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29 19:24

신들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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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히 가세요.”

철물집 민철은 점심 먹으러 가기 전 마지막 손님을 보낸 참이었다. 그는 재빨리 꺼내 놓았던 책들을 넣어 놓았다. 이 거리는 대부분 인쇄소니 철공소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책을 몰래 파는 곳이라 거의 비슷한 식이었다. 숨어서 판다니 참 웃긴 일이었지만 그 때 이후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궤짝을 밀어 책들을 감춰놓기 전에, 그 냄새를 듬뿍 들이켰다. 새 책 냄새. 이 냄새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도 이 짓을 하고 있었다. 민철은 걸린 표지판을 ‘식사 중’으로 바꿔 놓고, 먼지 쌓인 선반 사이를 헤치고 거리로 나섰다. 키 작은 건물들의 숲 사이로, 비좁은 골목이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민철의 옆으로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아스팔트 위의 더러운 웅덩이에 파문을 만들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민철은 걷다가 건너편에서 인쇄소 최 사장을 보고 인사했다. 최 사장 역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의 뒤에서 직원 세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어때요.” 민철이 말했다.

“대놓고 장사하는 게 아닌데 사람이 올 리가 없지.”

사실 그랬다. 사실 따지자면 책-정확히는 오딘 클럽의 마크가 찍혀 있지 않은-은 이제 그 옛날에 훔친 귀금속이나 무기가 받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모든 책이 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오딘 클럽. 약 5년 전에 ‘모든 책은 오딘 클럽의 승인 아래서만 거래가 가능하다’는 웃기지도 않는 조건을 내세우던,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자들. 누군가가 신고도 넣어 보고, 시위도 해 봤지만 ‘위에서’ 민철과 책 업계의 사람들에게 해준 것은 거의 없었다. 가게를 사들이거나-대형 서점에도, 작은 서점에도 본래의 간판이나 상호의 구석에 그 끔찍한 눈과 창 마크가 새겨졌다-팔지 않는다면 사병을 내세워서 찍어 누르거나. 이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 아니면 직장을 잃었다. 얼마나 돈을 찔러줬을지는 몰라도, 역시나 위에서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물론 오딘 클럽에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신화방직자의 날’. 그 날을 기점으로 상황은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책에서 신화 속의 괴물들과 무기들을 불러내는, 신화방직자(미스 위버)라는 능력자들의 등장. 오딘 클럽은 자신들이 통제하고 관리하던 책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수단이 된 것에 크게 동요한 모양이었다. 각지에서 용이나 숲의 거인, 팔이 여러 개 달린 악마 같은 말도 안 되는 것들의 목격사례가 이어졌고, 오딘 클럽의 각 지부가 신화방직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오딘 클럽의 사병들은 신화방직자들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들의 폭정도 완전히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기양양해 하는 것도 잠시였다. 오딘 클럽의 여론조작과, 미스 위버들의 무기가 되는 책의 품귀현상. 게다가 미스 위버 모두가 오딘 클럽에 대항하는 길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괴물과 괴물의 싸움이 이어졌다. 물론 수적으로, 질적으로 이제 게릴라들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결국 주된 조직이었던 ‘로키의 아들들’, ‘손톱의 배’, ‘우트가르트’등은 분열과 외압 끝에 모두 와해되었다. 그렇게 해서 약 5년. 잔당들은 아직도 가망 없는 투쟁을 계속하며 완전히 테러리스트-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로 낙인이 찍혀 공개적으로 쫓기거나, 민철과 같이 마약이라도 파는 것처럼 몰래 책을 팔거나, 책과는 아예 관계가 없는 일을 했다. 그리고 오딘 클럽의 지위는 너무나도 확고한 것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신화방직자들로 이루어진 사병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무력으로만 본다면 오딘 클럽은 하나의 국가에 가까웠다.

다시 돌아가서. 아직도 왜 책장사를 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는 당연히 책이 좋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근 몇 년 간 그는 오딘 클럽의 끄나풀들을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뭘 하느라 그렇게 바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소문은 돌았다. 놈들이 모든 것을 끝낼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이 세상의 모든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궁극의 책을 찾고 있다고. 안 보이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어쩌면...... 언젠가는 책을 대놓고 팔아도 좋은 세상이 올 지도 몰랐다. 거기다 오늘도 세 권이나 팔았다. 날씨도 적당히 햇빛도 비치지 않게 흐린 것이 딱 좋았고, 오늘 점심은 최 사장이 쏠 예정이었다. 상가의 좁은 골목은 점심시간인데도, 그리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민철은 뭘 잘못 먹었는지 이쪽으로 날아오는 비둘기를 피하다가, 멀리서 묘한 것을 하나 봤다. 옆면이 열리도록 개조된 차량, 그러니까 주로 이동도서관이나 이런 곳에 사용하는 차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국립도서관 마크는 없었다. 게다가 주위에는 이 더운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시커먼 양복을 입은 놈들이 유달리 많이 보였다. 그는 불길한 낌새를 느끼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시, 양복들은 민철과 최 사장을 보는 것 같다가, 자기 갈 길을 향했다.

“어디로 갈까. 국수집? 청국장?” 최 사장이 말했다.

“아니, 잠시만요.” 민철이 말했다. 그는 이동도서관 차량을 잠시 봤다. 차는 비어 있었다. 뭐 어때. 놈들이라고 해도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아니, 됐어요. 오늘은 국수로 합시다. 저녁에는 예쁜 아가씨를 만날 건데 온몸에서 발 냄새를 풍겨서야 되겠어요.” 최 사장이 코로 연기를 푹 내뿜으며 피식피식 웃었다. “흐흐흐. 민철이가 여자를 만난다고? 근래 들어본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는 소리구만.” 최 사장네 직원들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었다. 민철은 그들에게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이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그들의 뒤로, 몇 쌍인가의 눈이 뒤따랐다. 전부 선글라스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다.

