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04 06:18

(단편) 피아노 안에서

조회 수 892 추천 수 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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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안에서>



차가운 밤에 달빛이 코끝을 시렸다. 도시의 공기는 지난 반 년간의 공백 때문일까, 더욱 더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내 앞에 늘어져 있는 계단들은 그 동안 늘어진 시간들.


몇 년간 다닌 음악 연습실 간판 아래 발을 디디고 서 있었을 때,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익숙한 형체. 하지만 난 목도리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알아볼 리는 없겠지.



얼어붙은 손을 숨기며 주머니 속으로 마음까지 넣어버렸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사람은 내 앞으로 휙 지나가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눈을 빼꼼히 올리고 사람이 있나 살펴보았다. 그 때, 예의 그 사람이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왔다.


 


"어, 수영이야?"


 


밤의 정적을 깨고 말이 울렸다. 무심한 눈으로, 마음이 없는 말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코 앞까지 다가와 손을 맞잡는 석훈에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의 짧던 머리가 어느새 목을 덮는 것을 보니 시간의 흐름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연습실에 온 것도 얼마만인지.


지난 반 년 동안 이곳에 올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정말, 미치도록 싫었다. 왜 그랬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미치도록.


 


"어디에 박혀있던 거야?"


 


꼭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석훈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질문을 퍼부었다. 어디서 뭘 했냐, 누구랑 있었냐, 건강은 괜찮냐, 어디 아프진 않냐, 혹시 피아노를 그만둔거냐, 등등.
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자 그는 순간 멍해진 얼굴이 되었다.


 


"그럼, 왜 다시 온거야?"


 


이번에는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었다.
피아노가 보고 싶었어.


 


 


 


* * * * *


 


 


새하얀 피아노가 있는 이곳  C연습실은 온통 내 차지였다. 그래, 나는 정말 피아노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단지 '보고' 싶었다.
이유를 모르는 여행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지도 이 주일 째. 나는 C연습실 안의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주일 째, 하루 종일.


어떤 날은 피아노의 뒤에서, 어떤 날은 오른쪽, 또 어떤 날은 밑에서 올려다보거나 각도를 비틀어 보거나. 그렇게 종일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C연습실의 벽이 된 것 같았다.
저녁 7시가 되어 연습실에서 나오면 온 몸이 뻑적지근했다. 목이 아팠고, 눈이 아팠다. 연습실에서 나오면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나 가 밥을 먹고 바로 집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내 생활은 연속된 영상.


자정이 넘어 겨우겨우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누웠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나. 나른했다. 축 뻗어버린 손은 피아노의 끊긴 줄. 나는 C연습실 피아노 위의 찢어진 악보. 정적을 깨고 휴대 전화가 울렸다. 말갛게 명멸하는 액정에는 '김석훈' 이라는 세 글자가 돋아있었다.


 


여보세요, 라고 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크게 전해져왔다. 술을 걸친 목소리.


"김수영,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뭐가, 라는 태평한 목소리가 뻗어나왔다.


"네가 연습실에서 아무런 곡도 치지 않는 거 난 다 알아. 나 뿐만이 아니야, 모두들 다 알고 있다고. 널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그게 어쨌다는 건데?


정적.


그는 할 대답을 찾지 못했고, 나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기에 우리 둘 사이엔 말이 없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전화를 들고 있던 손이 아려와 전화를 끊었다. 눈을 감자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햇빛이 눈부셔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를 제외한 방 안은 언제나처럼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물론 치울 물건도 거의 없는 공간이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 잠에서 깨자마자 토스트를 베어문 채 C연습실로 향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거리를 지나 연습실 간판 아래 도착했다. 학원에 도착하자, 석훈의 말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란 거지?
내 눈 앞에 보이는 C연습실의 표지. 하얀 문을 열었다. 내 앞에 보이는 건 피아노, 그리고 석훈.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넌.


