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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밝은 빛을 향해 그는 발을 내딛었다. 본래 그가 둘렀던 황금빛 갑주가 백금처럼 보일 만큼 새하얀 빛이었다. 손에 든 롱소드는 묻은 때를 완전히 지우고 백은으로 탈바꿈했다. 그 속에서 본래 색깔을 지키고 있는 건 오로지 바다를 담은 듯 푸른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묵직하게 땅에 실리는 중량감은 그가 입은 풀 플레이트의 무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숱한 전투, 처절한 싸움이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남자는 싸워 왔다. 함께 했던 동료들은 하나둘 제 몫을 다하러 흩어져갔다. 이 세계의 끝, 마지막 남은 장소에까지 이른 건 오로지 남자 혼자뿐이었다.


 티르 코네일, 변방 평화로운 마을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땅이라는 이곳까지 오는 덴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노라고 그 남자, 사트라는 생각했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그 중심부, 열주로 빙 둘러 싸인 원형 공간 안으로 사트라가 들어서려 하는 찰나,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자하지만 위엄 있고, 부드럽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파랑새 지저귀듯 매혹적인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대리석과 같은 굳건한 의지로 무장한 목소리기도 했다.


 "여기는 위대한 영령들이 잠든 곳. 예를 갖추세요."


 사트라는 발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 여신은 있었다.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 순결한 백색 새하얀 드레스. 여신의 목으로부터 허리까지 드레스는 깊이 파여 활짝 펼친 여신의 검은 날개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는 바로 그녀가 지금껏 그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존재임을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호명되어 이곳으로 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호명된 자들 가운데 남자가 아는 이도 있었다. 분홍색 포니테일 머리에 다홍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오로지 그녀를 따라 그는 이제껏 헤맸고 끝내 이 장소에 도달했다.


 그렇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그가 살던 티르 코네일로부터 소녀를 호명해 앗아간 여신에게 반드시 해야만 할 질문이 남자에겐 있었다.


 "마리는,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여신은 쓸쓸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긴 세월 동안 자라 성인이 된 남자가, 여신의 눈엔 여전히 티르 코네일 마을에 있을 때와 같이 상냥하지만 나약하고, 망설이기만 하지만 호기심을 꺾지 않던 그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여신이 대답하지 않자 소년은 재차 그녀에게 물었다.


 "대답해 주세요! 검은 날개의 여신, 호수의 여왕 모리안이여!"
 "……피 냄새가 납니다."


 모리안은 소년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었는지, 의도되지 않은 행동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마치 미리 짜인 이야기를 그대로 읊는 듯 여신의 목소리는 별 감정이 묻어나지 않고 차분했다. 때문에 소년은, 자신이 실은 정교하게 잘 짜인 인형을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고 의심하면서도 구태여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며 머뭇대고만 있었다. 여신은 소년의 그런 습관을 기억해냈다.


 "여전히 그 변경 마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군요, 당신은."
 "……."
 "황금빛 갑주로 두껍게 몸을 두르고, 은빛 롱소드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피를 묻혀 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당신 그 아콰마린을 닮은 눈동자는 망설이고, 두려움에 차 있군요."


 그럼에도, 하면서 여신은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여기까지,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잘 찾아와 주었군요. 호명한 이들 가운데서도 이 장소까지 이르는 자들은 그리 흔치 않답니다."
 "마리, 그 얘도 여기에 왔나요?"


 사트라는 다시 한 번 화제를 바꾸어 보려 애썼다. 여신의 표정에 다시 짙은 그늘이 내렸다. 그의 앞에서 더 이상 답을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소년은 여전히 자기 무기를 빼어든 채다. 그가 무기를 구태여 쓰지 않는 건 오직, 제 앞에 있는 여신에 대해 남아 있는 일말의 외경심 탓이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잘 된 게 아닌가? 그 실낱같은 희망, 솜털같이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는 외경심만 불어 없앤다면 그는 얼마든지 여신 자신을 위해 그 검을 쓸 테니.


 생각 끝에 여신은 소년이 원하던 답을 입 밖에 내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당신이 지금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도달했었죠."
 "그럼 마리는 지금 대체 어디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신은 그의 말을 제지하듯 끊고 나섰다. 말이 사라진 빈 공간을 한동안 침묵이 대신 채웠다. 여신은 말 꺼내길 망설이면서 동시에 소년이 안달하길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듯했다. 소년이 뭔가 입을 열기 전, 여신은 먼저 앞서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온 걸까요? 단순히 소명 때문에? 소명을 마쳤을 때 주어질 보상 때문에? 그들이 찾던 건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 모두가 낙원을 찾아 여기에 왔고, 낙원을 찾아 여기를 떠난 거예요."
 "대체 그 낙원이란 뭐죠?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기에 그렇게까지 사람들을 안달하게 하는 거죠?"
 "당신이라면 그렇게 물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호기심 엿보이는,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여신은 말을 이었다.


