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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월의 부모는 이상했다. 소위 말하는 땅부자였으며, 벼락부자이기도 했다. 돈은 썩어나겠다고 걱정하게 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본인들은 그런 사실에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돈 쓰는 일을 기피하지도 않았고, 더 많이 긁어 모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별다른 직업도 없는 주제에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고 심심치 않게 별의 별 물건들과 함께 귀가하곤 해 집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사오는 물건은 필기구부터 가구까지 종잡을 수 없었다. 메이커도 따지지 않는 듯 했다. 노상 가판대에서 볼 수 있는 싸구려 볼펜이나 몇 백, 몇 천 단위로 올라가는 명품 옷이나 쓸 일도 없을 남대문표 이민 가방을 사오곤 했고, 심지어는 어딜 가야 사올 수 있을까 싶은 독특한 물건들 까지도 사오곤 했다. 그 중 아프리카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타원형 인면장식품 들은 그 소재지조차 불분명한 물건이었다. 그런 기행을 일삼으면서 직장도 없으니 돈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데도, 어째서인지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이 그런 기벽을 보인지 벌써 십 수년이 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금융시장에서 특별하게 특별한 우대를 받는 고객이었다.




     그들의 이상한 취미가 그 뿐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온갖 물건들을 모으다 보면 집의 공간이 부족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택을 사방으로 조금씩 증축해 나갔다. 보통 방 두 칸, 거실 하나 정도의 크기로, 매 번 다른 스타일로 짓는 것을 고수했다. 덕분에 그들의 집은 기괴하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증축한 부분이 전부 이어져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집 안에서 걷다가도 보면 한옥인가 싶다가 서양식 콘크리트 건물이고, 그렇다 싶으면 토담이 나타나고, 또 이슬람 사원 같은 지붕이 나타났다. 아무리 자기 땅이고 자기 돈이라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괴상한 일을 벌이는 집이 둘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독보적으로 기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자제심이 없는 낭비벽이나 증축중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행으로 가리워진 집안의 내부 사정이었다. 돈이 많으니까, 머리가 너무 좋아서, 혹은 그 이외의 이유로 미쳐버렸다. 그들이 어느날 갑자기 소똥으로 집을 짓는다고 해도 이정도 설명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하고 넘어간다. 법적으로 저촉되는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취미 생활이 누가 보더라도 범죄행위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에 있었다. 귀가한 뒤 식사를 하고, 평범하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면서 티타임을 가진 후에 영위하는 그들의 취미는 자식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취미라는 것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부가적인 성취감을 얻기 위해 고르는 여가활동이다. 그 말 그대로, 그들은 자기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고, 그날의 폭력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만족스러웠는지,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거나 다음날 시도할 폭행방법에 대해 논하며 성취감마저 느끼는 것이다.




     그들의 학대는 일반적인 가정폭력과는 그 이유부터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가정폭력이라 함은 가해자가 폭력적인 성향을 띄게 되는 기저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의 폭력에서는 그러한 원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인 것도 아니었고, 자식과 관한 뼈아픈 기억이나 자식에게 애정을 주지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가학의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취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월을 차고 때리고 밟고, 따귀를 때리거나 도구를 이용해 매질을 해댔다. 매질용구는 자나 지팡이나 빨래 방망이, 주걱, 야구방망이나 골프채, 냄비용 스테인리스 국자, 화장실 청소용 플라스틱 솔, 때로는 플라스틱 장난감 칼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식기를 던지고 주스캔이나 통조림통을 던져대거나 남은 내용물을 들이붓기도 했으며, 펜치를 이용해 손톱을 비틀거나 발톱을 뽑아대기도 했다. 커터칼이나 면도칼이나 미용가위, 부엌가위 등이 현월의 피부를 그어대는 데에 대동되기도 했으며, 포크나 볼펜이나 연필, 다양한 사이즈의 바늘 또는 오뎅용 나무꼬챙이가 현월을 찔러대는데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시도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능숙한 솜씨로 우려낸 차를 우아하게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가학의 맛 또한 능숙하게 우려낼 수 있을까 탐구하곤 했다.




     지금도 마침 그들의 신종 학대법이 요란하게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머리 빗기기. 빗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하는 행위. 빗의 종류는 플라스틱, 나무, 스테인리스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어떤 것을 사용하는가에 관계없이 목표 자체는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것으로 같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맞아 머리 빗기기에 새로이 도입된 물건은 일반적으로 빗이라 부르는 물건에 비하면 심하게 거칠고 투박했다. 적당히 길가에 굴러다니는 나무판자에 쇠못을 박아 넣은 형상에 가까웠고, 어딜 보나 머리카락을 빗는 게 아니라 머리 가죽을 벗겨낼 상이었다. 굳이 그 물건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빗이 아니라 글겅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황소 털을 빗어줄 것도 아닌데 그런 녀석을 쓰다니 과용에 오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런 물건을 현월의 머리에 대고는 머리를 빗어주겠다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무려 수제란다 수제. 이걸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 했는지는 알겠니?”


     “그걸 알았으면 벌써 엎어져서 고맙다고 눈물이라도 흘렸겠죠. 지금도 엎어져있긴 하지만. 너 고마운 줄은 아니?”