생각이란 필터에 걸러지지 않은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는 어제 일을 기억하는 듯 했다. 그 때 술을 조금 마신건가, 아예 마시지 않은 건가.
나는 이에 개의치 않고 가방을 내려두고 바닥에 폭삭 주저앉았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잘 봐, 라는 말을 던지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새하얀 몸체에 새하얗게 돋아있는 이빨. 그의 손은 괴물의 이빨을 청소해주는 청소기. 아프겠다,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괴물에서 흘러나오는 울부짖음은 그저 울부짖음이었다. 기계처럼, 언제나 똑같이 흘러나오는 비명소리. 심장 소리가 없는 딱딱한 소리. 단지, 울부짖음.


그렇게 그는 쇼팽 에뛰드 전곡을 다 치곤 나를 바라보았다. 슬픈 눈망울이었지만 그건 상관 없었다. 단지 괴물의 이빨에 다친 그의 손이 걱정될 뿐.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처음 앉은 상태 그대로 있자 그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말 없는 연주가와 듣지 않는 관객, 울부짖는 괴물은 C연습실에서 해질녘까지 머물렀다.


벌겋게 사라지는 노을빛이 하얀 피아노 위에 그대로 비쳤다. 동그란 해는 창 밖에도, 괴물의 몸에도 잔상을 남겼다. 나는 그것이 괴물의 마지막이라 생각해 가방을 들고 말없이 문을 열었다.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갈 때까지, C연습실에서는 선율이 계속 흘러나왔다.



또 다시 밤이 오고, 아침이 오고, 석훈이 오고, 비명이 들렸다.
이런 일이 벌어진 지도 오늘이면 일주일 째. 이제 석훈은 나보다 먼저 와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나는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괴물을 보고 있었다.


 


가까이 하기는 싫은 괴물. 하지만 보고싶었다. 나를 이토록 이상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호기심과 불편함, 증오심이 뒤섞인 감정은 내게 그것의 내부를 보라 명하고 있었다. 피아노의 내부를 보고 싶었다. 하늘로 높이 치솟은 괴물의 귀 밑으로 속속들이 내장이 보였다.


내가 피아노 옆에 섰을 때, 그가 나를 흘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자 피아노의 혈관이 울거졌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건반을 누를 때, 동시에 혈관이 수축했다. 그것이 너무나 재미나게 보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괴물의 울부짖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곤, 숨을 쉬기 시작했다.


비명이 울림을 남기고 이어져갈 때, 괴물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석훈이 페달을 밟을 때, 피아노의 울림이 진해졌다. 그가 페달을 밟았을 때, 피아노 내부에서 일자로 평행된 나무들이 줄을 내리쳤다. 일정한 박자대로, 쿵, 쿵, 쿵.
마치 심장소리처럼.


나는 동그란 눈을 하곤 그것을 바라보았다. 쿵, 쿵, 쿵.
나무들이 일제히 겨울을 깨뜨리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살그머니 얼어버린 얼음을 깨고, 그것들을 녹여버리려는 듯이. 박씨전의 박씨처럼 흉한 허물을 벗어버린 괴물. 하얀 몸체가 입김을 타고 날아갈 것 같았다.


잡지 않으면 공중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아 피아노를 잡은 순간 연주가 끝나버렸다. 나는 그를 황급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멈추어 버렸다. 위급함을 느낀 나의 입에선 말들이 돋아나왔다.


더 쳐줘.


석훈은 입을 벌리곤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못 들었을까,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더 쳐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안도에 가득 찬 목소리.


 


"깨어났구나."


 


그 때 술 취한 목소리와 같은 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것이 이상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 그 전화는 취중 전화가 아니었구나. 단지 울고 있던 거구나.
그의 목소리에 전염이 된 것일까, 나는 안도감에 취해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모를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소리.


 


어느새 내 눈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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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부정남’ 2009.03.04 06:18
    전 피아노를 꽤 좋아하다만,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피아노 치고 있는 사람을 그렸더니 '고릴라를 치료하고 있는 동물병원의사' 라고 취급받은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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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거프 2009.03.05 07:14
    ...피아노가 고릴라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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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부정남’ 2009.03.06 05:57
    건반-이빨, 검은몸-피아노를 입체적으로 그렸더니 영락없는 고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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