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19 09:23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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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랑 같이 있는 여자애는, 다른 애도 아니고, 나한테 '집착'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려준 여자애인 나래잖아.


"서연이랑 나래.. 둘이 어떻게 만난거야?"
"참고서 사러 서점에 가는 길이었는데, 어디서 많이 봤던 애랑 마주친 거야. 생각해보니까, 그 때 교문 앞에서 잠깐 봤던 나래였어. 그래서 나래한테 말을 걸어본거야."
"서연이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래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서연이도.. 잘못하면.. 나래같이 될까봐."
"나래같이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칫. 난 이래서 가끔 미니가 싫어. 미니는.. 사람 마음을 잘 모르니까."


내가 정말 둔하긴 한 건가. 이런 얘기를 한두번 듣는 게 아니네. 그런데 왜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많이 듣게 되는지 모르겠다.


"서연이한테 얘기 들었어. 윤민이가 여자애들이랑 많이 알고 지내는 거. 역시, 나래가 윤민이를 제대로 본거야."
"그런데 걔네들은 그냥 친구들인데."
"나래가 전에 윤민이한테 말했잖아. 다른 여자애 만나지 말고 그 여자애한테 잘 해주라고.."


그랬지. 이제 기억난다. 전에 나래가 나한테 그런 얘기 분명히 했었어. 다만 그 때는 나래가 호진선배한테 보였던 집착 때문에 그게 여태 생각이 안 났을 뿐.


"맞아. 민군은 다른 애들한테만 너무 잘해줘."
"서연이도 윤민이랑 전부터 친한 것 같은데, 나래는, 서연이가 나래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뺏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맞아. 다솜이 얘기로는 호진선배랑 나래가 어렸을 적에는 거의 친남매랑 다름없이 붙어다녔다고 했지. 서연이도 우리 옆집에 살아서 어렸을 때부터 계속 붙어다녔는데. 그래서 둘이 동질감이라도 느꼈던 것일까.


"호진오빠는.. 이미 마음이 그 인간한테 기울었어. 그 인간도 호진오빠한테 잘 해주는 것 같고..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그렇게 다정해보일 수가 없었어. 호진오빠 옆에는 그 인간이 아니라.. 나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인간'이라면, 희연선배 얘기인가. 전에는 '요물'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건 마찬가지구나.


"나래는.. 이제 호진오빠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윤민이랑 서연이가 잘 되는 모습이라도 지켜볼꺼야."
"그러니까, 미니가 다른 여자애한테 한 눈 팔지 마. 유정이라던가, 혜인이라던가, 건전 앤 파이터 같이 하는 애라던가, 그리고 그 새롬이라는 꼬맹이라던가.."
"꼬맹이?"
"그런 애가 있어. 나이는 우리보다 한참 어린데, 우리랑 같은 고1이야. 걔도 요새 미니랑 붙어다니기 시작한 애야."


도대체 왜 다들 오해하는 걸까. 이 쯤 되면 내가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게 뭔지 궁금하다. 정말로.


"미안해. 서연이한테 정말 실망하지 않게 잘 할께."
"앞으로 잘 하면 되잖아. 미니가 다른 애한테 한 눈 팔지 못하게 할꺼야."
"나래도.. 윤민이랑 서연이가 잘 됐으면 좋겠어.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래. 서연이를 더 이상 실망하게 할 수가 없지. 정말 있을 때 잘 해야 하니까. 떠난 뒤에 후회를 해 봐야 소용이 없지.


"그런데, 나래도 호진선배 말고 다른 남자친구 만나면 좋지 않을까."
"그래도, 나래는 호진오빠가 좋아. 다른 사람이랑 못바꿔."
"하지만 호진선배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잖아."
"..."


나래는 또다시 침묵하기 시작했다. 아차. 제대로 큰 실수를 했네. 수습해야 하는데.


"미안. 아까전 한 말은 잊어줘."
"미니는.. 눈치가 너무 없어. 이해해줘, 나래야."
"아.. 맞아. 아까..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나래를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전에는 못보던 아저씨였는데, 도대체 나래한테 왜 그랬던 걸까?"


역시 뭔가 곤란한 얘기가 나오니까 말을 돌리는구나. 그런데.. 이상한 아저씨라면, 설마?!


"그 아저씨, 혹시 안경 쓰고 있지 않았어?"
"맞아."
"키는 크고, 체격은 말랐고?"
"응. 맞아. 윤민이 아는 사람이야?"


