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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잔뜩 낀 구름에 만월도 힘을 내지 못하는 밤, 도시의 불빛마저 등을 돌려버린 골목 깊숙한 곳에 홀로 남겨진 ‘큐브’는 최대한 냉정히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어둠 속을 서성이며 그를 노리고 있었다. 벗어날 수 있을 확률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1%가 채 안될 것이다. 신속의 그림자와 그 사이에는 들고양이와 시궁쥐 그 이상의 격차가 있음을 직감하고, 인정한다. 조용히 벽을 등에 지고 평소의 버릇대로 손가락을 놀려보지만, 그런 행동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벽면을 두서없이 수놓은 작은 돌기들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열심히 시선을 분배해가며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식별할 수 있는 물체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벽을 더듬으며 이동하려는 찰나에, 콘크리트 벽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더듬어왔다. 그는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자퇴생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를 거부했다. 그것이 청소년기의 방황, 일탈의 연장선상에 있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결정은 아니었다. 왕따. 학교라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집단 따돌림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그러한 단체 생활에서 발생하는 필수적인 부조리의 피해자였다. 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마침내 그 시스템 자체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 자유를 얻었다. 답은 옳았다.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은 그에게 능력을 주었다.




     그의 코드네임이자 능력을 지칭하는 단어인 큐브는 일반적으로 한 면이 9개의 조각을 가지는 입방체 구조의 퍼즐, 루빅스 큐브에서 따온 것이다. 뒤섞인 조각을 회전시켜 각 면을 같은 색상으로 통일 시키는 것처럼, 그는 얼기설기 얽힌 상황을 파악하여 그 상황에 가장 맞아떨어지는 최상의 공식을 도출해내 해답을 계산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해답을 추론해낸다. 그가 항상 불리한 상황을 피하고 유리한 상황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미래에 벌어질 상황을 논리적으로 예측하는 것이지, 이미 벌어진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패배할 것이 확실함에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큐브는 자신의 능력이 반쪽짜리였음을 절실히 통감했다.




     “왜 눈을 감은 거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저항을 포기했음에도 그의 숨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가 물어왔다. 큐브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더 이상 저항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그의 목을 움켜쥔 목소리는 이상하다는 투로 다시금 질문했다.




     “어째서 가능성을 그렇게 쉽게 버리는 거지?”


     “더 이상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그건 누가 정한 거지? 네 스스로 그렇게 결론지은 건가? 더 이상 답은 없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네 스스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답을 얻은 건가?”




     독백인지 질문인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다소 상기된 중얼거림이 그의 정면에서 흩어졌다. 큐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소리는 점점 웅얼거림으로 변해 사그라졌다. 그리고 잠깐 동안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 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큐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독백은 단숨에 고함으로 바뀌었다.




     “눈을 떠.”




     목을 조이는 손에 힘이 들어왔다.




     “눈을 뜨고 네가 처한 상황을 똑바로 봐.”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런 명령 따윈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큐브는 그 순간 자신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논리적인 추론 따위가 아니라 감정적인 희망에 불과했지만, 그는 조금씩 시야를 확보했다.




     “살고 싶지?”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보라색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였다. 큐브는 그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숨통이 조여 오는 답답함에 잔뜩 얼굴을 찡그린 그가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목에 날카롭게 닿는 것이 손톱이라고 생각했지만, 손톱 밑으로 비어져 나온 것이 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살고 싶다면 어째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지?”


     “어차피 내가 죽는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 널 살려주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 셈이지?”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항을 통해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잊은 터였다. 타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 아니면 도. 항상 그가 취해온 방식은 그런 극단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몇 마디의 대화로 살아날 기회를 얻은 이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과 같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주겠다는…….”




     목숨을 구걸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상대는 널브러진 그의 뺨에 구두 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그 기회를 스스로 잡아.”




     어금니가 부러져 혓바닥 위로 굴러 떨어졌다. 질척한 피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비저너리의 소재를 알려주지. 스스로 쟁취하는 법을 모르는 녀석은 살아있는 게 아니야. 난 죽은 녀석을 또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의 눈앞에 서류 봉투가 떨어졌다. 겉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발버둥치는 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보라색 눈동자는 어둠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빗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폭우로 변했다. 입에서 흘러나와 고인 피를 빗방울이 두들겨댔다. 짓이겨진 뺨도, 새파랗게 멍이 든 목도 빗방울이 두들겨댔다. 눈앞의 봉투를 집어 품 안에 넣었다. 한참동안 쏟아지는 빗줄기를 덮고 쓰러져있던 큐브는 천천히 일어서 그의 팀이 쓰러진 자리를 찾았다. 하나 둘 씩 쓰러져있는 에란드 보이즈를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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