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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어릴 적부터 쭉, 죽을 때까지 항상 함께였다고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엄마가 죽기 전까지 여자는 단 한 번도 우리 남매 앞에 나타난 적 없었다.


누구야, 넌?


“네 어머니 자식이야. 너처럼.”


참고로 맏언니가 한 명, 어딘가에 있지. 여자는 쿡쿡대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여자가 눌러 산 지 오래지 않아, 결코 순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 가끔 서울에 일이 있다며 올라온 여자가 먼저 내 집을 찾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처음 한두 번은 문전박대했다. 마주칠 때마다 매번 다투면서도, 아주 없는 사람 취급하진 못했다. 분하지만 지난 4, 5년, 우리 남매가 엄마 품을 떠나 각자 일로 바빴던 기간 동안 엄마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 건 그 여자뿐이었으니까. 하물며 먼저 여자 자신이, 서울에 올 때마다 반드시 전화로 연락해 주었는걸.


물론 여자와, 그녀가 엄마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준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엔 전혀 믿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세계가 이 모양이 되기 전까진.


“들었어? ‘신부’가 상륙했다더라고.”


흠칫 놀라 여자를 쳐다봤다. 휴대폰으로 온 뉴스레터를 눈으로 훑으며 여자가 말했다.


“신부가 상륙한 남서부 해안 경보 발효. 전과가 벌써 화려해. 상륙추정 장소 인근 해안도로서 트레일러, 승용차 등 5중 충돌사고 발생. 정말 눈에 띠는 아가씨라니까. 현재 동쪽으로 이동하며 서서히 북상 중.”
“정말 그게, 우리나라에?”


너무 놀라 그것 외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아이슬란드 신부’란 전 세계적 대재앙. 오늘날에 이르러선, 목적도, 의도도 알 수 없이 세계를 방랑하면서, 세상 모든 이들을 명백히 적대하는 ‘신부’와 ‘웨딩마치’에게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인구밀집지역을 주로 통과하며 파괴, 혼란을 일으키고 유명한 ‘아이슬란드 신부 증후군’을 퍼트리는 정체모를 존재들.


“어째서 신부가 여기 오는 거지?”


심각한 내 표정과 달리, 여자의 표정은 평소같이 태평스러웠고,


“글쎄, 나 보러 오나?”


말투도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웠다.



오전 내내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서 여자 둘이 제사상을 지켰다. 여자가 부른, 대학생쯤 돼 보이는 여자가 과일 조금과 떡 한 상자를 사들고 와 오후 상에 올릴 음식 준비를 도왔다. 농담조로 여자가, 자기 반려라고 한 젊은 여자 손님은 얼굴선 가늘고 눈매가 특히 예쁜 미인이었다. 여자 덕분에 과일 한 접시, 나물 두 접시는 더 올릴 수 있어 제법 구색 맞춘 상이 되었다.


부엌에 들어가 여자가 끓인 무국을 발견한 건, 정리를 끝내고 슬슬 점심식사를 하려던 찰나였다.


“이거 뭐야?”


“왜, 맛 이상해?”


검은 옷 여자는 주걱을 가져와 국을 조금 떠 맛보더니, ‘아무렇지도 않네, 뭘.’하며 국그릇을 셋 가져와 조금씩 덜어 담는다.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봤더니,


“걱정 마, 상엔 올릴 거 따로 놨으니까.”


여자는 정말 문제가 어떤 건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맙소사, 그럼 이걸 상에 올리겠다고?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막 한 마디 하려는데 누군가 마당 쪽 문을 똑똑 두들기며 들어온다.


“어머, 웬일이세요? 부부 동반으로.”
“누구니, 넌?”


갈색 털 부츠에 학생 교복 위로 아이보리 코트를 받쳐 입은, 드세 보이는 그 여자애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엉뚱하게도 곁에 있던 검은 여자 입에서 나왔다. ‘아틀라스’라고.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동안 아틀라스 여자앤 벌써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서로 안면이 있는 듯 검은 옷 여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바쁘지 않아?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갑자기 주인이 사라져 바쁜 건 사실이지만 이제 정리는 어느 정도 됐어요. 또 오늘은 그 주인 기념하는 자리잖아요. 제가 빠져선 안 되죠.”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애 말에서 어렴풋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여자애도 ‘주인으로서 엄마’를 알던 손님이다.


“그것도 그렇고,”


마루에 걸터앉아 부츠를 벋고는 여자는 우리 모두를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공무도 있어요. 공석인 주인 자리를 채워야죠.”


“그럼 너, 설마 우리 면담하러 온 거였어?”


주인 자격이 있는지 보려고? 그 말에 왠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이 중에서라면,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얘기하는 거겠지. 잘은 모르지만 그녀라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가장 가까이 있었고, 이 집도 물려받았으니까. 하지만, 엄마 예전 자리를 그 여자가 자꾸 대신 채워가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틀라스 여자애는 내 마음을 읽었을까. 별안간 피식, 웃더니 검은 여자에게 말했다.


“‘마녀’에게 볼 일 없어요. 아무리 윤주 씨 자식이라도, 세계를 조롱하는 이에게 주인 자리라니. 그게 어울릴 거 같아요?”
“그렇다네?”


눈을 찡긋하는 여자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아, 이 여잔 알고 있던 거다. 자신이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단 것을. 아틀라스는 어디까지나,


“예. 최진연 씨. 윤주 씨의 친딸. 전 당신의 자질을 보고 싶어 오늘 이 집에 들른 거예요.”
“그렇지만,”


난처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게 그들이 말하는 '자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엄마가 열 달 배 앓아 나은 것 말곤 잘난 거 하나 없는 난데. 검은 옷 여자나 다른 엄마 아는 이들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론 내 ‘자질’에 대해서라면 검은 옷 여자도 잘 알고 있었다.


“얘, 진연인 평범해. 윤주 성격은 너도 잘 알잖아.”
“그녀라면, 결코 제 자식에게까지 세상의 다른 풍경을 보이고 싶어 하진 않았을 거다?”
“바로 그거야. 바보처럼 순진하고 평범한 게 윤주 매력이라니까.”


이 여자에겐 너나 나 같은 힘이 없어. 검은 옷 여자는 아틀라스에게, 나를 가리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괜히 서러웠다. 내가, 엄마를 모두 알지 못하는 반쪽짜리 딸내미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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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시라노 2009.01.22 08:26
    흐음 야간 산책이랑 이어지는것같은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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