     그들은 바닥에 엎어진 채 가만히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는 현월의 머리에 쇠빗을 툭툭 쳐대며 에게 그렇게 말한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현월과 말을 섞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오랜 경험에 의해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묵묵히 당하고 있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지 않는다. 답 또한 구하지 않는다.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요즘 머리털이 완전 개털이더구나. 머리 손질은 잘 하고 다녀야지 않겠니?”




     뾰족한 빗끝이 현월의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걸려 잘 움직이지 않자 그의 아버지는 그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빗질을 계속해나갔다. 피부가 찢어져 조금씩 피가 배어나왔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현월의 부모는 그 점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조금은…….”




     빗이 현월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더, 아파도…….”




     빗이 현월의 머리로 떨어졌다.




     “괜찮겠지? 그치?”




     빗은 연신 투욱투욱 소리를 내며 현월의 머리 바로 위에서 까딱거렸다.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빗이 부딪히는 소리도 커졌다. 그 세기도 소리가 커지는 것에 비례해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기를 십 수차례, 마침내 빗질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상처 자체는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깊게 찢어진 것은 분명했다. 바닥에 핏자국이 새겨졌다. 작지만 큰 기쁨이라는 얘기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현월의 부모는 그의 머리 어딘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확인하고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하고 있었다.




     현월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눈동자를 돌려 피가 흘러내리는 걸 확인했다. 조용히, 부모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허브티라도 한 잔 마시고 잘까?”


     “어제 사온 걸로 할까요? 아직 뜯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그거 좋지.”




     그들은 그렇게 상황종료를 알리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적당히 돈을 꺼내 세어보지도 않고는 현월의 머리 위로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그를 걷어찼다. 반 바퀴, 한 바퀴, 그의 몸이 바닥을 구르는 것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두 사람은 부엌으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부엌으로부터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현월은 그제야 몸을 가누고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손수건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머리에, 다른 한 장으로는 바닥의 핏자국을 닦아냈다.




     현월은 방금 전까지 벌어진 일이 모두 당연한 일인 것처럼 아무런 동요나 걱정, 불만, 분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닥에 흩어진 돈을 챙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책상에 앉아 손수건을 떼어내고 손거울을 잡아들어 책상 위에 세워놓은 거울에 비춰보며 상처를 확인했다. 책상 밑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적당히 소독약을 바르고, 깊게 찢어진 상처에는 거즈를 덧대었다. 모든 작업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능숙했다. 그는 7년이 넘게 계속된 학대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취급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나쁘다거나 위법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불합리한 이 상황을 어디까지나 무관심으로 대했다. 자신의 신변에 직접적으로 닥치는 위해임에도 그 무심한 태도를 고수했다.




     현월이 그러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2년 정도 전의 일로, 고유의 기벽을 손에 넣은 날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손가락을 온통 스테이플러 심으로 도배당하고 난 뒤의 심야. 시기상으로 그의 소리 높여 울어대고 비명을 지르거나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는 행동이 피크에 달해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피부를 죄어대고 있는 철심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침대 위로 쓰러져 뒤척였다. 손가락이 이불에 쓸릴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지만, 개의치 않는듯 했다. 손가락은 이미 벌겋게 부어오를 대로 부어있었고, 머리 또한 그랬다. 극에 달한 화가 순식간에 뇌내압을 높여 당장이라도 골을 부숴버릴 듯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한동안 이불에 얼굴을 박은 채 꿈틀대던 현월은 이내 몸을 뒤집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조잡하게 배치된 가는 은색 선분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잠시 그 모양을 노려보던 현월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거칠게 자신의 손가락에 매달려있는 쇳조각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심을 잡고 있던 구멍들은 찢어져 제 기능을 상실해버렸고, 구멍을 잡고 있던 심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채 낙하했다. 찢어진 피부는 피를 토해내며 손가락을 빨갛게 물들여갔다.




     현월은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커터칼을 집어 들었다. 그가 칼로 자신의 피부를 그어대는 행동을 시작한 것은 다시금 2년 을 더 거슬러 올라간 4년 전의 일이었다. 자해를 하는 것은 정신병리적인 증상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는 환경에 놓인 현월에게 그런 증상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자해는 일종의 현실도피를 위한 스킬이었다. 그는 자해라는 행위에 ‘피부에 상처를 만들고 피가 흐르도록 하는 것으로 현월 자신의 고통을 몸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현실의 고통은 찢어진 상처 사이를 통해 모두 빠져나가버려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수 없다는 생각, 위안, 그러한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날의 고통을 몰아내도 다음날엔 다음날의 새로운 고통이 예약되어 있었지만, 그는 자해하는 것을 끊지 못했다. 고통은 누적되고, 누적된 고통은 생에 대한 공포와 도피로 이어진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따위를 상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일이었던 탓이다.




