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5 00:46

[단편]포틀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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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서기관은 한마디로 감상을 표했다.


 "엉망진창이로군요."

 "활기찬 거지. 건강한 모습이기도 하고 말일세."


 서기 곁에서 조금 앞서 걷던 왕이 대꾸했다. 이 젊은 국왕에겐 언제나 무인다운 호기와 혈기가 넘쳐 흘렀다. 하기야 그런 사람이기에 성격 거친 개척민들과 야만인들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왕과 서기관이 순회하는 곳은 성문 밖 야만인 거리였다.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시끌벅적하고 생기가 흘렀다. 집집마다 남녀노소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고, 아이들은 강아지와 다른 어린 짐승들과 한데 뒤섞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거리 바로 옆에서 건장한 야만인 청년들이 돼지를 잡고 있었다. 어찌나 큰 녀석인지 청년 예닐곱이 달려 들어도 몸부림치는 것을 제대로 붙들 수가 없었다. 다른 청년들이 끙끙대며 그 육중한 몸집을 뒤집어 땅바닥에 눌러붙이는 사이, 한 청년이 날카로운 칼로 멱을 따 버렸다. 꾸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돼지 목에서 뿜어져나온 피가 길 한가운데까지 뿜어져나왔다. 서기관은 질겁하여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생고기 비린내는 야만인 거리 사방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른 편에선 좌판을 내어 옷감과 장신구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사양도 보답도 없이 무상으로 그것들을 한아름씩 안고 갔다. 좌판 곁에 선 남자는 내어놓은 물건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물건을 내어놓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 걸인이 남자가 신고 있던 화려한 샌들을 가리켰다. 샌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하고 예술적인 걸작 수공예품이었다. 남자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그것을 벗어 걸인에게 내어 주었다. 걸인은 감사를 표하지도 않고 그 샌들을 든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믿지 못할 광경에 서기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면 젊은 왕 태도는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왕은 진정으로 이 모든 혼란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그 혼란을 주모하는 야만인들과 같은 인종이 된 것처럼 말이다.


 "추장!"


 야만인 중 누군가 왕을 불러세웠다. 서기관은 재빨리 왕이 시선을 향하는 방향을 보았다. 낯익은 야만인 청년 하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기 앞에 숫돌과 칼을 내려놓고 청년은 왕에게 말했다.


 "추장! 보고 있어? 포틀래치야! 4년만의 축제라고!"

 "물론이지. 큰 축제가 되겠군."


 허물없이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서기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기관과 같은 개척민들에겐 왕인 그가 야만인들에겐 추장이었다. 왕은 존경받고 만인 위에 군림하지만, 추장은 높고 낮음 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지혜와 결단력을 요구받았다. 그들의 신생 왕국은 이렇듯 국왕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원 체계로 운용되고 있었다. 왕국에 충성 서약하지 않은 야만인들은 시민이라기보단 용병, 혹은 왕의 사병에 더 가까웠다. 어느날 갑자기 왕이 없어진다면, 저 야만인들 역시 충성을 거두고 뿔뿔히 흩어져 버릴 것이다.


 "어째서 저들에게 신하로서 복속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겁니까?"


 청년과 헤어져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서기관은 왕에게 충심어린 불만을 내비쳤다.


 "저들도 우리 국민이라면, 마땅히 국왕 앞에서 갖춰야 할 예의와 법도란 걸 지켜야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이 강한 민족일세. 나름의 질서와 법도가 있어. 만약 그들에게 오랫동안 내려오던 전통을 버리고 우리 법도를 내세우고 강요한다면, 우린 결코 그들 마음을 얻지 못할 걸세."

 "예의와 법도란 태도이자 습관입니다. 우리와 다른 태도을 하고 다른 습관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우리와 같이 행동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믿게, 서기관. 그들은 군대같이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없네. 그들은 오로지 그들 방식대로만 우리들을 도울 수 있는 걸세."


 왕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서기관은 더이상 이야기를 길게 늘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저 야만인들에 대해 잘 아는 개척민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 젊은 국왕일 것이다. 비록 피부색도, 출신도 다르지만 이 왕에겐 야만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패왕!"