한 시간쯤 뒤. 상가의 골목에서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 여섯 명이 민철과 최 사장, 그리고 직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날인데도. 선글라스의 알이 워낙에 커서, 이목구비를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민철은 그들을 보고 잠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뭐야, 무슨 일이죠? 세금 떼먹거나 돈 빌린 적은 없었는데. 나는 간첩도 아니고요.” 민철이 말했다. 그의 뒤에서 최 사장과 직원들이 실실거렸다. 하지만 양복들은 모두 장례식장에라도 온 것처럼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오딘 클럽에서 나온 독讀 요원이라고 합니다. 그냥 미스터 독이라고 불러주십쇼. 선생님들께 간단히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이거 말인데-” 그의 뒤에 있던 요원 하나가 들고 있던 자루를 부었다. 아직 조금 젖어 있는 더러운 바닥에 책들이 뒹굴었다. 민철과 최 사장, 그리고 직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선생님들 거 맞죠? ‘로키의 아들’단 행동대장 서민철. ‘우트가르트’의 전 리더 최경식. 오딘 클럽의 허가 없는 책 유통 시 어떻게 되는지 알고는 있겠지요?”

“아, 당연히 알고 있지. 알고 있고말고.” 민철의 등 뒤에서 커다란 덩어리 비슷한 것이 보였다. 구름 사이로 약하게 나온 햇빛이 그것의 몸을 뚫고 비치다가, 이내 그림자를 만들었다. 코끼리만한 늑대가 민철의 등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 요원들과 민철 일행의 사이에 섰다. 놈의 말아올린 입술 덕에 굶주린 이빨과 시뻘건 잇몸이 훤히 드러났고, 침이 바닥에 뚝뚝 흐르며 매운 연기를 피워올렸다. 늑대, 아니 괴물의 눈에서는 시퍼런 안광이 피어오르며 공중에 녹아들었다. 그것이 토하는 더운 숨에 닿지 않도록 요원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오직 독 요원이란 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 사장님, 애들 데리고 일단 여기서 도망쳐요! 사람들 모아서 이쪽으로 좀 보내달라고요. 알았죠?” 민철이 말하자, 최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들과 함께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요원들이 쫓으려 했지만,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자 도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최 사장과 직원들은 처음 온 사람이라면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는 이 상가의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서민철 씨, 아깝군요. 그렇게나 빠른 속도라니, 우리와 함께 일하셨다면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텐데 말이죠. 혼자서 우리 여섯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인데......” 독 요원의 손에 민철이 불러냈던 것과 비슷한, 부정형의 연기가 피어올랐고, 다른 요원들 역시 제각기 등 뒤에 부정형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그건 큰 오산입니다. 아무리 한 때 날리셨던 당신이라고 해도, 제대로 훈련받은 요원들을 당해낼 수는 없어요.”

“그건 싸워 보면 알겠지. 가라!” 늑대가 뛰어올랐다. 그리고 아직 무언가를 ‘불러내지’ 못한 요원 하나가 늑대의 앞발에 맞고 저 앞의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요원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그러던 사이 요원들의 괴물이 완전히 형체를 갖췄다. 인간의 머리가 여러 개 달린 뱀. 얼굴 자체가 없는 날개 달린 짐승. 그리고 독 요원의 오른손에는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랗고 두꺼운 검이 들려 있었다. 투박한 갑옷이 그의 오른팔을 빈틈없이 보호하고 있었다. 다른 두 명도 독 요원과 비슷하게 무기를 들고 있었다. 괴물들과 무기를 든 요원들이 민철과 늑대를 에워쌌다. 민철은 씩 웃더니,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늑대가 점프하는 것과 동시에 괴물들이 제각기 뛰어 오르거나, 밝은 녹색의 점액을 토해냈다.

최 사장과 직원들은 각 가게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최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각자 책을 챙겨서 나왔다. 최 사장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른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최 사장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뒤를 또 수많은 괴물들이 따랐다. 하지만 민철이 있는 골목에 거의 다 와서, 이동도서관 트럭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 몇 명이 치여 길바닥에 뒹굴었다. 괴물들 중 일부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그들의 품에서 떨어진 책이 불타 사라졌다.

“무슨 짓이야! 똑바로 운전 못해, 이 개-” 최 사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트럭의 커버가 벌컥 열리며 괴물들을 거느리거나, 흉흉한 무기를 든 자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양복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오랜만이군, 최 사장.” 그가 말했다.

한편 민철은 고전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쉬었던 탓일까. 지원은 올 생각을 안 했고, 그가 쓰러뜨린 요원은 두 명 뿐이었다. 늑대가 아무리 물어뜯고 아스팔트 보도까지 헤집어 엎어버리는 앞발의 일격을 가해도, 저 얼굴 없는 괴물은 끝없이 재생했다. 게다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살점들이 원본과 똑같지만 크기만 작은 괴물로 변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매 번 요원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 할 때마다 놈이 가로막았다. 늑대의 호흡이 짧았다. 방금 사람 머리를 한 뱀을 쓰러뜨리면서, 뱀이 마지막으로 뿜어낸 유독한 증기를 잔뜩 마신 탓인 것 같았다. 그것 말고도 귀가 찢겨 나가거나, 가죽 여기저기에 큰 상처가 나 있거나, 이빨이 깨져 있는 등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슬슬 끝내도록 할까요. 역시 혼돈을 데리고 온 게 옳았던 모양이군요.” 독 요원이 말했다. 그는 검에 묻어 있는 피를 바닥에 털어냈다. 바닥에 점점이 혈흔이 남았다.

“아니, 난 하나도 안 지쳤는데.” 민철이 말했다.

