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04 06:44

[단편] <그 사람>

조회 수 801 추천 수 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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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둑한 길을 조용히 걸어간다. 골목길엔 너저분히 쓰레기가 널려 있다. 시궁창 하수구 그 근처, 썩은내에 '그'는 곧 인상을 찌푸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른 구름에 가린 달이 썩은내와 어둠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새하얗지도, 샛노랗지도 않은 달은 구름 사이사이 서슬퍼런 날로 '그'의 가슴을 후벼댔다. 쓰레기통 위의 고양이는 '그'의 마음을 읽은 것 마냥 야옹거렸다.
그런 고양이를 측은히 바라본 '그'. 아무도 없는 으슥한 길이 꼭 맘에 들지만은 않는다. 고양이가 '그'의 마음을 아는 척 하는 것처럼, 이 비좁은 길도 그를 아는 척 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서둘러 훤한 가로등이 비추는 대로로의 일탈을 궁색하게나마 서둘렀다.


 


* * * * * * * * * * * * * * * * * * * *


<그 사람>


뜨겁게 내리쬐는 한 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아스팔트는 익어가고 있었다. 석쇠 위에는 배부른 자들의 애마가 굴러가고 있었고, 그 말들은 거칠것 없이 배설물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여름의 대로는 오물이 굴러다니는 쓰레기통. 자동차에서 나온 매연은 매끄럽게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덥네."


그는 들어줄 사람 없는 말을 뇌까리며 넥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단지 점심을 먹으러 나왔을 뿐인데, 그 몇 분 동안에 '그'의 몸은 온통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 회사로 가는 골목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땅에서 나오는 후덥지근한 열기로도 모잘라 사람의 열기까지 느껴야 한다니.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회사로 향했다.


 


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안경을 벗고 있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는 세상은 물감 범벅. 흐릿하게 펴놓은 유화 물감이 번져 있는 세상. 모든 경계선이 사라진 세상. 연필로 그린 스케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땅에 시선을 박고 익숙한 보도블럭을 눈으로 훑었다. 눈 뜬 장님 마냥 지레짐작으로 회사를 찾아 어기적거리며 들어갔다.


차디찬 공기가 남자를 맞았다. 싸한 에어컨 바람이 그의 코를 스쳐 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뜨뜻한 땀이 식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다시 넥타이를 졸라 맨 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7층에서 내리자, 그는 서둘러 가면을 썼다. 너그러운 자비의 가면. 오늘도 부하 직원들이 인사를 걸어올 것이다. 밥은 잘 먹었냐며.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에 다 응대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미소로 답했다.


어찌된 일인지, 항상 살갑게 맞아주던 직원들은 남자를 슬금슬금 피했다. 남자의 등에 식은땀이 비죽 솟아올랐다. 혹시, 설마. 불안한 감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겨났다. 그의 걸음은 조바심에 힘입어 점점 빨라졌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극에 치달아 있었다.
 
사무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그의 자리는 말끔했다. 항상 그렇듯이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이번엔 먼지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서류, 책, 필기도구, 노트북. 모두 다 말끔히 접혀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 해고당했구나.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것에 이렇게 화가 난 적은 또 처음이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9층으로 향했다. 회사를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캐물을 작정이었다.


띵동.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남자는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행여 헛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끔. 그는 <기획 본부장실> 이라 써 있는 팻말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을 열어제쳤다.
넓디 넓은 사무실에 커다란 책상, 그리고 자그마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우뚝 책상 앞에 섰다.


"구 부장."


말소리는 자그마한 남자에게서 먼저 나왔다. '구 부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뻘겋게 핏대가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그마한 남자는 실실 눈웃음을 치며 손사래를 저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나, 응? 일단 앉지."


"아뇨, 됐습니다. 간단한 것만 물어보고 나가도록 하죠."


구 부장은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로 입을 놀렸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생각했던 것들, 왜 자신이 이 회사에서 나가야만 하는지.


"...일이 잘못된 겁니까."


"조금 그렇게 되었다네."