 또다른 누군가 이 젊은 국왕의 공식 호칭을 외쳤다. 왕이나 서기관과 같은 개척민 출신 병사 하나가 전갈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패왕,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북방 '계승왕'이 보냈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안 그런가?"


 젊은 국왕은 나지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이 나라 운명이 여기서 결정될 걸세."

 "아닙니다. 전 대륙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될 테지요."


 왕이 내뱉은 말을 서기관은 구태여 바르게 고쳤다.






 요새에는 알현실이 따로 없었다. 본래 접견실로 쓰였던 방은 회의실이 되어, 사신을 맞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거듭 세 차례나 장소를 옮겨 마지막으로 사신이 안내받은 곳은 바로 패왕의 집무실이었다.

 때문에 패왕이 들어섰을 때, 그를 맞은 사신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북방 왕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보다, 요새에 당도해 이 방까지 이르는 길이 더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일국 사신에게 이 쪽이 폐를 끼친 것 같소. 사과하리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왕은 사신과 마주앉았다. 서기관은 바로 그 뒤에 그림자처럼 섰다. 왕과 사신 사이엔 기껏해야 팔 하나 쭉 뻗으면 닿을 정도 거리를 둔 채였다.


 "그러면 바로 본론을 듣기로 합시다."

 "네, 저희 폐하께선 귀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사신은 서신을 꺼내어 왕에게 건넸다. 패왕은 그 서신을 눈으로 훑곤 뒤에 있는 서기관에게 주었다. 형식적 수사와 외교적 문구들. 서신에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달리 요청이 있다면 얘기해 보시오."


 서기관이 그 난해한 궁정체 서신을 독해하는 동안, 왕은 사신에게 물었다.


 "저희 왕께서는 패왕께서 친히 방문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뭐라 대답하기 전, 서기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서로간 입장을 조율한 후에 가능할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가 이렇게 온 겁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서기관은 마른 입에 침을 내어 삼켰다.


 "패왕께서도 저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해 주시지요."

 "우호 친선을 다지기 위한 사절단 말이지요?"


 서기관이 묻자 사신은 그렇다고 답했다.


 "양국이 동등한 지위에서 우호를 갖고자 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사절을 파견하고, 다른 쪽이 그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사려되오니,"

 "말뜻은 잘 알겠소. 돌아가시는 길에 동행할 사절단을 준비할테니, 그때까지 불편하겠지만 저희가 마련한 숙소에서 쉬도록 하시오."


 사신이 안내를 받아 물러난 뒤, 패왕은 깊게 한숨을 들이쉬며 의자 등받이에 온 몸을 실어 기댔다. 서기관은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러면 되는 건가?"

 "네. 문제 없이 잘 하셨습니다."

 "외교란 번거롭기 그지없군."

 "하지만 그 외교가 패왕께서 이만한 업적을 세우시는 데 적지않은 공헌을 했단 것은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물론 알고 있지."


 서기관이 한 말에 패왕은 미소를 지었다. 본래 개척민이고 평민 출신인 패왕은 정치나 외교 따위엔 서툴렀다. 신생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건 자연 서기관을 비롯한 패왕 아래 신료들이었다.


 "계승왕은 정략과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구대륙의 간섭이 약해진 틈을 타 북방 제국령을 거의 온전히 흡수해 독립한 건 순전히 계승왕 자신의 수완 덕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 자가 우리와 굳이 친선을 맺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저희가 그와 친선을 맺으려 하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요."


 방금 전까지 사신이 앉았던 자리를 끌어다 놓고 서기관은 거기에 앉았다. 왕과의 거리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


 "이 '신대륙'에서 태어난 국가들은 모두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구대륙으로부터 독립하여 '국민'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사명 말입니다."


 왕은 말이 없었고, 서기관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계승왕이 거의 온전히 제국령을 흡수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친제국파 귀족 세력들이 곳곳에 잔존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서부 구 귀족령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건가?"

 "그보단 명분이 없다, 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방식은 달라도 어쨌건 구대륙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탄생한 국가니 말입니다."