“흠, 더 싸우는 건 어려워 보이는데요? 역시 전 행동대장 아니랄까봐 허세만 넘치네요.” 독 요원이 칼을 뒤로 치켜들었다.

“도망갈 힘은 남았거든, 멍청아!” 민철이 말했다. 그가 탄 늑대가 벽을 타고 올라 상가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요원들이 그를 쫓았다. 물론 거리 위에서였다. 독 요원만이 혀를 차며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심하게 다치기는 했어도 늑대는 생각보다 빨랐고, 요원들은 민철을 쉽사리 잡질 못했다. 독 요원은 뛰어가며 검을 민철에게 던졌다. 회전하며 날아가던 검은 빌딩의 옥상을 꿰뚫고 꽂혀 있다가, 이내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살짝 스쳤는지 피에 젖은 털이 바닥에 약간 떨어졌다. 그리고 독 요원의 손에 석궁이 나타났다. 그는 건물에서 건물로 점프하며, 민철과 늑대에게 화살을 쏴 제꼈다. 몇 발이 바짝 엎드린 민철의 목잔등 위로 지나갔지만, 맞은 건 하나도 없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독 요원을 제외하고는 전부 뒤에 쳐져버렸을 정도로 둘의 속도는 빨랐다. 밑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이봐요, 비겁하게 도망가지 마세요 좀!” 독 요원이 석궁을 옆으로 던져버리며 말했다. 석궁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에는 나이프 몇 개인가가 들려 있었다.

“여섯 명이서 한 놈 다굴놓는 건 비겁한 게 아니고? 웃기지 마라!” 민철은 그렇게 말하며 방향을 재빨리 틀었다. 늑대의 모습이 골목 아래로 사라졌고, 나이프들이 허망하게 공기만 갈랐다. 독 요원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다시 거대한 검을 쥐고 뛰어내렸다. 그 밑에는......

“맙소사.” 독 요원은 공중에서 급히 낙법을 쳤다. 그리고 바닥에 한 바퀴 구른 다음 착지했다. 민철이 인질을 잡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는 전화를 하고, 누군가는 안절부절 못하며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누군가는 도망을 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꼬마 하나가 단검만한 늑대의 발톱이 목에 갖다 대인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살짝 베였는지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런 게 진짜 비겁한 거지, 요원 양반.”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자, 천천히 품속에서 책을 꺼내서 던져라. 허튼 수작은 용납하지 않겠어.” 독 요원이 망설이자, 민철이 꼬마를 거칠게 흔들었다. 꼬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 꼬마가 죽는 걸 보기 싫다면 말이지.”


“이러니 당신네들이 테러리스트 소리나 듣는 거지요. 하여간......” 독 요원은 품 속에서 문고본 책을 세 권 꺼내 던졌다. 그러자 늑대가 꼬마를 옆으로 밀치고, 앞발을 독 요원에게 내리쳤다. 독 요원은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구나. 기분 나쁜 가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자갈이 무거운 것 밑에서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건 독 요원에게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민철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찌른 사람을 봤다. 그의 양 뺨을 날카로운 말뚝이 관통하고 있었다. 최 사장이었다. 조종자의 집중이 흐트러진 탓에, 늑대의 앞발은 독 요원의 머리 앞 불과 10센티미터 앞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멈춰 있었다. 민철이 입에서 바숴진 허연 것과 피, 살점이 섞인 것을 줄줄 흘리며 천천히 무릎을 꿇는 가운데, 독 요원은 물 흐르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책을 집었다. 그의 오른팔에 다시 대검이 나타났다. 주위 사람들, 민철, 최 사장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독 요원은 높이 뛰어올라, 검을 밑으로 찍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쩍 갈라졌다. 늑대의 턱이 위부터 아래로 거대한 검에 꿰여, 바닥에 붙들려 버렸다. 늑대의 눈에서 검은자위가 천천히 사라졌고, 이내 호흡을 멈췄다. 늑대가 흘린 핏자국까지도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가운데 민철의 품에 있던 책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역시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사...... 이 새......” 민철이 말했다. 다 새는 발음이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눈만 최 사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먹고 살아야지, 민철아. 그리고 방금은 정말 실망했다. 꼬마를 인질로 잡아? 제정신이냐?” 최 사장이 말했다. 그리고 독 요원 쪽을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이 녀석들 장단 맞춰주는 것도 참 힘들었어, 미스터 독.” 독 요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비는 곧 거세졌고, 민철이 흘린 피가 고인 물에 번졌다.

#2

오딘 클럽이 사병을 부리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이름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단지 ‘오딘 클럽의 개’ 면 충분할 뿐이니까. 심지어는 요원들 본인조차도 정식 명칭을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어디까지나 월급쟁이, 나쁘게 말하면 용역 깡패에 가까운 일이니까. 하지만 독 요원은 정확한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에인헤랴르Einherjar. 날개 달린 여신에게 강제로 끌려와서, 외눈의 신을 위해 봉사하는 딱한 전사들. 누가 지은 건지는 몰라도 참 뒤틀린, 하지만 절묘한 작명이었다. 진짜 에인헤랴르들과의 차이라고는 죽은 다음에 끌려오는 건 아니라는 것과, 싸우는 게 거인들이 아니라 게릴라라는 것뿐이었다.

독 요원은 지하 훈련장의 상황실에 앉아 있었다. 상황실의 수많은 모니터에는 각 방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는데, 좀 넓은 스쿼시 코트 같이 생긴 방마다 요원들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서로 치명적인 공격은 피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이곳은 섹터 7, 오딘 클럽 최대의 신화방직자 사병 양성소였다. 게릴라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치는 유명한 요원들 역시 대부분 여기 출신이었고, 독 요원 역시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교관이 되었다.