무섭다. 설마 조공명이 나래를 만난건가. 나래같은 애가 조공명의 마수에 빠지면 안되는데. 조공명 일이 여태 인터넷의 강 건너 불 구경인 줄 알았다가 정말로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니.


"요새 이상한 사람들이 길가에 꽤 있으니까, 나래도 조심해."
"응! 나래는 언제나 조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말하는 걸 보면 전혀 조심할 것 같지가 않아.


"미안해, 나래야. 지나가고 있는데 괜히 불러서 시간만 뺏어서."
"아냐, 서연아. 나래한테 윤민이에 대해 알려줘서 고마워."


그게 고마울만한 일이었나. 나래는 가던 길로 돌아갔고, 나도 이제 집으로 들어가야지 하던 참에 서연이가 나를 또다시 불렀다.


"민군."
"응?"
"나, 다른 애가 민군을 가로채는 거, 눈 뜨고 보고 있지만은 않을거야. 민군을 가장 잘 아는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문서연이니까."


서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서연이랑 나래. 도대체 둘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서연이가 저렇게 불붙은걸까.


나도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직 윤화는 집에 없다. 조공명이 유일동으로 자취방을 옮긴다고 하는게 계속 신경쓰인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악명이 높은 조공명. 파라파라 하나 때문에 여기로 이사오게 되면 정말 어떤 민폐가 생길 지 문제다. 아까 나래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래도 조공명을 만난 것 같았고.


혹시나 싶어서 조공명 블로그에 또 들어가봤는데, 어느샌가 조공명이 새로 글을 올렸는지 새 글 표시가 업데이트되었다.


'평안하십니까? 저 조공명이 자취방을 옮길 유일동. 도원경이라는 곳이 전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도 이렇게 있습니다. 유일동에서 아주 귀한 사진을 하나 찍었습니다.'


저 녀석이 왜 유일동을 도원경이라고 칭하는가 싶어서 글과 같이 올라온 사진을 봤는데,


...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랑 얼굴을 매일 매시간 맞대면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람.


바로, 내 동생 윤화다. 눈에다가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게 보이지만, 저렇게 메이드복을 입을 단발머리 여자애가 유일동에서 윤화 말고 더 있겠어.


다른 애도 아니고 내 동생인 윤화가 조공명의 눈에 띄어버렸다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지만, 윤화 쟤 도대체 언제 그 옷을 입고 나간거냐. 저렇게 입으면 사람들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때마침, 윤화도 막 집에 들어왔다. 역시나 그 메이드복을 입은 채로.


"다녀왔어, 오빠."
"그 옷 입고 밖에 나가면 어떡해. 사람들이 안 쳐다봐?"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긴 했는데.. 나한테 관심있는건가?"


너한테 관심있는게 아니라, 너가 입은 옷에 관심있는거겠지.


"내일 집에 새 친구 한명 놀러올건데, 이번엔 이상한 음식 만들지 마."
"치. 왜 다들 내가 만드는 걸 보고 이상하다고 하는거야. 그 친구 혹시 여자야?"
"응. 여자애야. 왜?"
"..."


그러니까 왜 다들 그거에 민감한지 알고 싶다구. 사실 새롬이가 내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나랑 같은 학년이긴 하니까.


"오빠한테 이상한 일이 많이 생기니까 걱정돼. 마녀가 오빠를 홀리지 않나 그 이상한 언니가 오빠를 납치하질 않나.."
"걱정마. 내일 놀러올 애는 그런 애가 아냐."
"그 언니도 오빠한테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둘꺼야. 오빠를 지켜주는 건 서연언니도 유정언니도 아닌 나뿐인걸."


미안하지만 새롬이는 윤화보다도 어린데. 그리고 조공명이 윤화를 표적으로 삼았으니, 윤화가 날 걱정하는 만큼 나도 윤화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요새 길거리에 변태가 잘 나타난다고 하니까 조심해."
"내 걱정은 안해도 돼. 나보다 오빠가 더 많이 걱정되는데 어떡해."


문제는 그렇게 무서운 변태가 다른 동네도 아닌 우리동네에,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윤화를 노리고 있으니까 오빠로서 걱정이 안 될 수 없잖아.


에이. 모르겠다. 그래도 메이드복을 입고 나가니까 밖에서 사람들 눈에 너무 띄었는데, 게다가 그것 때문에 조공명이 윤화를 노리기도 하고.