 우선순위가 다르다. 서기관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신대륙 국민들은 이웃 국가를 침략하는 것보다 자국내 구세계의 귀족들을 내쫓는 걸 더 지지할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구 귀족 세력이 완전히 신대륙에서 물러난 것도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저 요새섬은 여전히 귀족 세력들이 장악하면서 신대륙의 관문을 자처하고 있죠. 그들이 구대륙과 유대하며 갖춘 해상 전력은 우리가 무시할 만큼 만만한 게 아닙니다."


 설령 그 모든 구세력을 쫓아낸다고 해도, 그때부터가 본무대일지도 모른다. 서기관은 그 말까지는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드러날 일이다. 북방 '계승왕' 또한 지금은 뜻을 같이할 동료인지 몰라도,언젠가는 충돌할 잠재적인 적임엔 틀림없다.


 "패왕."


 생각을 마친 서기관은 왕에게 간언했다.


 "그러므로 패왕께서는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패왕께선 이 나라의 기둥이십니다. 패왕께서 계시지 않으면 이 나라는 조금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여전히 제도는 미비했고 관료는 부족했다. 지원병은 많았지만 장비는 제각각이었고 이들을 통솔할 장수들은 충분치 않았다. 그나마 대다수가 각지에서 여전히 저항중인 구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저 야만인들! 그들은 협조적이지만 개척민들과 쉽게 섞여들지 못하고 자신들 고유 생활을 지켜갔다. 패왕의 나라는 겉보기엔 번드르르하지만 실은 저 요새 밖 야만인들 축제만큼이나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이 엉망진창인 나라가 간신히 지탱되는 건 이 나라 모든 이들이 패왕 한 사람에게 주목하고 기대를 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역사상 어느 나라도 단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짊어지게 하고서 번영했던 사례는 없었다. 서기관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왕이 필요없는 나라, 왕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바르게 돌아가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눈 앞에 있는 이 왕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서기관의 호소에 패왕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일견 감동받은 것 같기도 하고, 눈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혹은 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서기관의 말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것이 자기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라는 양.






 북방 사신에게 조촐한 환영식을 벌일 때만 해도 요새 밖 야만인 거리는 낮처럼 환하고 시끌벅적했다. 야만인들이 사방에 걸어놓은 횃불은, 질 나쁜 천과 기름을 태우며 시커먼 연기를 내었다. 요새 창으로 내다본 그들 마을은 마치 큰 불에 완전히 삼켜진 것처럼 보였다. 패왕도 그것을 걱정했는지, 요새 경비 일부를 풀어 수시로 야만인 거리를 순시하며 살피게 했다. 화재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게나 소란스럽던 야만인 거리도 어느 순간부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거리에 모든 횃불이 사라졌고,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도 멎었다. 거리를 돌아본 경비병들은 거리엔 이미 불빛도 인기척도 없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고 보고했다. 왕이 침소에 들었기에, 대신 보고를 받은 서기관은 경비병들에게 순시 임무를 해제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 날 밤, 소동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소란스러워져 서기관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집무실 문을 두드려 서기관을 부른 병사는 상황을 짤막하게 보고했다.


 "습격입니다! 요새 안에 정체 모를 자들이 침입해 왔습니다!"

 "경비는!"


 위기 상황임을 직감한 서기관은 칼을 빼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는 그에게 보고를 계속했다.


 "현재 적을 격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성 밖 부대에게는 전갈을 보냈나?"


 요새 안을 경비하는 부대 외에도, 서기관은 요새 밖에 한 부대를 더 주둔시켜두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 조치였는데, 실제로 필요하게 될 줄은 그도 생각지 못했다.


 "이미 보냈습니다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주둔중인 부대는 요새와 지척에 있었다. 아무런 소식이 없단 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서기관은 곧장 침소에 있는 왕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폐하는?"

 "침소 쪽으로 병사들을 더 보냈습니다."

 "나도 그쪽으로 가겠다. 서둘러라!"


 서기관은 병사를 데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왕의 침소로 향하는 도중에도, 아직 상황을 전달받지 못한 병사들이 평소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기관은 그 병사들까지 모조리 끌고 갔다.