 "바로 그 호기심, 어린애와 같은 충동으로, 당신은 여기까지 찾아온 거겠죠."
 
 



 "누구나 낙원을 꿈꾸지만, 낙원은 누구에게나 접근을 허락하진 않지요."


 여신이 하는 이야기는 어느새 낙원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트라는 여신에게서 마리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데 안달하면서도, 또 여신이 이야기하는 낙원에 대해 잠자코 들었다. 어쩌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옛날 아란웬이 자신에게 서큐버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소년은 여전히 낯선 이야기에 망설이고,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차 여신에게 귀를 기울였다.


 "오로지 열쇠가 되는 소수 사람만이 낙원 문을 열고 모두를 그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습니다. 시련과 한계를 극복하고 이 자리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을 자격이 있는 자만이, 자기 사람들을 낙원까지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찾는 낙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여신의 갑작스런 선언에 사트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불명료한 여신의 말 가운데서 어렴풋이 자신에게 불길한 전조를 느낀 탓일까.


 그 예감을 확인시켜주듯 여신은 소년에게 조금 전보다 더 의미가 분명한 말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그녀를 찾으려 한다면, 저 바다 너머에 도달해야만 하겠죠. 죽은 영웅들만이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바로 그 성역 말예요. 위대한 영혼들과, 잊히고 사라진 옛 신들이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영원의 장소에 그녀는 도달했답니다."
 "마리는, 그럼……."
 "살아있는 몸으로 죽은 자들의 땅에 발을 디딜 수는 없겠죠."


 그 간접적인 확인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신이 하는 말을 듣고 소년은 좌절했다.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그녀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겐 더이상 이 세상 어느 곳도 낙원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여기서 숨을 거둔다면 또 모를까!


 "어째서 마리는 여기로 온 거죠? 여기에 오지만 않았어도, 그 애는……."
 "당신도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탄식하는 그에게 여신이 말했다.


 "어쩌다 한 발 내딛었을 뿐인데,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까지 떠밀려간 적이 있지 않던가요? 조금 남들보다 뛰어났을 뿐인데, 모든 이의 기대와 염원을 한 몸에 떠안고 영웅이 되어버린 적은 없었던가요? 비록 당신은 스스로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바란 모습대로 성장해 여기 왔습니다. 그들의 마음, 그들의 욕망이 당신을 여기까지 이르게 만든 원동력이었죠. 그와 같은 일이, 소녀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던 것뿐이랍니다. 단지 그것뿐이죠."
 "하지만 저는,"


 사트라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 여신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온전히 이해했다. 자신은 부름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부름을 받고, 그 요구에 응답하듯 온 몸으로 부딪쳐 여기까지 당도한 그녀와 자신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여신도, 사트라 자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호명 받지 않고 여기에 왔습니다. 자, 이야기해 보세요. 채 성장하지 못한 기사여. 그녀 같은 영광을 두르지 못한 당신이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녀와 그 두 사람, 루에리와 타르라크는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섰지요. 당신은 어떤가요? 수많은 사람들에 기대며,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욕망에 그저 떠밀릴 뿐으로 겨우 여기 이른 당신이 그들이 이른 곳에 당도할 수 있을 거라고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바로 그 말을 듣고서야 소년은, 여기 당도하기까지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았던 자신의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여기까지 이르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는지를."


 여신이 하는 말을 사트라는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녀 말 대로였다. 시에라나 클라이드가 그랬듯, 아란웬 선생님이 그러했듯, 또 티르 코네일의 수많은 이들이 소년 곁에 있었고 그를 올바른 길로 안내해 주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신뢰해 주었기에 자신은, 언젠가 목적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낙관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지요. 인간의 몸으로,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의 운명에 도전하려 했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첫째로 스스로 영웅이 아니라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둘째로 영웅의 운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난 소녀의 여정을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그녀를 쫓아, 운명으로부터 되돌려 받길 바랐겠죠."


 결국 당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사트라를 향해 여신은 그렇게 선언했다. 겨울 냉기처럼 잔혹하게 얼어붙은 말로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을 공격했다.


 "그건 어느 정도 당신의 나약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당신은 타인에게 너무 의지했고, 타인의 바람과 기대대로 성장했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던 보석은 손에 얻을 수 없었던 거예요. 바로 그 나약함이야말로 당신의 낙관, 그것의 원천이겠죠."


 결정적인 순간 얼마나 수없이 망설이고 방황했던가.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는 자신을 올곧은 길을 향해 인도해 주었던가.


 여신의 말에 사트라는 새삼 뒤에 두고 온 그들 모습을 떠올렸다. 바로 이 순간 그들이 곁에 있었더라면! 그러나 운명의 순간, 정작 여신 앞에 도달한 것은 사트라, 그 혼자뿐이었다.