"그래도 그 옷을 집에서 그냥 입는건 좋은데, 밖에 입고 나가는건 좀 아냐."
"치. 알았어. 집에선 입어도 되는거지?"
"집에서야 상관없지만."


메이드복만 안 입으면 그나마 조공명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조공명이 이미 '도원경'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이미 우리 동네에 있는 수많은 여자애들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치 표적을 노리는 '매의 눈'을 가진 명사수 브라이언 리처럼.


그나저나 서연이랑 나래 둘이 만나다니. 게다가 나래도 서연이랑 내가 잘 되길 바라고 있다니. 도대체 왜 다들 이러는거야. 그냥 모두 친하게 지내는 건 정말 어려운걸까.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걸까.


에이. 모르겠다. 컴퓨터는 윤화가 신나게 치고 있고, 난 밀린 공부나 해야지.


언제나와 같이 날은 또다시 바뀌었고, 오늘도 서연이랑 같이 학교에 등교.


"어제 나래랑 얘기 많이 했어?"
"응. 나래한테 호진선배 얘기를 많이 들었고.. 나도 미니 얘기를 나래한테 많이 했어. 난 미니를 믿어. 미니가 호진선배같이 되는 건 절대 바라지 않아."


나래는 호진선배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직 호진선배를 잊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점이 서연이한테도 뭔가 아니었나보다. 내가 호진선배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니.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


학교에 도착했는데, 뭔가 엄청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 있다. 그래. 유정이를 매번 노리던 변광성인가 하는 녀석이지. 그런데 왜 내가 가까이 가니까 피하는거지.


"저.. 것만 아니었다면, 유정이는.. 내껀데.."


역시 혜인이한테 뭔가 크게 당한 것이려나. 뭐 잘됐지. 신경쓸 것이 하나 줄어들었는데.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박찬녀석이 나한테 다가왔다. 이번엔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냐.


"긴급뉴스! 조공명, 유일동으로 자취방을 옮긴다."
"그렇지 않아도 조공명 블로그에서 어제 확인해봤다. 큰일났어."
"마침 그걸 봤다니 한가지 더 묻고 싶군. 그 조공명 블로그에 유일동에서 건졌다는 메이드복 입은 여자애. 누군지 몰라도 옷은 정말 잘 어울리는데, 혹시 아는 애냐?"
"...내가 모르는 애다."
"오케이. 기자로서의 임무가 하나 더 늘었군. 어서 취재를 해야지."


그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애가 차마 내 동생인 윤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거봐. 메이드복 하나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너무 관심을 많이 갖잖아. 뭐 역시 '옷이 날개' 라는 것일까.


뭐 이제 더 이상 윤화가 밖에서 그 옷을 입을 일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조공명한테 걸렸으니 몸을 사리지 않으면 안되니까. 게다가 조공명 뿐 아니라 이 자칭기자 타칭스토커까지 내 동생을 찾고 있냐.


박찬녀석이 자리로 돌아간 뒤, 옆에 있는 유정이가 나를 불렀다. 왜 부른걸까.


"윤민아."
"응?"
"조공명이 누구길래 저렇게 열내는거야?"
"인터넷에서 좀 유명한 변태 있어. 요새 우리동네로 온다고 하니까 유정이도 조심해."
"난 윤민이만 내 곁에 있으면, 윤민이만 무사하면.. 괜찮아."


여기서 그런 얘기가 왜 나오지. 에이 모르겠다. 수업이나 들어야지.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이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나랑 서연이, 그리고 혜인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 식당으로 가는데..


"윤민오빠! 같이가요."


역시나 내 뒤에 따라오고 있던 새롬이. 서연이랑 혜인이는 새롬이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새롬이까지 껴서 4명이 식당에서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요새, 스토커라던가, 변태가 많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무서워요. 윤민오빠."
"확실히 요새 좀 그래.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일부일 뿐이야. 세상엔 착한 사람도 많아."
"미니처럼 너무 착한 것도 문제야."


확실히 새롬이같이 어린 애한테는 그게 안 무서울리가 없지. 그런데 서연이가 하는 말이 나한테 칭찬인지 욕인지, 뭔가 미묘하다.


"착하면 좋은 거잖아요. 착한 게 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너도 커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알게 될거야."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고, 찬오빠도 좋고, 윤민오빠도 좋아요."
"..."


서연아. 애한테 너무 많은 걸 가르치려 하지 마. 새롬이가 아무리 검정고시 보고 일찍 들어왔다고 해도, 말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어린애 맞나보다.


