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2 08:20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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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서툴게나마 읽을 수 있게 되기 전 부터 나는 검이라는 도구에 매료 되었었다. 칼날의 반사되는 빛에 홀리고, 생명을 무디게 만드는 예리한 칼날에 마음을 주었다. 무가의 자제로서 백점짜리의 답안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꽤 많았겠지만 내가 매료된 것은 검 그 자체이지 그에 의한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장인의 검을 알아보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작 무도에 대한 마음가짐 자체가 되어 있지 않아 열살이 넘었을 즈음엔 내 가치라고 느껴졌던 재능도 거기까지라는 것을 느꼈다.

  “도큘. 검이란 그 존재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검을 들고 지켜야만 하는 것을 지켜 낼 때에 비로소 검의 존재 의미가. 가치가 증명되는 거란다.”

  무도에 하등 관심이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검을 휘두르게 된 계기는 형님의 그 말씀 덕분이었다. 여덟살 차이의 형님은 무력과 기품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나의 검에 대한 무조건 적인 애정을 진심으로 인정 해 주셨던 우상과도 같은 분이셨다.

  “도큘님.”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나를 지도교사인 해리 밀오드가 불러 깨운다.

  “아. 잠깐 다른 생각을 좀…….”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저희 이베트가는 리튤팁의 4대 국왕이셨던…….”

  그저 따분한 가문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귀족의 자제로서 이 정도의 지식은 필요 불가결 하다며 어릴 때 부터 내 뒤를 봐왔던 카멘카멘 집사가 붙여 준 지도 교사는 그저 눈치를 보며 보잘것 없는 이 조그만 소국의 역사를 장황하게 부풀려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과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별개이다. 이후의 오후엔 또 다시 전술에 대해 지도 받게 된다. 후에 나설 실전에 필수적인 교육이기에 이처럼 딴 마음을 먹진 않겠지만, 지루한 것은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복습 잊지 마세요.”

  그가 서재를 나가자 마자 한숨부터 크게 내쉬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치는 것만 같다. 그에 비해 형님은, 앞서 병사를 솔선하여 명예를 거머쥐고 자신이 쥔 도刀의 의미를 관철시키고 그것의 가치를 더해가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님과의 벌어지는 격차에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형님의 뒤를 따라갈 채비가 될 날을 손 꼽아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야 한다.

  형님과 검을 섞어 본 적 한번 없고 그렇게 많은 대화의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성인식을 앞둔 열여덟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형님과 담화를 나누었던 것은 단 네 차례. 그리고 그의 무용담을 듣는 것이 아닌 눈 앞에서 그 명성을 목격했던 것이 한번. 그렇지만 난 그 네번의 대화에 자신이 걸어갈 길에 확신을 두게 되었고 단 한번의 목격에 평생 느껴보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까마득히 어렸을적이지만 형님의 그 아름다운 검술은 나를 매료시켰다. 분명 1합의 필살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나는 형님의 검이 잔상을 이루며 짚단을 일순간 세번에 걸쳐 베어 넘기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머지않아 성인식을 마치고 나면 난 아버님이 계신 본궁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귀족의 의무를 다 하게 된다. 무엇보다 무도를 중시하는 아버님이시고 백성을 지키는 귀족의 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뒤숭숭한 이 시점에 리튤팁의 왕으로 올라 서 계시는 아버님의 직계 후계자인 우리가 직접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버님의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형님은 이미 리튤팁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리튤팁은 웨스트레기온의 변방에 위치하는 소국이다. 몇몇의 소수민족이 뭉쳐 이루어진 나라이기 떄문에 왕과 직접적인 혈연이 아니더라도 재능을 인정받은 무인들이 대대로 나라의 유지를 이어 왔다. 그 400년의 풍습을 단 8년만에 뒤엎어버리고 왕의 권좌에 등극하신 것이 롤루니기아 이베트. 바로 나의 아버님이시다. 자세한 계기는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지만 내가 두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신 어머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선대 국왕의 목을 베고 아버님이 왕의 자리에 올라 앉으셨지만 내전은 끊이지 않았다. 올해로 벌써 칠년째인 내전은 거의 묽어져 이제 쿠데타의 규모에서 테러조차 불가피 할 정도로 그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 정권 교체 직후의 리튤팁은 세력이 무려 네 군대로 나뉘어져 그 기록에 민족분쟁이라고 서술되어 있을 만큼 내전의 크기가 컸다고 한다. 각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 반발하여 이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인데, 결국 셋의 가문이 뭉친 귀족연합이 파토에 물들어 그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 버렸다.

  “결국 형님때완 다르게… 으헥!”

  혼잣말을 응얼이고 있는 내 옆엔 카멘카멘이 인기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작스래 놀라 뒤로 자빠질 뻔 했으나 겨우 균형을 유지하여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놀랬잖아요!”

  칠십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카멘카멘은 그저 '흘흘' 하고 웃으며 점심 식사의 준비를 끝마쳤다는 말을 건냈다. 그렇게도 식욕이 없다며 점심은 거르겠다고 다그쳤지만 언제나 식사는 꼬박꼬박 준비한다. 나를 위해 주는 마음은 잘 알고 있으나, 식욕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미 차려진 식탁이니 그들의 노력을 거부 할 생각은 없다. 이 넓은 저택에서 단지 나 하나만을 위해 경비병을 제외한 하인들이 서른 다섯명씩이나 존재한다. 자신들의 보수만큼의 일을 다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고 나는 그들의 일을 호의로 받아들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카멘카멘이 앞장서고, 난 그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서재는 2층 로비 중앙의 가장 큰 방. 식당은 1층의 뒷 정원의 사용하지 않는 연회장을 이용하여 경치를 즐기며 느긋하게 쉴 수 있게 끔 배치를 바꿔 놓았다. 계단을 내려가 1층 로비에 발을 들였을 때 쯤에는 이미 향긋한 음식냄새가 진동했다. 일꾼들도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춰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그 넓은 공간에서 혼자 음식을 입에 넣다보면 상막한 분위기에 우울한 생각까지 들어버린다. 그렇기에 난 내 식사시간에 맞춰 하인들이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카멘카멘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들어주었고, 처음에는 귀족과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드는 것을 꺼려하던 하던 하인들도 점차 적응되어 식사 시간에 열댓명 정도와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내게도, 그들에게도 좋을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소소한 배려 덕인지 그들의 인사에서 예전과는 달리 진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것에 작용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갔다. 지금은 반수 정도는 얼굴과 이름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큘님. 시트 교체는 식사 후에 해드릴게요!”

  아마, 하인들 중 나이가 제일 어릴 것이라 생각한다. 에이미라는 수수한 이름을 가진 소녀는 활기차게 웃으며 촐랑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가장 먼저 식당을 향한다. 로비를 벗어나 바깥의 식당에 도달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만발하고, 그들의 미소가 나를 반기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러한 풍경의 연속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냉혹하고 무감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던 아버님의 본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형님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이 내 본심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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