“A3, 계속 그렇게 미지근하게 싸울 거면 월말보고 때 참 좋은 소리 듣겠네요. 적극적으로 좀 하세요. F7, 잘 했어요. 물론 이제 패턴이 너무 뻔해서 눈 감고도 다음에 뭐 할지 그려지는 것만 빼면요. 좀 배리에이션을 늘리세요. Z4,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독 요원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물론 언급된 사람 중에 표정이 좋을 사람은 있을 리가 없었다.

“고생이 많군.” 독 요원은 뒤를 돌아봤다. 흰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뒤로 넘겨 붙인 머리 때문에 십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보라색 넥타이가 꼭 축 늘어진 혀 같았다. 독 요원은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지부장님. 차 어떠세요? 어차피 인스턴트 커피밖에는 없지만요.”

“에이, 지부장은 무슨. 그냥 평소 부르던 대로 부르게. 어차피 곧 갈 거니까 커피는 필요 없어.” 그러면서도 지부장은 독 요원이 의자를 빼주자 뒤로 푹 눌러앉았다. 의자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독 요원은 빨리도 물을 끓여 그에게 커피를 건넸고, 안 먹는다더니 지부장은 그걸 단숨에 들이키고는 켁켁거렸다.

“그렇군요. 무슨 일이시죠?” 독 요원이 물었다. 그는 말하면서 뒤를 힐끔 봤다. 아까 이름 불린 녀석들은 특히 독이 바짝 오른 게 눈에 보였다. 바라던 대로였다.

“실은 말야......”

회의실은 손만 갖다 대도 베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지부장, 그리고 독 요원은 자리에 앉아, 이 멍청한 회의가 빨리 끝나길 빌고 있었다. 말이 좋아 회의지 그냥 일방적인 통보와 보고의 장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상식적인 요구, 항의, 그리고 묵살이 잇따랐고, 그 중 하이라이트는 다음과 같았다.

“원초의 서? 모든 것의 기록?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간부 하나가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양 회의실은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의사봉 내리치는 소리가 세 번 울렸고, 이내 웅성거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본사에서 내려온 사항입니다. 이의제기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상, 폐회합니다.” 의장이 말했다. 다들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사장과 독 요원도 일어섰다.

“젠장, 회장이 드디어 노망이라도 든 모양이구만.”

“쉿, 조용히 하라고. 그러다가 잡혀가서 경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미치겠구만......”

좁은 복도를 따라 인파가 흘러 나갔다. 동시에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도 뒤를 따랐다. 입 밖으로 내지만 않았지, 부사장도 독 요원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뭐, 아카식 레코드? 물론 풍문으로 들은 적은 있었다. 오딘 클럽은 애초에 세계정복 같은 시시껄렁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록되는 ‘책’을 찾으려는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다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었다. 용과 영웅들이 이 땅 위를 활보하는 시대에 무엇이라고 그렇게 신기하겠는가.

하지만 가능성과 별개로, 그들은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 원탁의 기사들이라도 된 것처럼 가망 없는 일에 인력을 낭비하라니. 요원의 훈련이 주된 업무인 섹터 7의 입장에선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독 요원의 전화벨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전화 좀......”

“아니, 회의는 끝났으니 괜찮네. 빨리 받게.”

“그래요. 네?” 독 요원의 표정이 굳었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가지요.” 지부장이 그를 쳐다봤다. “이봐, 미스터 독. 별 일 아니면 밥이라도 먹고 가게. 본사 밥은 우리랑은 달라서 꽤 괜찮다고.”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큰일이 생긴 것 같아서요. 천천히 식사하고 오세요. 오시기 전까지는 제가 해결해 놓겠습니다.” 독 요원은 지부장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택시를 잡았다.

“OO동 오딘 클럽 앞으로.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총알택시 안에서 독 요원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담배도 피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흔히 나오는 버릇이었다.

“약해 빠졌군.”

거구의 남자가, 자신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짓누르며 말했다. 그의 몸 전신은 투박한 갑옷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거대한 전차 같았다. 대련장 밖에는 의료진과 성난 섹터 7 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남자는 강화유리의 벽 너머로 그 광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런 뒤 발로 쓰러진 자를 걷어올리고는 주먹으로 쳐 그쪽으로 날렸다. 벽이 깨져서 무너졌다. 의료진이 부상자를 옮기는 가운데, 섹터 7 직원들이 성난 벌떼처럼 밀고 들어왔다.

“뭐야, 떼로 덤비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어림도 없지, 구닥다리들. 다 필요 없으니까 독 요원이란 놈이나 데려와. 몇 번을 말해야-” 옆에서 할버드를 들고 거인을 급습하려던 요원 하나가, 그의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알아듣겠어, 이 멍청한 놈들아?”

“제가 독 요원입니다. 많이 기다리신 모양이군요.”

인파의 뒤쪽에서 독 요원이 말했다. 직원들은 양쪽으로 갈라섰고, 거인은 마침내 독 요원이랑 대면하게 되었다. 그가 마스크 너머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오셨구만, 독 요원 나으리. 기다리느라 아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내가 여기 있는 이-” 거인이 뒤쪽에 있는 직원들을 가리켰다. “-쓰레기들을 전부 분리수거 해 놓고 나갔을 텐데, 운이 좋군. 아니,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너도 나한테 죽을 거니까.”