"그런데, 변태가 많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찬오빠가 저한테 얘기해줬어요. 조공명인가? 위험한 변태가 우리동네 쪽으로 온다고."
"역시.. 너도 그 얘기 들었구나."
"민군. 조공명이.. 누구야?"


아차, 그러고보니 서연이가 조공명을 알 리가 없지. 마주치게 되면 위험하니까, 일단 알려줘야지.


"인터넷 정모 때 여자한테 접근한 뒤 일을 저지른 변태야. 인터넷에서는 동인지를 올려서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고 과거를 덮으려고 해."
"그거.. 인간 이하잖아. 그런게 우리 동네로 온단 말야?"
"응. 어제 나래가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자기 뚫어져라 쳐다봤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어."
"그게 조공명인것 같아."
"..."


서연이는 말이 없었다. 인터넷의 그 악명높은 변태 조공명이 우리동네로 온다는, 아니, 이미 왔다는 것이 확실히 충격이었을 테니까.


"윤민아."
"응?"


지금까지 말이 없었던 혜인이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윤민이네 집에 갔을 때 인터넷에 본 글에 있었던 그 조공명이야?"


그랬었나. 내가 혜인이 있었을 때 조공명에 대한 글을 보여줬었나. 기억이 잘 안나네.


"내가.. 윤민이랑, 윤민이 친구들.. 내 능력이 되는 대로, 지켜줄테니까, 걱정마."
"고마워."


혜인이라면 믿음이 간다. 혜인이 때문에 변광성이 어떻게 되었더라. 변광성을 간만에 보니 많이 불쌍하긴 하다.


"윤민오빠. 오늘 제가 윤민오빠네 놀러가기로 한 거, 안 잊었죠?"
"응. 내 동생한테도 얘기했어. 새롬이한테 잘 해 줄거야."


사실 윤화가 조금 불안하긴 하다. 그 때 희정이나 유정이한테처럼 또 이상한 거 먹이지는 않을까.


어느덧 점심식사도 끝났고, 혜인이랑 새롬이는 각각 자기 반 교실로 돌아갔다. 그래서 서연이랑 둘만 남았는데..


"미니는.. 거절같은걸 너무 못해.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싫은 게 없는데.. 왜?"
"..됐어. 미니한테 말한 내가 바보야."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건지 정말 모르겠다.


교실로 돌아와서, 별다른 일이 없이 나머지 수업도 끝나고, 종례가 끝나서 밖으로 나가보니 벌써 새롬이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민오빠! 어서 같이 가요."


서연이랑 유정이한테 인사할 틈도 없이 새롬이한테 끌려나와버렸다. 애를 울리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서연이랑 유정이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새롬이한테 끌려서 교문 밖으로 나와보니..


"오빠, 옆에 있는 꼬마, 누구야?"


교문에서 윤화가 나를 여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윤화야. 교문에는 왜?"
"그 조공명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혼자 가기가 무서워서 오빠랑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옆에 있는 꼬마는 누구야?"
"아. 얘가 오늘 우리 집에 놀러오기로 한 내 '친구'야. 새롬아. 이쪽이 내 동생 윤화야. 나보다 한살 어려."
"안녕하세요. 윤민오빠 학교친구, 안새롬이라고 해요. 열두살이지만, 고등학생이예요."


윤화도 새롬이를 처음 보고 할 말을 잊어버린 것 같다. 나도 새롬이를 처음 봤을 때 그랬으니.


"얘가.. 오빠.. 친구?"
"응. 얘가 나이는 어려도, 학년은 나랑 같은 고1이야."
"..."


새롬이가 나랑 같은 학년이긴 해도, 솔직히 나이차가 한참 나니까 친구라고 하기는 좀 그렇긴 하다.


"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컴퓨터를 준 애가 얘야."
"..."


나도 처음에 얘가 자기 컴퓨터를 나한테 준다고 했을 때는 전혀 안믿고 속은 셈 치고 가본 거였는데 정말로 나한테 줬을 줄은 몰랐으니.


"몰라. 뭐야.. 얘. 무서워."


내가 생각해도 이런 애가 우리 학교에 있고, 그것도 나랑 알고 지낸다는 것이 무섭다. 뭐 학교에는 막장녀 아름선배, 엄친딸 유정이, 마녀 혜인이가 있으니 이 정도는 그렇게 놀라운 것도 아니려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왜 이런 사람들만 내 주변에 있는가는 궁금하지만.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말 놓을께, 그래도 되지, 새롬아?"
"당연하죠, 언니."