 "이제 그대에게 묻습니다, 어린 기사여. 당신에게 염원을 실어주던 사람들이 사라진 지금도, 그대는 이 앞으로 계속해 나아갈 참입니까? 여전히 당신이 그 무거운 검과 갑주를 짊어진 채 상대하기에 벅찬 운명에 대항할 이유가 어디 하나 남아 있기라도 한 건가요?"


 여신의 말에 소년을 완전히 발가벗겨지기라도 한 듯 부끄러웠고 불안해졌다. 의지할 수 있는 건 남아있지 않다. 경외하는 여신, 아니 그녀가 대변하는 운명 앞에서 정작 그가 이뤄야 할 목적은 어느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숱한 전투를 치렀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왔다. 누군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러했고, 또 다른 누군가를 고통 속에서 구해내기 위해 그러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어느 누구도 여신을 대적하라고 부탁한 사람은 없었고, 어느 누구도 여신 탓에 고통 받는다고 이야기한 적 없었다. 지금 자신은 실은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일에 온몸을 내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구심 속에서 방황하던 사트라의 머릿속에, 별안간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보석이 겉으로 드러나 빛을 발하듯, 그 생각은 방황하는 사트라 머릿속에서 다홍빛 선명한 빛을 내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금껏 자신이 찾아 헤매던 진짜 목적이었다고 사트라는 생각했다.


 "당신이 한 말은 사실이 아녜요."


 여신을 향해 그가 말했다. 빛을 잃었던 그의 갑주가 다시 황금빛 본래 색을 되찾아 덜컹대고, 검은 다시 때를 벗어 던지고 예리함을 드러냈다. 여신이 보는 앞에서 다시 소년은 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분명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무언가를 했던 적이 없진 않았겠죠. 하지만 이 여정은, 단지 사람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시작한 게 아녜요. 타인이 원하는 대로 성장했다고, 여신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전 누구의 염원 때문에 여기 온 것도 아니고, 여기 오기까지 누군가의 염원을 일부러 구하려고 했던 적도 없어요. 단 한 사람, 마리가 아니었다면 전 구태여 여기까지 오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게 당신의 답인가요?"


 여신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 빈 공간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욕망, 그것 때문에 당신은 모든 위협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어린 소녀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은 스스로 한계 위에 올라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 그 자체가 되었다고 말하려는 건가요? 당신에겐, 욕망이라기 보단 충동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죠. 당신의 그 맹목적인 추종 탓에 스스로 얼마나 많은 위기를 헤쳐 와야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예요."


 하지만 결국 그 충동이 인류를 구원하겠죠. 여신은 일부러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도리어 여신은 소년을 더 몰아붙이며 두 팔과 양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렇다면 이제 어쩔 거죠? 당신의 마리는 여기에 없어요. 당신은 여기서 그 충동을 꺾고 자신의 세상으로 되돌아갈 참인가요? 아니면, 한 번 더 그 충동을 되살려 이 너머로 나아갈 생각인가요?"
 "이 너머라고요? 하지만 여긴 아무것도,"


 열주로 둘러싸인 공간을 둘러보며 사트라는 어리둥절해했다. 그가 여신과 대면하는 원형 공간 주위는 빠짐없이 열주로 둘러져 있었다. 열주 너머는 어둠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세계의 끝이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그 너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신은 거듭해 '이 너머'를 이야기했다.


 "여기는 인간의 욕망이 와 닿을 수 있는 최종점. 충동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장소는 이 너머에 있습니다. 땅이 끝나는 곳에서 인간의 욕망도 끝이 나지만, 충동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바다 저 편 영원의 땅까지 이를 수 있어요."
 "그 말은 혹시, 마리를 만날 수도 있단 얘긴가요? 어떻게 하면 되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에요. 마리, 그 애를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괜찮나요?"


 여신은 소년에게 질문했다.


 "한 번 거기 도달하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어요. 그래도 당신은, 충동이 향하는 대로 몸을 맡길 생각인가요? 소녀 하나를 위해 당신은, 이 세상 전부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나요?"
 "그 옛날, 티르 코네일을 떠나면서부터 단 한 시도, 마리 그 애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사트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여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빨랐다. 마리에 대해서라면, 자신은 그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던 걸까.


 "그러니까, 설령 세상 전부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마리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습니다. 방법을 일러 드리죠."


 여신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밟고 소년의 앞에 섰다. 땅을 딛고 선 채 바라본 그는 소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인간은 빨리 자란다. 언제까지나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인 자신은, 역시나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신은 느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여신의 말에 사트라는 귀를 기울였다. 정적이 그들 사이를 잠시 동안 흘렀다.