"제가 그 제물인 겁니까."


"괜찮아, 괜찮아. 퇴직금은 내가 손을 써서 평균 부장의 서너 배로 넣어놨어. 게다가 다음주 안으로 비슷한 직장을 하나 구해주지."


순간 멍해진 남자는 입을 벌린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봉이 된 값이 이것인가. 단지 윗대가리들의 제물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는단 말인가.
구미가 당겼다. 여기서 입을 몇 번 더 놀리면 퇴직금이고 다음 직장이고 공중 분해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본부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게 더 좋을지도.
주마등처럼 이마에 자식들의 학원과 날로 치솟는 물가, 자동차, 집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구 부장은 벌렸던 입을 소리없이 닫았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 직장은 꼭 기약해주십시오."


"고맙네. 꼭 그렇게 하도록 하지."



상자를 들고 회사를 나오면서 그는 마음을 편히 가지기로 했다. 일주간의 휴가인 것이다. 윗대가리들의 봉이 된 댓가로 내려지는 포상 휴가. 자동차에 짐을 싣고 회사를 빠져나가면서 그는 담배를 물었다. 씁쓰레한 향과 달달한 맛이 섞여 연기로 뿜어져나왔다. 입 안에서 담배 연기를 놀리며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먼저 빠져나가는게 좋을지도 몰라. 일이 더 커져버리면 직장은 무슨, 감방에서 썩어야 할 걸.


한낮의 해와 퇴근하는 것은 색다르고 즐거웠다.


 


차를 몰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던 남자는 멈칫했다. 경비원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급히 차를 돌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비밀로 해 둘 작정이었다. 탈세를 한 남편, 아빠가 본받을 만한 대상이 되겠는가. 오후가 될 때 까지 어디서든지 시간을 때우다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인근 마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안경을 벗고 있어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흡연석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남자가 안경을 잘 쓰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루뭉실하게 펴놓은 찰흙 덩어리마냥,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하기 전 까지는 그가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이미 그런 일들에 너무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는 것은 무서웠다. 눈썹이 올라가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그 순간순간이 그에게는 밥줄의 넘나듦이요 자존심의 연장이었다.


이젠 그런 것들이 너무나 힘겨웠다.


막상 인터넷을 켰지만 평소 게임을 안하는 터라 뉴스만 클릭해댔다. 어느새 그는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피시방을 나온 것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잠이 깊었나보다. 인근 치킨 집에서 닭 세 마리를 사들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것도 얼마만인지. 그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서너 개 있는 가로등 중 두 개가 깨져있어 길은 공포심마저 들게 했다. 구름에 흐릿히 빛나는 달이 깨진 가로등을 대신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길인지 바닥에선 악취마저 풍겨왔다. 쓰레기들은 너저분히 바닥에 깔려 있었다. 쓰레기통이 있는데도 왜 바닥에 쓰레기를 버릴까, 의아했지만 그것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어서 이 길을 건너가기만 하면 되었다.
쓰레기통 위의 고양이가 구슬피 야옹거렸다. 재빠르게 걷던 남자가 뒤를 돌아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바싹 말라 피골이 상접한 것이 굶은지 일주일은 넘어 보였다. 발을 떼지 못하던 남자는 비닐 봉지에서 포장을 까 닭 조각 두어개를 던져주었다.


그렇게 골목길에 쓰레기가 쌓여갔다.


 


집에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훅, 그의 얼굴을 훑었다. 김치찌개 냄새였다. 그는 식탁에 비닐 봉지를 올려놓으며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주 까지 일 주일 간 포상 휴가야. 일 이틀 쉬다가 여행이나 가던지 하려는데, 어때?"


아내는 오랜만에 보는 해맑은 미소로 좋아, 라고 대답했다.


 


 


 


===================================


개학입니다!
입학입니다!


와우!


(어차피 난 내일부터지만.)


 


 

?
  • ?
    언제나‘부정남’ 2009.03.04 06:44
    실제든 픽션이든 퇴직을 휴가라고 하는 가장의 모습은 정말 가슴아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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