윤화는 새롬이를 대하는게 뭔가 불편해보인다. 이렇게 어린 애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긴 한데, 자칭기자 박찬녀석 말로는 얘가 입학했을 때 어린 애가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얘기로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는데, 왜 나는 몰랐을까. 윤화도 모르고 있는 것 같고.


다행히도 집으로 오면서 별다른 이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조공명이 우리 동네로 오는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설수밖에 없으니.


집에 도착해서, 새롬이한테 뭔가 대접해주긴 해야 할텐데, 그거는 윤화랑 같이 얘기를 해 봐야지. 그 동안 새롬이는 심심해할지 모르니까 TV를 보고 있으라고 할까.


"새롬아. 잠깐 여기서 TV 보고 있을래?"
"네. 지금 재미있는거 나와요?"
"글쎄.. 한번 켜봐야지."


마침 TV에서는 '리얼스토리 모'라는 TV프로의 '빵삼 아줌마' 편이 나오고 있었다.


"빵삼! 깨랑까랑."


요새 인터넷에서 화제인 빵삼 아줌마. 외계인이랑 대화가 가능한 채널러라고 하던데, 저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보고 있으면 웃기지 않을 수 없다. 새롬이도 저거에 눈을 떼지 않고 있네.


"새롬아, 재밌어?"
"네. 저 아줌마, 너무 웃겨요. 히히."


새롬이가 TV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샌가 부엌으로 간 윤화가 뭘 하고 있나 했더니, 버터,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를 꺼내고 있다. 저건 보나마나 빵을 만들려는 거겠지. 안돼. 말려야 해.


"지금 도대체 뭐하는 거야."
"새롬이한테 빵이라도 대접해 줘야지. 빈 손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
"전에 희정이마저 너 때문에 카스테라에 트라우마 생긴거 기억 안나?"
"그래서 이번엔 카스테라 말고 페스츄리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 그건 괜찮을꺼야, 아마."


이봐. 빵 종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미 반죽이 들어간 상태라서 말릴 수도 없다. 새롬이한테 가봐야지. 새롬이는 여전히 TV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네.


"윤민오빠. 정말로 외계인이 있을까요?"
"글쎄. 지금 외계인이 있다는 증거도 없고 외계인이 없다는 증거도 없으니까."
"외계인이 정말로 있다면, 한번 보고 싶어요."
"그게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같이 무서운거면?"
"에일리언은 뭔지 알겠는데.. 프레데터는 뭐예요?"


나도 에일리언 vs 프레데터라는 영화를 보고 졸다가 나왔지만, 확실한 건 '둘 중 어느 쪽이 이겨도 미래는 없다' 라는 카피만 기억나니까.


"둘 다 무서운 외계인들이야."
"그런건 싫어요. 도너우같은 귀여운 외계인이었으면 좋겠는데."
"걘 너무 잘 속아. 어떤 초록색 공룡때문에 사람들을 애완동물로 착각하잖아."
"맞아요. 그래도 타임 코스모였나? 그 바이올린같이 생긴거. 그거에 타고싶어요."
"그런 게 실제로 있을리가 없잖아."
"치. 있으면요?"


...역시 애는 애다. 만화에 나오는 게 실제로 나타날리가 없잖아. 그런데 얘기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윤화가 어느새 빵을 구운 걸 가져왔네.


"여기 내가 직접 만든 수제 빵이야. 맛있게 먹어."
"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새롬아.


새롬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우물우물 잘 먹고 있는데.. 의외로 새롬이의 표정이 변하지 않고 있다.


"어때?"
"맛있어요, 언니. 혹시 더 있어요?"


뭐야?


윤화가 만든 빵이 맛있다고? 설마 전용 멘트같은거.. 아니겠지?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속으로는 괴로워한다거나.


"정말이야?"
"네. 언니. 맛있는거 저한테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냐. 새롬이 지금 웃고 있어. 그것도 억지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여. 윤화가 만든 빵을 정말로 맛있게 먹은건가.


이건 기적인데.


"고, 마, 워! 거봐, 오빠. 나도 이렇게 내가 만든거 맛있다는 얘기 듣잖아. 오빠는 맨날 내가 음식만들면 나한테 뭐라 그래."


정말로 윤화가 요리 실력이 좋아진 건가. 나 몰래 요리를 제대로 배우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제대로 빵을 굽는건가.