“그래서 성함은?” 독 요원이 말했다. 그는 어깨니 목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렌델이라고 하지. 섹터 8에서, 네놈들 에인헤랴르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증명하러 왔다.” 섹터 8. 섹터 7과 함께 신화방직자 사병 양성소로 유명한 곳으로, 훈련보다는 인체개조에 중점을 둬 악명 높은 곳이었다. ‘섹터 8에 들어가게 되면 공항 보안대는 다 통과한 거나 마찬가지다.’란 말이 있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신화방직자의 능력이 없거나 미약한 자들을 데려와서 정신개조 등으로 능력을 발현시키고, 온갖 기계장치를 심어서 신체능력을 대폭 증강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저 덩치도 아마 몸무게를 달아보면 1톤은 넘어갈 게 분명했다. 갑옷이야 신화방직자의 능력으로 만들어냈다고 치더라도. 섹터 8은 항상 실적에 있어 섹터 7에 비해 영 시원찮았던 탓에, 매번 예산 등으로 마찰을 빚었다. 독 요원은 언젠가는 예산이니 뭐니 시시콜콜한 일들로 시비를 한번 걸 것 같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과감하게 들어올 줄은 몰랐다. 덩치는 이미 싸울 태세 만반이었다. 둘은 서로 거리를 재며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돌았다. 그렌델이 아무런 준비동작도 없이 독 요원 쪽으로 달려들었다. 독 요원은 공중에서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그의 돌진을 피했다. 그러면서 허공에서 대검을 꺼냈다.

“하하하, 멍청한 놈! 공중으로 뛰어오르면 다 해결될 줄 알았겠지! 딱하군!” 그렌델의 갑옷에서 수많은 와이어가 쏟아져 나왔다. 때에 맞춰 형성된 대검으로 와이어를 대부분 베어 넘겼지만, 독 요원은 와이어 하나에 다리가 붙들려 질질 끌려가는 형상이 되었다.

“이런 젠장......” 독 요원은 대검을 휘둘렀지만, 그렌델이 움직여 와이어를 마구 흔드는 탓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쳤다. 검이 내리친 자리에는 불꽃이 튀며 애꿎은 바닥만 쩍쩍 갈라졌을 뿐이었다.

“잘 봐라, 섹터 7의 찌꺼기들! 이 버러지가 어떻게 방금 토해놓은 곤죽이 되는지를! 이게 베르세르크Berserker의 힘이다!”

그렌델이 와이어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자 독 요원이 딸려왔다. 미처 막을 틈도 없이, 거인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독 요원의 배에 꽂혔다. 부러지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요원은 뒤로 쭉 날아갔고, 뒤에 있던 벽을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몇 보 되지도 않아서 괴물이 달려들었고, 미끄러져 숨을 가다듬던 독 요원은 간신히 옆으로 굴러 괴물의 펀치를 피했다. 독 요원은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에서 큰 통증을 느꼈다. 맞기 직전에 몸을 옆으로 살짝 비껴서 흘려낸 덕분에 부러지지는 않았어도, 금 정도는 갔을 게 분명했다. 독 요원의 검이 괴물의 주먹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칼의 이빨이 나가고, 괴물의 건틀렛에 찌그러진 흔적이 남았다. 독 요원은 칼을 맞대다가, 재빨리 옆으로 스텝을 밟아 빠졌다. 또 다시 와이어의 다발이 날아왔다.

“한번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두 번이나 같은 공격이 먹힐 거라 생각한 것도 착각이지요.”

독 요원은 대검을 휘둘러 간단히 와이어를 베어내고, 그 반동으로 올려 베었다. 그리고 극심한 통증을 느꼈는지 표정을 크게 찌푸렸다. 분명히 어지간한 괴물이라도 한 방에 죽일 법한 공격이었지만, 그렌델의 갑옷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그것을 버텨냈다. 스텝으로 빠져 보려던 독 요원은 이번에는 강력한 돌려차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대검을 방패처럼 잡아 앞을 막았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단단한 대검에 금이 갔다. 독 요원은 팔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렌델은 재차 공격을 했고, 독 요원은 막기 바빴다. 잽. 잽. 훅. 잽. 스트레이트. 막을 때마다 금이 커지던 대검은 결국엔 마지막 스트레이트 한 방에 박살이 나 버렸다. 파편 몇 개가 독 요원을 덮치며 그의 눈 위와 입술, 귀를 찢어버렸다. 그렌델이 마무리 일격으로 양 손을 깍지 껴 독 요원 쪽을 내리쳤고, 독 요원은 겨우 굴러서 피했다. 내리찍은 자리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기며 대련장 전체가 흔들렸다. 독 요원은 다시 굴러서 주먹의 사정거리 밖으로 피했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자랑하던 무기도 이제 못 쓰게 됐군!” 그렌델이 말했다. 검의 파편들은 천천히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독 요원의 손에 들려 있던 책도 서서히 불타고 있었다. 독 요원은 그걸 옆으로 던져버리고,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그의 양 손에 연기가 맺히며 형상을 이루는가 싶더니, 이내 말뚝과 비슷한 쌍검으로 변했다. 각 검의 사이는 쇠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독 요원은 그렌델을 향해 한쪽 손을 까딱까딱거려 보았다. ‘덤벼.’

그렌델이 다시 독 요원에게 달려들었다. 독 요원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며 옆으로 살짝 피했다. 바닥에 또다시 몇 개인가의 크레이터가 파였다. 그리고 바닥에 단검을 꽂아넣고-놀라울 정도로 쉽게 꽂혔다-상대의 뒤를 잡았다. 그렌델이 돌아보며 방향을 틀려는 순간 그렌델의 몸을 사슬이 가로지르나 싶더니, 이내 몸 전체를 옭아맸다.

“이딴 사슬쯤은......!” 그렌델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슬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끊어질 생각도 하질 않았다. 그는 몸에서 힘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렌델은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이딴 사슬? 고양이의 발소리, 여자의 수염, 새의 침, 물고기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사슬이에요. 푹 쉬세요, 그냥.” 독 요원이 천천히 그렌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상황은 이미 끝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걸어가서, 그렌델의 사지를 단단히 묶어버렸다. 그리고 대검으로 올려 베서 찌그러진 자리에 단검을 꽂아넣었다. 퍽 소리와 함께 옆쪽 갑옷에 구멍이 뚫렸다. 그렌델이 신음했다.