 침입자들이 지나간 곳엔 어김없이 시체들이 있었다. 널부러져 있는 것은 모두 성을 지키던 병사들뿐이었다. 침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한 흔적은 없었다. 서기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침입자들의 경로는 곧장 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체들 너머엔 왕의 침소가 있었다.


 '암살인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에 서기관은 절망했다. 암살자를 보낸 건 과연 누구일까? 귀족들일 수도 있고, 저 요새섬의 주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계승왕'이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건 간에 암살을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게 분명하다. 암살자는 이 요새 구조를 잘 알고 있었고,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통자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누굴까? 각료들 중 하나일까? 마구잡이로 뽑아들인 의용병 중 섞여든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쉴새없이 머릿속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서기관은 쉬지 않고 왕의 침소까지 달렸다.


 침소 앞에 도착한 서기관은 아연실색했다. 평소라면 잠겨 있을 침소 문이 환히 열려 있었다.


 "패왕!"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서기관은 병사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


 상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긴 창을 가지고 있었다.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그가 든 창자루 가득 새겨져 있었다. 서기관은 그 창을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너무도 잘 알았다. 패왕과 함께 했던 전장마다 그 창은 눈에 띄었다. 언제나 그것은 불리한 상황을 뒤집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왔다. 그것은 늘 왕 곁에서 빛나고, 왕의 적들을 향해 내던져졌다. 그것은 바람을 가르며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숱한 왕의 적들을 꿰뚫어왔다.


 바로 그 창이, 지금은 패왕을 향해 날을 겨누고 있었다. 창을 든 상대, 야만인들의 '무사'는 서기관과 병사들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무사는 그날 낮, 야만인 거리를 순회하던 왕과 서기관에게 말을 건넸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이게, 이게 다 무슨!"


 서기관이 노기띤 얼굴로 무사를 나무라려는 순간, 그를 뒤따르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 서기관과 병사들은 등 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방 안에 숨어 있던 다른 야만인들이 나타나 그들에게 창을 겨눴다. 하나같이 기이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창자루를 꼭 쥔 채였다.


 서기관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야만인들이 배신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 저 무사가 왕에게 창을 겨누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건, 어째서 왕이 이 야만인들을 말리지 않는지, 왜 왕이 병사들에게 패왕 자신을 호위하라고 명하지 않는지 하는 것이었다.


 무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왕에게 서기관은 외쳤다.


 "어째서 아무 명령을 하지 않는 겁니까! 왜 아무 말도 없으신 거냔 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게, 서기관."

 "내리실 명령은 그게 아니겠죠!"

 "내려놓게, 서기관. 잘못 명령한 게 아니야."


 왕은 침착하고 차분해 보였다. 예복 차림을 하고서, 왕은 제 곁에 관을 내려두었다.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 앞 상대와 싸울 의지를 잃어갔다.


 오로지 서기관 혼자 눈 앞에 벌어진 상황에 저항하고 있었다.


 "어림없습니다. 배신자들 앞에서 무기를 내려놓으라니요!"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닐세, 서기관."

 "배신자가 아니라고요? 이 상황을 보십시오! 명백한 반란이 아닙니까!"

 "포틀래치일세, 서기관."


 개척민들에겐 낯선 언어를, 패왕은 강조하듯 다시 한 번 반복했다.


 "포틀래치란 말일세."






 "왕이 되기 전, 나는 이들과 한 가지 약속을 했네."


 병사들과 야만인들이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패왕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건국 전 이야기로, 서기관에겐 생소한 내용이었다.


 "이들의 힘을 빌려 구대륙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겠다고, 새로운 국가를 세워 개척민들과 원주민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일세. 이들은 모두 내 뜻을 따르기로 했네. 나를 위해 싸우고, 나를 위해 죽기로 했단 말이네. 그들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내게 넘겨 준 거야.