 "저도, 이 세상에서 구원해 주세요."
 "저기, 그게 무슨 소리죠? 구원해 달라뇨."


 갑작스런 여신의 말에 소년은 당황해했다. 여신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하게 그에게 말했다.


 "이 욕망의 땅에서, 저는 너무 오래 머물렀죠. 어느 샌가 제 자신이 바다 저 쪽에서 온 건지, 원래부터 이쪽에 있었던 건지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완성된 모습으로 처음부터 태어난 저는,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지나치게 많은 진실을 넘치도록 보아 왔어요."
 "하지만 전, 제가 여신님을 구원하는 게 가능할지는,"
 "아뇨, 당신이라면 가능해요."


 여신은 조금도 변함없는 어조로 소년에게 말했다.


 "오로지 충동에 의해서만 여기까지 당도한 당신이라면, 분명 그 칼로 제게 죽음을 안겨줄 수 있을 거예요. 여신살해란 금기를 깨는 것, 충동으로 저 쪽 세계에 당도하는 방법은 단지 그것뿐입니다."
 "저는,"


 사트라는 다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여신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여신을, 호수의 여왕을 자기 손으로 죽인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여신은 태연히 행하라고 시켰다. 사트라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기다림에 지친 여신이 소년을 비난했다.


 "이 세상 전부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 거 아니었나요? 그 소녀, 마리에 대한 당신 마음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건가요?"
 "하지만, 저는……. 그치만,"
 "약한 소리는 약함의 씨앗 이랬죠."


 스승의 말을 되풀이하는 여신을, 사트라는 고개를 들어 응시했다. 여신은 이미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부르듯 소년을 불렀다.


 "당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 주세요. 그녀는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은……."
 "걱정할 건 없어요."


 불안해하는 소년을 달래며 여신은 한 가지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여신은 죽지 않아요.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죠. 제게 불가능한 건 오로지, 스스로를 살해하는 충동을 갖는 것뿐이랍니다."
 "누군가 자신을 죽여주기만 바라면서 말인가요?"
 "자살하는 욕망뿐이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요. 여긴, 욕망이 끝나는 장소니까요."


 여신이 하는 말에 사트라는 마음을 다잡은 듯 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여신은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를 받아들이듯 서 있었다. 이윽고 소년은 검을 들어 여신을 향해 내리쳤다. 하얀 드레스가 붉은 피로 물들고, 검은 날개는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지면에 힘없이 누웠다. 살해한 여신의 붉은 피가 은빛 수려한 칼날을 타고 흘러 그 끝에서 이슬처럼 방울 맺혀 바닥에 파문을 만들어냈다.
 

 

 

 검은 날개 여신의 세계는 그렇게 파멸을 맞았다.
 

==================================

 

 최근엔 좀처럼 접속 못하는 분 글을 빌려 봅니다. 묘사를 굉장히 신경써서 하시는 분이었는데, 어설프게 따라하려니 어렵네요;;


 마비노기 세계관을 빌린 팬픽류 글이었던 거 같지만, 마비노기 해본 적이 없어서 억지스럽게 엮은 세계관에 넣어 봅니다.


 주말에 시간이 어찌될지 몰라서 일단 올려보지만...어쩌면 중간에 수정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암튼 결론은 이번 미션 어렵다는 거 ㅠㅠ 

?
  • profile
    XatraLeithian 2011.08.23 08:39

    안녕하세요 윤주님- 소설 잘보았습니다. 음 대략 소감은...음 감회가 새롭다 라는 느낌? 정도가 들었습니다. 일단 제 소설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상태인데, 윤주님의 글을 보니까 "아하 이런 결말도 괜찮겠구나" 라는 느낌도 들었어요. 무엇보다 모리안이 사트라의 여행의 목적이나 그리고 과정에 대해 얘기하는 내용이 꽤 인상 깊었넨요. 남에게 의지하면서 조금씩 성장해온 자....딱 사트라를 의미하네요.

    아까전 제 소설에도 올렸지만 저의 미숙한 소설의 팬픽을 올려주신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주님. 앞으로 건필할것을 약속합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1.08.23 08:49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실은 허락 받고 썼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네요;;

     

     개인적으론 캐릭터 성격은 살리면서 사트라님이 쓰지 않으실 법한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좀 암울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남은 글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사트라님께서 생각하시는 결말이 어떤 걸지 궁금하네요^^;

  • profile
    시우처럼 2011.08.24 06:21

    충동과 욕망...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욕망이란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라면

    충동이란 것은 지금 이순간에 일어나는 날 것 그 자체인 걸까요?

    현재에 사느냐, 미래에 사느냐... 무엇이 더 탁월한 인생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8.24 06:39

     음...저도 이 둘이 확실히 정리된 건 아니라서 뭐라 말씀은 못 드리겠는데,

     비평하기 전엔 다시 정리해봐야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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