“맨날 이런 갑옷으로 몸을 둘러싸고 있다 보니, 방어가 뚫리는 것에는 익숙치 않은 모양이군요. 물론 아픔에는 더더욱 익숙하지 않으실 테고요. 여기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시죠.”

“개소리 집어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독 요원이 손바닥으로 단검 끄트머리를 세게 쳤기 때문이었다. 그렌델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여전히 끈은 그를 단단히 옭아매어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인정하셨다 하더라도, 저희 애를 저렇게 만들어 놓은 판에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어요. 몇 번이나 버티실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독 요원이 말했다.

“이 개자시이이이이이이익!!!!”

독 요원이 주먹으로 단검 끄트머리를 내리쳤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몇 번의 비명 끝에, 그렌델은 축 늘어졌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갑옷이 사라지며, 옆에 떨어진 수첩이 불탔다.

“숨은 끊어지지 않은 것 같으니 데려가세요, 의료진. 마취요? 해줄 필요 없어요.”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고 독 요원은 생각했다. 그는 긴장이 풀리자 다시 찾아온 격통에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아까 들어오면서 본 부상자는 F7이었는데,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과연 녀석은 일어날 수나 있을 건가? 독 요원은 행여 자신의 단련법이 그를 무리하게 만든 건 아닌가 하며 가책을 느꼈다. 게다가 못 보던 녀석들이 다수 있었는데, 나이나 그 외의 요소를 고려해 보면 섹터 8의 간부들인 게 분명했다. 놈들은 여기에 뭐 하러 온 거지? 굳이 시비를 걸어서 얻는 게 뭐가 있나? 믿는 구석인 것 같았던 그렌델도 실려 나간지 오래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독 요원과 눈을 마주친 다음에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래저래 복잡해진 탓에, 독 요원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피웠다간 경을 칠 테지만, 지금이야 다들 정신없으니 괜찮겠지. 그가 연기를 내쉴 때마다 눈 앞이 점점 뿌옇게 변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뭐라고 소리를 쳤지만, 들리진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3

베아트리체 위버는 사서였다. 그리고 이런 휴가철에는 그녀의 직장, 국립도서관은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휴가철이면 놀러 가기나 하지 뭐 하러 책을 보러 오겠는가. 장기연체자 목록과 오늘의 연체자 목록을 슥슥 훑어봤다. 어차피 다시 안 올 생각으로 책을 가지고 도망가 버린 녀석들-즉, 포기하고 지우는 게 나을 법한 사람들-투성이에, 요 몇 주간 추가로 빌리는 사람도 없어서 문자도 일일이 보낼 필요도 없었다. 반납한 책도 한참 붐빌 때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었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 할 일은 이번 주 내내 해왔던 것과 똑같았다. 뭐 어때. 남들 휴가 다 가고 그러는데 나도 이런 재미라도 봐야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종이컵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종이컵을 쥐지 않은 손으로는 신문을 열심히 들추고 있었다. 신문 넘기는 소리가 사람 얼마 없는 인문과학실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이 위버가 앉아 있는 카운터를 쳐다봤다. 다분히 짜증이 섞인 눈길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신문에는 ‘오딘 클럽을 노리는 게릴라들의 악행-어디까지 갈 것인가? 헌책방 거리 인질범 탈옥’이란 제목의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나와 있었다. 맙소사, 이게 오딘 클럽 기관지야 뭐야.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기사를 쳐다보다가, 위버는 그 기사에만 6면이 할애되어 있는데다 다른 기사들도 거의 거기서 거기란 걸 알아채고 바로 십자퍼즐 코너를 폈다. 그리고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같은 표정으로 펜을 집어 들었다.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위버는 십자퍼즐을 거의 완성했고, 뿌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칸을 채워 넣으려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아오 진짜! 꼭 전화하면 이런 타이밍에만 골라서 하지! 여보세요.” 그녀는 수화기를 낚아챘다.

“미스 위버, 큰일났어요. 빨리 올라와 보세요. 웬 미친놈들이......” 부관장이었다.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는데, 그녀는 그 능글맞은 변태놈이 이렇게 쩔쩔매는 걸 보니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위버는 시계를 봤다. 어쩐지 배가 고프다 했더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밥 먹으려고 하면 일이 터지고, 조금 쉬어보려고 하면 이상한 놈들이 시비를 걸고. 저번에 선 본다고 했더니 약속장소에 나가서 한 시간이 넘게 상대는 나타나질 않고. 그녀는 십자 퍼즐의 마지막 단어를 채워넣고, 그걸 휴지통에 던지고는 어슬렁어슬렁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발에 비해 지나치게 큰 슬리퍼가 질질 끌리며, 발을 디딜 때마다 착 착 소리가 났다. 십자퍼즐의 마지막 단어는 다음과 같았다. ‘초전박살’.

위버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자, 역시 이야기 들었던 대로 위는 난장판이었다. 무슨 강도라도 들었는지, 다들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니, 위버의 판단으로는 실제로 강도가 든 게 맞는 것 같았다. 왜냐면 복면을 뒤집어쓰고 총을 메고 있는 남자들이 세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자, 바로 총을 겨눴다.

“거기 아줌마! 손들고 저기 구석에 쳐박혀 있어! 그리고 너! 여기 있는 책 죄다 가져와서 이 자루에다 넣으라고!”

아줌마? 위버는 짜증이 확 치밀었다. 오늘은 특히 안 꾸미고 오긴 했지만 아줌마라고? 그녀는 아직 30대도 아니었는데 아줌마라고 부르는 작자들이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었다. 첫 번째는 이렇게 쉬고 있을 때 귀찮게 하는 놈들이었는데, 따라서 눈앞의 강도들은 실컷 엉덩이를 때려줘도 싼 놈들이었다. 저 쪽 카운터에서 부관장이 강도들이 건네준 자루에 책을 쓸어 담다가, 위버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책은 어쩌고 여기에 온 거야!’ 해석하자면 대충 그런 의미였다. 맙소사. 도와달라고 한 주제에 이렇게나 당당하다니.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다가, 위버가 화를 벌컥 냈다.


