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9 03:05

비르테스 레밀의 기억

조회 수 660 추천 수 2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무인지대에 시체들이 깔려있었다. 시궁창처럼 걸쭉하게 변해버린 그 것들은 진흙들처럼 발을 밟으면 푹푹 꺼졌고, 총 끝으로 툭툭 건드리면 성인남성 팔뚝만한 쥐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참호 안에서의 생활은 더럽고 지루하다. 그러니까 더럽게 지루하다. 폭우는, 집에 있었을 때는 별로 볼 일이 없는게, 참호에만 몰려드는 것 같다.


  참호안에선 지루하게 밥 먹고, 볼일보고, 불침번서고, 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밥먹고, 볼일보고, 가스- 독가스다- 누런 안개가 참호로 스멀스멀 기어온다. 어느새 장교건 병사건 군견이건 모두 하얀 외계인 얼굴로 변한다.


  방독면 속에서 발음이 불분명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적들이 온다! 방어태세를 갖춰! 그래서 참호에 단단히 거치된 기관총을 잡고, 망원경을 꺼내보고, 참호 바깥으로 소총의 총구를 내민다. 그러자 참호는 고요해졌다. 장교와 병사들은 몸이 굳은 듯, 같은 자세로 가만히 멈췄다. 움직이는 건 누런 안개의 기류와 숨소리에 맞춰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방독면의 뺨, 그 뿐이었다.


  안개가 사그라진다. 저 너머 무인지대의 철조망과 웅덩이, 시체, 죽은 나무, 불발탄 따위가 나타났다. 장교의 방독면에서 또 불분명한 소리가 나온다. 마스크 벗어-! 편히 쉬어-! 모두 인간들로 돌아온다. 그리고 누군가가 킥킥댔다. 적들이 올까봐 한창 긴장했더니. 그리고 웃음은 곧 킥킥댄 곳에서, 점차적으로 퍼졌다. 킥킥소리는 하하- 소리로 바뀌었고, 그건 독가스보다 더 빨리 퍼졌다.


  웃을 때가 아닌데 말이지. 어느새 밤이었다. 하지만 낮에도 밤처럼 어두워서, 그건 시계바늘을 봐야 아는 거였다.


  뭐가 말입니까, 대위님. 낮에 그냥 한숨만 푹 쉰 금발머리의 소위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대위는 웃다가 질식해 죽을 뻔 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착검돌격을 개시한다. 그렇군요. 자네는 몇 번 돌격해봤지? 아직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 난 다섯 번. 총알 맞은 횟수도 열 번이나 돼. 멋있군요 대위님. 멋지긴, 흉측하기만 한걸. 차라리 결투하다 칼에 베였어봐, 여자들이 환장이라도 하지. 대위는 턱과 뺨에 비누거품을 잔뜩 바르고, 면도칼로 밀어내고 세숫대야의 찬물에 헹궈낸다. 유서를 써놓게나, 소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다. 대위의 콧수염은 가면 갈수록 멋있게 자란다. 대위님은 쓰셨습니까? 아니, 안썼어. 왜요? 죽을 일이 없으니까.


  대위가 미소를 지었다.



  해가 차차 떠오르면서 비는 멈췄고, 먹구름은 사라졌다. 차갑지는 않은 바람이 소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위는, 하늘을 바라봤다.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모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저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아침식사는 완두콩 통조림, 삶은 달걀 하나, 통감자 두알, 쇠고기 통조림 하나, 럼주 50ml였다.


 


 


  소총, 총검, 탄창, 탄창, 탄창, 탄창, 방독면, 헬멧, 그리고 척탄병이니까 흉갑, 수류탄 가방, 게다가 난 장교라서 권총까지. 소위의 무장이었다.


돌격! 돌격! 이쪽으로 포탄과 총알이 쏟아진다. 바로 옆에서 밀치고 지나가던 병사 하나가 갑자기 고꾸라진다. 도와줘요! 쓰러진 병사가 바둥거린다. 그의 방탄흉갑에 총알이 박혀있었다. 소위가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 순간 뭔가가 둔탁한 게 철모를 쎄게 때렸다. 소위의 머리가 울렸다.


  소위가 눈을 떴다. 아까 도움을 청하던 그 병사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대위가 눈을 부릅뜬 채 그의 옆에 쓰러져있었다. 그의 근사한 콧수염은 진흙에 뒤범벅이 되었었다.


  몸을 움직인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다. 장비 때문일까? 손을 움직여서 군장과 흉갑 모두 결속을 풀었다. 여전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뭣 때문이지. 설마. 허리 아래쪽은 모두 멀쩡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것. 총과 포탄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누런 안개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햇빛이 더욱 더 빛나는 것 같았는데, 안개가 자욱해지면서 결국 사라졌다. 그렇지만 안개는 눈이 부셨다.