 권력은 책임이 따르는 법이네. 나는 이들의 권력을 넘겨받는 대신, 이들 풍습을 따르기로 했지. 포틀래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풍습이야. 이 하룻밤 사이에 이들은 지난 4년간 축적한 부를 나누고 권력을 나누네. 농민은 곡간을 풀고, 도둑은 훔친 물건을 내어 놓아. 추장부터 거지까지 모두가 모든 걸 소모해 버려. 하룻밤 사이에 모두가 평등해지는 걸세. 그리고 다음 4년간을 오로지 이 축제를 위해 살지.

 나는 그들에게 생사 여탈권을 넘겨 받았네. 대륙 절반을 평정하면서 실제로 많은 이들이 눈 앞에서 죽어 사라졌지. 바로 내가 내린 지시, 내가 내린 명령 때문에 말일세. 지난 4년 나는 숱하게 그들 목숨을 빌려 써왔네. 이젠 돌려줄 때가 온 거야."

 "그런 감정적인 이유를 내세우지 마시죠!"


 서기관은 흥분해 외쳤다.


 "당신은 그들에게만 책임을 다할 셈입니까? 웃기지 마시죠!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건 그들만이 아닙니다! 이 병사들을 보세요!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당신은 대륙 절반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저들이 바라는 국가를 보여줘야 할 게 아닙니까?"

 "나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닐세. 지난 4년여간 쉴새없이 달려온 것도, 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단 말이네."

 "그렇다면 아시겠죠? 패왕께서 사라지시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말입니다. 이 나라는, 당신 하나로 인해 간신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어지면 다들 뿔뿔히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요!"

 "정말 그런가?"


 패왕이 반문을 던졌을 때, 서기관은 그가 가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댔다. 패왕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그동안 힘써 만든 나라는, 나 하나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체제였나?"

 "그것은,"

 "4년여간 나는 군대를 이끌고 여러 전쟁에서 싸워왔네. 싸워왔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저 거기 있었을 뿐이야. 병사들을 격려해 나아가게 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어. 그동안 전략을 짜고,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병사를 새로 뽑았던 건 누구였는가? 관료를 선출하고, 제도를 정비하고, 외교 문서를 처리한 건 누구였는가? 모두 그대를 비롯한 관료들이 아닌가?"

 "패왕!"

 "나는 우연히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 자리를 지켜왔을 뿐일세. 기대를 짊어졌을 뿐이고, 실패를 대신 책임져왔을 뿐이네. 단지 그뿐인데도 그대들은 나를 이렇게까지 의지하고 훌륭히 따라와 주었네. 그대들이라면 왕좌에 내가 아니라 설령 나무조각이 놓여 있었어도 충분했을 걸세. 아니, 오히려 더 잘 했을 지도 모르지."

 "설령 그렇다더라도,"


 이제 서기관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왕이 결심한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이런 불합리한 일을 어떻게..."

 "그 '불합리한 일'을 일컬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네. 온전히 내가 받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그것 말일세."


 곧바로 서기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의를 잃은 병사들도 무기를 떨어뜨리고 숨죽여 흐느꼈다. 그 자리에서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한 건 오로지 패왕 하나뿐인 듯했다.


 "오랜 시간 수고 많았네, 내 벗이여."

 "...그대가 진심으로 우리와 함께 했던 것을 잊지 않겠네."


 무사는 창자루를 단단히 붙잡았다. 패왕은 눈을 감았다. 병사들은 흐느껴 울었다. 원주민들은 애도했다. 서기관은 끝내 왕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패왕의 나라엔 다시 왕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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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욀슨 2012.10.05 09:23

    잘 읽었습니다. 제게는 다소 와 닿지 않는 정서가 많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군요. 왕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조금만 더 보충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작품 내의 이런저런 키워드나 제목 '포틀래치'를 보면 모티프는 현실의 신대륙에서 참고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0.07 19:26
    포틀래치 축제가 모티프가 됐는데, 구상할 때랑 쓸 때는 또 다르더군요;;;
    이건 좀 더 나중에 써야했을 글인지도요;
  • profile
    yarsas 2012.10.05 18:30
    욀슨 님이 제가 할 말을 다하셨군요. 잘 읽고 추천 누르고 갑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2.10.07 19:27
    지적받을 만한 부분은 정해져 있는 모양이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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