“야 이 멍청이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깽판을 놓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강도들은 엄청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총을 겨눴다. 그들 역시 고작 여자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까보다 화가 난 것 같았다.

“말이 말 같이 안 들리는 모양인데, 잔말 말고 구석에 쳐박히지 않으면...... 젠장! 저게 뭐야!” 위에서 무시무시한 악취가 풍기더니, 강도들의 가운데로 갑자기 뭔가 떨어졌다. 무지개 빛의 꿈틀거리는 부정형 생물. 작은 방만큼 커다란데다, 시시각각 몸의 색도 변하고, 몸 여기저기에 끊임없이 온갖 동물의 기관을 만들어냈다가 다시 녹여서 몸의 일부로 바꿔버리는, 신성모독적인 괴물. 강도 하나가 당황하며 들고 있던 총을 쏴 갈겼지만, 괴물은 육편 일부만이 조금 튀었을 뿐 멀쩡했다. 방금까지 쏜 총알들이 그 물컹거리는 몸 안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있었다. 바닥에 탄피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강도들은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미 맛이 가 버린 것 같은 한명만 빼고 둘 다 인질들에게 총을 겨눴다.

“야, 여자! 인질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꼴을 보기 싫다면 빨리 항복하고 책을 내놔라!” 강도들이 말했다. 위버는 인질들 쪽을 한번 봤다. 그들이 흘리고 있는 땀이 바닥에 고여 웅덩이를 이룰 지경이었다. 인질들이 바닥에 나뒹군다고? 바닥에 나뒹구는 건 너희들이 될 거다. 위버가 생각했다. 다행히 놈들은 인질들 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알아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날뛰어도 좋아. 단, 죽이지는 마.” 위버가 말했다. 동시에 무지개 빛의 슬라임이 몸에서 팔을 꺼내 가까이 있던 강도 하나를 붙잡아 버렸다. 그는 마지막 발악으로 위버를 쏘려고 했지만, 슬라임이 총을 삼켜버리는 바람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얼굴만 빼고 집어삼켜졌고, 심하게 간지럼이라도 태우는 건지 발작적으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역시 인질들 목숨은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나머지 강도 둘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인질들을 덮치려는 순간, 앞에서 슬라임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강도들은 경악했다. 한 번에 두 마리의 소환수라고? 신화방직자 놈들은 보통 한번에 하나 정도밖에 쓰질 못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슬라임은 훌륭한 벽이 되어 총알 하나 인질들 쪽으로 보내지 않았다. 강도들은 이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동료를 버리고 도서관 출입 게이트를 뛰어 넘었다. 이대로 도망칠 셈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색하게 슬라임이 지하철에 맞먹는 속도로 돌진하며 게이트를 받았고, 입구는 완전히 뻥 뚫린 형색이 되었다. 슬라임이 서서히 ‘머리’를 그 쪽으로 돌리자, 문을 향해 도망가고 있던 강도들이 비명을 질렀다. 문을 열고 강도들이 사라졌고, 이어 문틈 사이로 슬라임이 모습을 감췄다. 잠시 뒤 비명소리와 발작하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버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벽 구석에는 여전히 슬라임에 붙들린 채로, 강도가 낄낄 웃고 있었다. 인질들은 위버 쪽을 보고 서커스 광대나 신기한 동물 보는 것처럼 쳐다보며, 오늘은 이제 책 따윈 질렸으니 게이트 문을 열고 나갔다가-아마도 슬라임을 보고-비명을 지르거나, 소동도 해결됐으니 나는 내 볼일 본다는 식으로 계단을 오르내렸다. 고맙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이제 오늘은 지쳤으니까 봐 달라고 그러고, 은근슬쩍 조퇴나 해야지. 위버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난장판이 된 도서관 안 꼴을 봤다. 자루에 아무렇게나 담긴 책들-어차피 상황 금방 끝날 건데 조금만 버티지, 이 멍청이-과, 바닥을 지지하고 있는 콘크리트 째로 뽑혀 나간, 찌그러진 게이트들. 분명 나중에 한소리 듣거나 재수 없으면 감봉까지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고, 그녀는 배가 고팠다. 언제나 12시에 밥을 먹으러 가고,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낮잠을 즐겼는데, 지금은 12시 반이었다. 위버에게는 3시에 식사하느니만 못한 시간이었다.

“부관장님, 점심 먹고 올게요. 이따가 봐요.”

“아, 어, 그래.” 부관장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위버가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는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인물 하나가 서 있었다. 위버는 그를 보자마자 보증 서달라는 친구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미스 위버, 오랜만입니다. 저 기억나시죠.” 요원이 말했다. 제법 말쑥한 편인 옷과는 다르게, 그의 입술은 한 대 맞았는지 부어오르고 터져 있었다.

“예, 저번에 연락하신 독 요원님이군요. 저 지금 밥 먹으러 나가니까, 나중에 다시 오세요.” 위버는 그렇게 말하고는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뒤에서 계속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그녀는 돌아봤다. 독 요원이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위버는 요원이 무슨 일을 할지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오딘 클럽에서 일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라고 말한다.” 요원이 입을 열자, 위버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오딘 클럽에서 일하실...... 예. 저번에 말씀 드리고 나서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독 요원이 말했다.

“대답은 저번하고 똑같은데요.” 위버는 딱 잘라 말했다. 독 요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였다.