혹시나 해서 나도 그 빵을 한 입 물어봤다.


...


아냐.


평소에 윤화가 만들던 빵 그대로야. 그나마 나는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까 내성이 됐지, 희정이가 이거 처음 먹고 어떻게 됐는데. 덕분에 그 다음날 내가 희연선배한테 혼났고. 이런걸 맛있다고 하기에는 많이 곤란해.


"...이거 평소 그대로잖아."
"왜요, 윤민오빠? 맛있기만 한데요."
"맞아. 내가 맛있게 잘 하고 있는데 왜 그래, 오빠."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분명히 우리는 눈이 두 개 달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런 우리가 외눈박이들만 사는 나라에 가면, 외눈박이들은 눈이 하나 달린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니까 눈이 두 개 달린 우리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여튼, 윤화 쟤 정말 좋아 죽으려고 하고 있구만. 우연히 새롬이라는 미각이 특이한 애가 자기 요리를 맛있다고 하고 있으니. 윤화가 그 얘기 들은거 정말 난생 처음일거다.


윤화는 그새 컴퓨터를 키고 FT 팬카페에 들어갔네.


"윤화언니도 FT오빠들 좋아하세요?"
"응. 저 오빠들이 얼마나 멋있는데."
"저도 FT오빠들 멋있어서 좋아요."
"맞아. 안티들은 다 죽어야 해."
"죽이는건 너무 잔인해요, 언니."


내가 듣기로 이제 개그콘서트에서 연예인들을 안티한다는 '왕비호'라는 개그맨이 나온다고 하던데, 도대체 누구를 건드리려나. 혹시라도 FT를 건드렸다가는 우리 집 TV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고.


윤화랑 새롬이 쟤네 둘이 정말 잘 노는구나. 윤화는 새롬이가 자기 빵을 맛있다고 한 게 그렇게 좋았나.


에이. TV나 봐야지. 아직 빵삼아줌마 편 안끝났네.


TV프로를 보고 있다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새롬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네.


"죄송해요, 윤민오빠. 윤화언니. 이제 집에 가야 해요. 재미있었어요."
"앞으로도 여기 놀러오고 싶으면 놀러와!"
"네. 윤화언니, 재밌었어요."


아차. 새롬이같은 애는 조공명의 표적이 되기 딱 좋으니까 불안해. 내가 데려다주고 와야겠어.


"나 잠깐 새롬이 데려다주고 올께."
"응, 다녀와."


새롬이와 함께 집을 나서면서,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봤다.


"새롬아. 정말로 윤화가 만든 빵, 맛있었어?"
"네. 맛있어서 맛있다고 하는건데요."
"..."


이건 정말 답이 없다. 그나마 나는 윤화가 만든 요리에 내성이 되어있다고 해도, 희정이같이 내성이 없는 애는 윤화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길 뻔까지 했잖아. 이건 도대체 뭐가 이상한거야.


새롬이네 집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이상한 것은 못봤다. 조공명이 아직은 이사까지 오지는 않은건가. 다행이군.


"재밌었어요, 윤민오빠. 내일 봐요!"
"응, 잘있어."


이렇게 새롬이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롬이.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무섭고 위험한 애야. 단지 열두살의 나이로 고1이라는 것 뿐이 아니야.


그 뒤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목요일이랑 금요일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여자애들도 다투지 않았고, 서연이도 새롬이한테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혜인이만은 새롬이를 여전히 안 좋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혜인이는 새롬이한테 왜 그러는거지.


혜인이가 잠재운 변광성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름선배도 안 나타나서 간만에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토요일이 되고, 오늘은 다솜이랑 함께 '건전 앤 파이터' 페스티벌에 가기로 한 날이지. AGRN도 오늘 내한한다고 했고.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 나가려고 하는데..


- 다음회에 계속 -


오랜만입니다. 네. 계절학기 때문에 진도가 좀 많이(?) 늦어졌습니다. 결국 자신이 호진이한테 다가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서연이가 윤민이랑 잘 되기로 밀어주기로 한 나래. 그리고 윤민이네 집에 놀러온 새롬이. 하지만 윤화가 직접 만든 위험한(?) 빵을 맛있다고 해서 윤화랑 쉽게 친해졌고, 윤민이가 의심하면서 다시 물어봐도 그 빵을 맛있다고 말한 새롬이. 그리고 날짜가 지나서 다솜이랑 건전 앤 파이터 페스티벌에 가기로 한 윤민이인데, 무사히 갔다올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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