     따다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민 칼날이 현월의 손가락 위로 향했다. 칼날 끝은 찢어진 상처 끝에서 끝으로 움직이며 도중에 끊어져버린 붉은 선을 마저 이어갔다. 피가 상처를 따라 송골송골 맺혀가기 시작했다. 피가 그의 몸에서 솟아나온 것이 아니라 마치 커터칼이 붉은 잉크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그맣고 동그란 자국이 기호식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입안 한가득 물면 딸기향이 톡톡 튀는 감촉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체리향일지도 모를 일이다. 현월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사실 비린 맛 이외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현월은 혀끝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핥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적당히 상처를 닦아내고 지혈한 뒤 잠을 청했을 것이다. 자신의 피에 식욕을 느끼리라는 것을 누군들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기에 논리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그것이 타당한 일인가 하는 고민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자신이 느낀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현월은 상기된 얼굴로 손가락을 수놓은 붉은 실선들을 차례차례 핥아나갔다. 새빨간 구슬이 방울방울 타액의 길을 타고 목 안쪽으로 굴러들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더 이상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지 않게 되었건만 현월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상처를 탐했다. 어느새 무릎을 꿇고 엎드린 모습으로 자세를 고쳐 잡은 그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는 것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한 탓도, 스스로 자해를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핏방울은 입 안 깊숙한 곳을 지나 기도와 식도의 분기점에 도착하는 순간 반짝거리며 파열했다. 탄산수가 넘어가는 순간 느낄 수 있는 따끔거림과는 달랐다. 매운 것을 먹은 탓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과도 달랐다. 부서진 혈액은 매우 작은 크기로 나뉘어 내벽을 간질이며 기도를 타고 폐로 들어갔다. 분자 단위로 분해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보다 더 작아 현미경으로도 확인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잘게 쪼개졌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갖가지 색으로 변한 혈액의 조각은 그길로 혈관을 찾아 귀향했다. 폐를 지나며 산소 대신 형형색색의 파편과 결합한 헤모글로빈 탓에 피는 더 이상 붉은 빛을 내지 않았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피가 전신의 혈관을 순회하며 온 몸으로 퍼져갔다.




     심장은 묘한 이색 혈액을 삼켰고, 그 색을 더욱 잘게 쪼개어 내보냈다. 어느새 전신을 잠식한 핏물은 혈관 벽을 긁어대며 온갖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어디선가 들었던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기도, 어느 영화에서 보았던 재즈 싱어의 애드리브 같기도 했고, 사물놀이패의 고조된 장단이나 유치원 음악 시간에 들려오는 실로폰과 멜로디언의 어색한 멜로디 같기도 했다.




     현월의 눈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고, 어느새 그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던 공간을 더 이상 채울 곳이 없어 자신의 몸으로부터 넘쳐 흘러나오는 수십, 수천, 수억 개의 파편들이 수놓는다. 수십, 수천, 수억 가지 색과 음을 가진 파편들은 곳곳에서 폭발하며 번져가 순식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져갔다. 무량대수의 기기묘묘한 형태와 음색이 지배하는 깜깜한 바탕은 마치 불꽃축제날의 밤하늘을 잔뜩 겹쳐놓은 것과 같았다.




     그 현실에서 차원 단위로 벗어난 것 같은 공간에 던져진 현월의 신체는 돌고 돌아 그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이내 그 한가운데서 안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파편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져버리고 말았다. 갈가리 찢겨진 그의 신체는 핏빛을 흩뿌리며 이상세계의 중심에서 이상세계 그 자체로 녹아들어갔다. 그가 최초로 마주하는 쾌락이 그곳에 있었다. 고통과 절망 따위는 모조리 하찮은 잡념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세계가 있었다. 그런 쓸모없는 감정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단순히 좋은 기분만이 지배하는 절정의 쾌락원에 융화된 현월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감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현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떨어졌기 때문인지, 원래 그 정도 밖에 유지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환상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존재를 감추고 남은 것은 현실의 감각, 차가운 방바닥, 침대에서 떨어진 충격이 고통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현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잔상만이 남아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찌꺼기만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그저 환상이었던가? 그저 꿈을 꾸었을 뿐이던가? 그런 생각조차 부질없을 정도로 애매모호한 잔향만이 애매모호하게 남아있었다. 하복부의 축축함만이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극쾌감을 느끼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었다.




     그 날을 계기로 현월은 자신을 괴롭히는 부모나 달려드는 고통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도리어 어느 정도는 그 상황에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통이야말로 그 뒤에 찾아올 엑스터시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대 뒤에 이어지는 자해와 자해 후에 이어지는 흡혈, 망아상태는 그 모든 요소가 충족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구급상자를 닫은 현월은 애용하는 커터칼을 집어 들고 침대로 향했다. 무의식의 세계로 현월을 보내주기 위해 마음을 다잡은 칼날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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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란드 보이즈 errand boys 심부름꾼들


망아 忘我 ecstasy 저하된 의식 사이에서 활홀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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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능력자배틀물 비저너리즈와 기벽 시리즈 그 첫 번째인 혈액중독자와 패배한 에란드 보이즈 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인 현월이 최초로 능력자들의 세계를 마주하는 인트로격인 작품이 될 예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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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09.09.19 05:23
    취향 많이 타는 이야기...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종류네요. 끔찍하지만 너무 거칠지는 않고.
    앞으로 이야기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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