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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 전화에 허겁지겁 차를 몰아 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폭풍우 치는 밤. 흑백 톤 그림처럼 색을 잃은 낡은 한옥 집은 소름끼치도록 고요했다. 흰 수의를 말끔히 차려입고, 깨끗하게 치워진 작은 방에 반듯이 누운 엄마 모습을 보자 눈물부터 났다.


몇 년 전 나는 집에서 나와 직장 근처에 자리 잡았고, 남동생은 미국 유학을 가서 없었다. 당신 홀로 얼마나 오랜 시간 이 집을 지키고 있었을까. 집을 나가면서 나는 몇 번이고 엄마에게, 자신에게 이렇게 정당화시켰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곧 돈을 벌어 모으면 다 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 결과는 보란 듯 참담했다.


꼴사납게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보니, 어둠에 잠긴 집안 구석 어디에선가 소리 없이 튀어나온 그 녀석이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까만 정장 코트에 장갑, 챙 넓은 검은 실크햇을 써 온 몸을 감춘 그것을 보고 나는 저승사자로 지레짐작했다.


저승사자는 슬픔을 억누르는 투로 말을 꺼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그 당시 내겐 그 목소리가 조금 들뜬 것처럼 여겨졌다. 첫 인상부터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죽었어.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어. 왜일까."


목소리를 통해 난 그것이 같은 여성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평온한 엄마 얼굴을 내려보다가, 다시 나를 보곤 물었다.


"넌 윤주 자식이야?"


그렇다고 답하자, 그것은 고개를 끄덕이곤 실크햇을 벗었다. 모자에 감춰져 있던, 흘러내리는 듯 윤기 있는 머리칼과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어쩐지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에, 외국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이 여잔 누굴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다음 말이 떨어졌다.


"그렇구나. 나도 그런데."


묘하게 유쾌함을 애써 감춘 듯 억눌린 목소리는 거짓을 뜻하는 것 같지만, 또 워낙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말 의미 자체가 너무도 황당한 소리라 그것이 사실일 수 없단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것이 무슨 장난인가요, 하고 묻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장난 아냐."


여자는 딱 잘라 그렇게 답했다.


"여기 유언장도 있어. 재산은 너희 둘이 나누어 가지라고 했어. 하지만, 이 집은 내 거야."


무슨 소리냐고 항변하려 했지만, 여자가 먼저 '유언장'이란 것을 내밀었다. 분명한 엄마 필체로, 이 혼란을 미리 예상이나 한 듯, 거기다 그것을 몹시 즐긴 것처럼 쓰여 있었다. '오밤중에 무슨 날벼락인가 싶겠지만,' 내 심정이 바로 그랬다. '그래도 우리 딸 와서 보는 게 어디니. 아들은 내 얼굴 못 보고 갈 것 같아 안타깝지만.' 소리 소문 없이 죽어버리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 없었을 터였다. '남길 것 얼마 없는 변변찮은 삶이었지만 그거라도 우리 딸, 우리 아들에게 남기고 싶었어.'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이 집만은, 내 딸이자 절친한 친구인 유희에게 남겼으면 해.' '마지막까지 물의를 남기고 떠나서 죄송합니다, 꾸벅.' 아아, 이런 엄마였었지. 이 여자 이름이 유희로구나.


도대체 50대 중반 여성이 자기 마지막 가면서 남기는 글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차라리 어디 놀러가며 남긴 메모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소위 '유서'란 것을 다 읽고 난 마루로 나왔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마루를 한 바퀴 빙빙 돌다가, 유서 내용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며 머리를 한 번 쥐어뜯은 뒤 전화기를 발견하곤 곧장 국제전화를 걸었다. 미국에 있는 남동생에게 거는 전화였다.


왠지 힘이 빠진 남동생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웬일이야? 거기 한밤중일 텐데."


"엄마 죽었어. 그거 알아?"


스스로 듣기에도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수화기 너머 침묵을 지키던 동생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알긴 아는데. 아무렇지도 않은가봐, 누난?"


"안 슬픈 거 아냐. 혹시 징징 짜고 있었어? 그래서 풀 죽은 목소리야?"


"아냐, 그런 거."


"어쨌건 들어봐. 글쎄, 엄마가 집을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준다잖아. 어떻게 생각해?"


"엄마 딸이란 여자?"


"그래, 지금 옆에 있어. 바꿔줄까?"


한숨 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들려온 것 같았다.


"아니, 바꿔서 뭘 어쩌겠다고. 그래서 화났어?"


"당연하지. 얘, 이게 말이 돼?"


아까 소리 때문에 수화기에 귀를 바짝 대고 듣고 있었더니 작게 쿡쿡대는 동생 음성이 들렸다.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웠을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일까?


"어떻게 생각 하냐니까!"


"좋을 대로 하라지. 대신 누난 나머지 재산을 가지면 되잖아. 난 필요 없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지. 게다가 필요 없다니. 너 괜찮아? 좀 이상한 거 같아."


동생은 거듭 괜찮다고 했지만 여전히 목소리 속엔 생기가 없었다. 미국 어느 지방인가가 재난을 겪었단 소식을 들은 적 있었다. 조금 걱정이 되어 물었다.


"거기 무슨 문제없지? 요즘 시끌벅적하잖아. 무슨 증후군 하는 걸로."


"……아무 일 없어."


"그럼 다행이고. 몸 잘 챙겨.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바로 돌아오고.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 혹시나 그 여자 전화 또 받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해. 다른 소리 할 것도 없어. 알았지?"


"그 여자 곁에 있는 거 아냐?"


유희란 여자는 마루에 계속 앉아 있었다. 목소리를 줄이지도 않았으니까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았더라도 전부 들었으리라.


몸조심하란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비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일 때문에 내 머릿속은 복잡했는데, 죽은 어머니 얼굴은 잠든 듯 평온해 보였다. 무심코 산 사람을 대하듯 푸념이 나왔다. 엄마, 이 상황에 잠이 오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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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 같지 않은 판타지를 쓰는 인간입니다. 한참 바쁠 때라선지 조용하네요, 창도는.


 하긴 저도 바쁘지 않다면 이 시간에 이렇게 타자치고 있을 리 없지만....


 


 하루빨리 방학이 오면 좋겠습니다. 시험은 skip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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