 


     


 


 


  3년 간의 게레스-유엘리스 파니아 전쟁은 결국 게레스 파니아와 유엘리스 파니아가 서로의 정부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얻은 건 하나도 없었고, 잃은 것만 많았다. 차라리 땅이라도 한 뼘 빼앗고 끝나면 보람은 있으려나.


  레밀은 아직도 그 때 기억이 선명했다. 동시에 흐릿흐릿하기도 했다. 돌격하기 바로 전에 술을 몇잔 마셨는지 하는가 하는 그런 세세한 건 아니었다. 첫 돌격 때, 강한 충격에 진창에 쓰러지고, 몸이 이래저래 움직일 수 없었던, 그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격임무를 완수하고, 소대원들과 같이 환호성을 지르던 기억은 난다. 분명 첫 돌격 순간은 기억에 남고, 너무나도 생생한데, 잃어버린 그 기억은 카메라 플래시의 마그네슘가루가 타버리는 순간과 같았다. 분명 첫 돌격은 성공적이었다. 참호를 점령하고 나서 부대원들과 환호성을 지른 것도 기억난다. 그러니까 레밀의 기억은, 소설의 어느 대목 전체가 찢겨져 나가는 대신, 일부 분량만 찢겨져 그 대목의 절정부분만 사라진 것과 같았다.


  하긴 기억상실증이 그런 것이었다. 아마 그 때 일시적으로 쉘쇼크 현상을 겪었을 것이다. 척탄병들의 기억으로는, 레밀은 그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라니까. 이래저래 옛날을 생각할 필요는 없지. 그 때문에 잃은건 없으니까. 하지만, 왜 그걸 자꾸 들춰내려고 하는걸까? 머리가 복잡해서, 창문을 열었다. 파란 공간 안으로, 조금 습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다락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밀은 파자마 차림으로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곧, 푸른 지평선 어딘가의 틈새로 샛노란 햇빛이 달걀 속의 병아리처럼 조금씩 뚫고 나왔다. 햇빛은 레밀의 다락방의 수많은 맞은편 건물들을 차례차례, 조심스레 밟고 창문사이를 통해 다락방으로 들어왔다. 빛은, 레밀의 얼굴을 한번 훑더니 다락방 전체를 누볐다. 푸른 다락방은 곧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시우다드 델 에스데의 아침이었다.


?
  • ?
    언제나‘부정남’ 2009.03.29 03:05
    '윗대가리들이 "이것밖에 길이 없다!"라고 생각하서 하는 것이 전쟁'이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40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LiTaNia 2009.04.09 589 1
139 곰인형 만드는 곰인형 4 idtptkd 2009.04.09 1179 5
138 이리아 1 file A:리나리 2009.04.08 675 1
137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LiTaNia 2009.04.08 640 1
136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LiTaNia 2009.03.31 665 1
135 지옥 1 카르고의날개 2009.03.31 720 2
» 비르테스 레밀의 기억 1 렌덮밥 2009.03.29 660 2
133 Synthesis War 하노나 2009.03.30 604 1
132 연상기억은 이렇게 한다 3 . 1 연상달인 2009.03.22 561 0
131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LiTaNia 2009.03.22 637 0
130 (퓨전로맨스판타지)블랙스피릿나이트 제2장:과거속.. 린스탕컴 2009.03.21 730 0
129 (퓨전로맨스판타지)블랙스피릿나이트 제2장: 과거속.. 린스탕컴 2009.03.21 761 0
128 (퓨전로맨스판타지) 블랙스피릿나이트 제1장: 또 다른 세계. file 린스탕컴 2009.03.21 778 1
127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LiTaNia 2009.03.21 670 0
126 블러디 버서커 (Bloody Berserker) - 1장 백발의 검사 (4) J-Taki 2009.03.21 625 0
125 (퓨전로맨스판타지) 블랙스피릿나이트 제1장: 또 다른 세계. 린스탕컴 2009.03.16 749 0
124 (퓨전로맨스판타지) 블랙스피릿나이트 제1장: 또 다른 세계. 린스탕컴 2009.03.16 733 0
123 (퓨전로맨스판타지) 블랙스피릿나이트 제1장: 또 다른 세계. 린스탕컴 2009.03.16 591 0
122 (퓨전로맨스판타지) 블랙스피릿나이트 제1장: 또 다른 세계. 린스탕컴 2009.03.16 659 0
121 (퓨전로맨스판타지) 블랙스피릿나이트 프롤로그 린스탕컴 2009.03.16 605 0
Board Pagination Prev 1 ... 209 210 211 212 213 214 215 216 217 218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