 행여나 크림슨이 눈치 챌라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언제든 몸을 숨길 준비를 했다. 그러나 검은 로브의 조심스러운 행동이 큰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수 분의 시간동안 크림슨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행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발걸음의 속도에도 변함이 없었다. 검은 로브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미행은 타겟 몰래 뒤를 쫓는 일이다. 검은 로브의 소리 없는 노력이 영향을 발휘할 일이 없더라도, 크림슨이 눈치 채는 것보다는 났다.


  그런 와중에 크림슨이 옆으로 몸을 틀어 또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자, 오히려 그 순간에 검은 로브는 난감해했다. 검은 로브가 며칠의 시간을 집중하여 익힌 알테르의 지리상, 지금 크림슨이 들어서는 곳은 짧은 골목들이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빽빽한 상점가였다. 스무 걸음도 못가서 갈림길이 나오는 거리이다. 이방인이 길을 찾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은 곳이지만, 알테르 지방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크림슨에게는 크게 장애가 되지 않을듯하다. 여관이라도 찾으려는 것일까.


  아무튼 계속해서 크림슨의 뒤를 쫓으려면 크림슨과의 거리를 좀 더 좁혀야할 필요가 있었다. 검은 로브는 빠른 걸음으로 상점가의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상점가로 들어가려면 지금 서있는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크림슨은 이미 왼쪽으로 사라졌지만, 검은 로브는 그를 바로 쫓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여기서 그의 뒤를 계속 쫓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까? 혹시나 크림슨이 상점가의 지리를 알고 자신을 유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너를 돌자마자 그 거대한 검을 뽑아들고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크림슨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몇 초 동안 많은 변수를 생각한 검은 로브가 생각을 굳힌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상황에서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이 유능한 요원이 가져야할 유일한 행동법칙이다.’


  자신의 좌우명을 가슴속에서 되뇌이며, 검은 로브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늘따라 유달리 어두침침한 저녁의 상점가로 들어섰다.




  어둠이 깔리자, 대부분의 집이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골목길을 백발의 검사가 홀로 걷고 있었다. 이미 불이 켜져 있는 몇 개의 여관을 지났다. 그러나 다른 여관을 둘러보려는 것인지, 아니면 따로 목적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크림슨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크림슨이 알테르에 입성한 이후부터 한나절동안 그의 뒤를 쫓아오던 검은 로브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조심성 덕분에 크림슨이 잠시 멈춰서 지도와 주변을 훑어보며 길을 찾을 때마다 검은 로브는 재빨리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도대체 크림슨은 무엇을 찾고 있길래 저토록 오랫동안 돌아다니는 것일까? 이미 상점가는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직 짧은 골목길들이 끝난 것은 아니기에, 검은 로브는 그와의 거리를 벌릴 수 없었다.


  몇 분 후, 이윽고 골목이 끝나고 한산한 공터가 펼쳐졌다. 주위에 엄폐물이 없는 탓에 검은 로브는 그대로 골목에 남아 크림슨의 동태를 살폈다. 크림슨은 공터 중앙에 멈춰서 공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나 건물을 찾는 태도가 아니었다. 크림슨의 시선은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결국 공터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크림슨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검은 로브를 똑바로 응시했다. 더 이상 흑갈색을 띄지 않는 그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 눈으로 로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미행자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크림슨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윽!”


  순간, 인간을 벗어난 듯한 붉은 눈으로부터 소름이 끼칠 정도의 공포를 느낀 검은 로브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벗어나려했다. 검은 로브가 골목을 향해 몸을 돌리자, 크림슨이 검은 로브를 향해 점프했다. 그리곤 순식간에 십여 미터나 떨어진 검은 로브의 눈앞에 내려섰다.


  “뭐, 뭐야……?”


  상상을 초월한 도약력에 놀란 검은 로브가 오히려 공터 쪽으로 몇 발짝 물러났다.


  “대답하십시오.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등을 보이며 착지한 크림슨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흑갈색으로 돌아온 눈동자가 검은 로브를 쳐다보았다.


  “아… 어라?”


  크림슨의 물음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검은 로브는 이미 사라진 오싹한 기운의 잔재에 홀려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검은 로브는 크림슨의 눈동자를 다시 보았다. 흑갈색의 눈. 조금 전에는 분명 피처럼 붉었는데… 그저 착각이었을까? 여하튼 크림슨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검은 로브는 더욱 뒷걸음치며 그를 경계했다. 대답 없는 검은 로브에게 크림슨이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로드니 듀아린의 부하입니까?”


  “전혀.”


  크림슨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저를 미행한 것이죠?”


  “그보다 내가 미행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눈치 챈 거지? 언제부터 안 거야?”


  “알테르에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제 뒤를 쫓는 존재를 느꼈습니다. 전 보통 사람보다 감각이 뛰어나거든요. 이제 당신이 대답하십시오. 저를 미행한 이유가 뭡니까?”


  “네가 알 필요는 없어. 그럼!”


  검은 로브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로 몸을 틀어 공터 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0m 가량 떨어진 높은 담벼락을 향한 것이었다. 설마 자신의 키보다 3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를 넘으려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검은 로브는 흡사 고양이와 같은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담벼락을 기어올랐다. 눈으로도 쫓기 힘든 스피드였다. 그러나 두 손을 담 꼭대기에 걸치고 막 다리를 올리려는 검은 로브의 눈앞으로 날아든 것은 이미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림슨의 장검이었다. 검은 로브가 담을 타는 동안, 그를 뒤쫓은 크림슨이 이번에도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담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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