“흠, 어디 보자...... 부양해야 할 가족은 세 명에, 일할 수 있는 건 위버 양 한 사람 뿐이군요. 그 월급으로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저희가 조금 험한 일을 하는 건 사실입니다만, 위버 양 정도라면 무리 없으실 것 같고. 무엇보다 저희와 함께 일하게 되면 가족 부양은 전혀 걱정 없으실 거라고 보장할 수 있어요.” 독 요원이 말했다. 하지만 위버는 그리 고민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혀 없는데요. 수고하세요.”

“아,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독 요원은 미련 없어 돌아섰다. 어깨 뒤를 보니, 위버는 가면서도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제 아무리 회사가 뒤에 있다고 해도, 이 이상 권유는 무리였다. 아마 스토커로 신고나 당할지도 몰랐다.

위버는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했다. 오딘 클럽? 확실히 사서 생활은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다. 당장 집에 돌아가면 자기가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세 명. 집세에 식비까지 포함하면 빠듯할지도 몰랐다. 만일 에인헤랴르로 일하게 된다면, 최소한 집 걱정은 면하게 되겠지. 하지만 손에는 엄청나게 피를 묻히게 될 거였다. 슬라임으로 간지럼만 태우고 끝낸다고? 에인헤랴르로 일하게 된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다뤄본 적이 없는 집게발이나, 강산성 액체까지 쓰게 될 지도 몰랐다. 한 사람을 죽이거나, 최소한 인생을 크게 망쳐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흉기들. 위버는 적어도 피 묻은 돈으로 식구들을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위버가 생각하기에는 오딘 클럽은 게릴라뿐만 아니라, 도서관도 껄끄러워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들이 죄다 책을 쥐고 흔들어야 하는데, 무상으로 빌려주는 집단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제 아무리 세력을 떨친다 해도 도서관 자체, 나아가서 한 나라를 상대로 직접 싸움을 거는 건 오딘 클럽으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게릴라들에게 하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사병들을 동원해 진압하거나, 시설을 파괴하거나-오늘 아침 신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화재 뉴스나 규모를 보면 놈들이 또 헌책방 거리를 급습해 관련자를 모두 죽이고 불을 질렀다는 건 분명했다. 입술이 터져 있는 저 요원은 한 대 맞기라도 한 게 분명하겠지- 하는 짓거리를 도서관에 하지는 못했다. 단지 오늘처럼 도서관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이직권유를 하는 식으로, 힘을 조금씩 약화시켜 나갈 뿐이었다. 저번 달에도 사서 세 명이 오딘 클럽으로 이직해버리는 바람에, 걸출한 후임이라도 들어오지 않는 이상 도서관에 이제 믿을 만한 신화방직자는 위버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놈들이 무슨 권유를 하건 간에, 절대로 놈들의 개가 되지는 않겠다고. 그러자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독 요원은 위버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려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금연해야 하는데.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저번에 섹터 8의 불한당을 처리하고 나서, 독 요원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일련의 귀찮은 과정을 거쳤다. 급소도 전부 피했고, 몇 개월만 지나면 멀쩡하게 다닐 수 있을 상처였는데도 그렌델은 어떻게든 덤터기를 씌우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정작 그렌델에게 패배하고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았던 요원은 아직도 의식불명 상태였다. 저 멀리서 슬라임에게 붙잡혀 있는 남자 역시 축 늘어져 있는 게, 독 요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독 요원은 당분간 근신 처분을 받고는 아무튼. 섹터 7에서는 엄중히 항의했지만, 섹터 8 측에서는 독 요원의 징계를 핑계로 문병도 오질 않았다. 게다가 상황은 뜻밖의 곳에서 나빠졌다. 의외로 그렌델은 섹터 8에서 키워낸 요원- ‘베르세르크’라고 하는 개조 신화방직자들-중에서는 비교적 신참인 편이었는데, 그가 섹터 7의 최강자라 할 수 있는 독 요원과 대등한 싸움을 펼쳤다는 사실이 상부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덕분에 이번 예산은 왕창 깎였고, 당분간 훈련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젠장.”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독 요원은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손톱은 이미 다 물어뜯어, 손톱 밑의 살까지 드러난 지 오래였다. 피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놈의 ‘전능의 서’ 나부랭이는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회사에 충성을 보일 만한 건덕지는 그것밖엔 보이질 않았다. 그래, 그걸 이용해서 올라가주자. 지위로도, 그리고 무력으로도 그는 강해져야만 했다. 어쩌면 영영 깨어나지도 못할 부하를 위해서라도. 자기 밑에 있는 놈들이 괴로운 꼴을 안 당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연기를 뿜어 올렸다.

한편, 멀리서 누군가가 동그란 원을 통해 독 요원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독 요원의 뒤통수에 십자선이 교차했다. 그는 서서히 검지에 힘을 줬다. 하나. 이 순간만을 위해서 몇 번이고 연습했었다. “제법 비싼 담배 피우고 계시는군............” 둘. 국립도서관 앞의 광장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채 꺼지지 않은 담배 한 개피가 굴러갔다.

근처 폐건물에서 한 남자가 초연이 피어오르는 총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품 안에 있는 책에 불을 붙였다. 책이 서서히 불타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총 역시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여기서 벗어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럼, 그 포위망도 뚫고 도망쳤는데. 멀리서 비명 소리, 그리고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최............ 사장............”


그의 양 뺨에 난 커다란 상처가 입꼬리를 따라 같이 올라갔다. 입이 쭉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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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커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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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尹主] 2012.10.19 06:00
    이건 더 안 쓰시나요? 좀 더 위버가 활약하는 걸 보고 싶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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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욀슨 2012.10.19 06:37

    실컷 짜낸 다음에 이도저도 아니어서(+공모전이니 뭐니에서도 미끄러져서) 방치하고는 있었는데, 확실히 그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윤주님 덕에 다소 용기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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