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의 생존전략 5화

by 윤주[尹主] posted Jul 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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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장이 발작하듯 쿵쾅댄다. 눈을 감아도, 심호홉을 해도 고동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뭘 이렇게나 흥분하는 걸까. 뭘 이렇게나 의식하는 걸까. 스스로를 설득하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이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녀와 같은 체취가 나고, 같은 숨소리를 내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여기 있는 애는 소리가 아니다. 생전 처음 보는 타인, 게다가 젖비린내나는 어린애란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같은 공간 안에, 이렇게 가까이 죽은 여자친구를 닮은 애가 있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애가 내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 몇 줄기가 이부자리를 타고 흘러 내 눈 앞에서 흩날릴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참을 인 자를 마음 속에 새기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다. 본래 내 침대였던 자리엔 그 빌어먹을 애새끼, 소리를 닮은 초딩 꼬마애가 누워있다. 나는 그 아래 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워, 피로한 두 눈을 연신 비비면서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전부 그 애새끼 탓이다.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조금 전 양쯔 강, 그녀 자신은 '창 지앙'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도움받은 그 때로부터 기억을 되살려 보자.


 "'창 지앙'이야.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불러."


 양쯔 강, 자칭 '창 지앙'은 스스로에 대한 호칭을 정리한 뒤, 다시 내 뒤에 숨은 꼬맹이를 보며 물었다.


 "이제 슬슬 얘기해 보지 그래? 넌 대체 누구야?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

 "얘, 어째서 아무 말도 않는 거야? 설마 이거 무시하는 거야?"


 창 지앙이 윽박지르자, 소녀는 더욱 더 내 등 뒤로 숨어들었다. 눈만 빼꼼히 내놓고 나와 창 지앙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정말 이 애가 창 지앙과 다른 '강'들과 같은 존재인 걸까? 조금 전 남반에 대항해 싸우던 모습을 생각하면 물론 의심할 여지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산왕의 백성들과 대등히 맞서 싸울 수 있는 건, 적어도 지금까진 이들 '강'뿐이다. 그거 아니면 뭘까. 이 애가 산왕의 백성도, '강'도 아닌 또다른 무언가란 얘길까?


 "엉뚱한 생각하지 마."


 내 생각을 어떻게 안 건지, 창 지앙이 태클을 걸고 나섰다.


 "어째서 얘가 '강'이 아니라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그런 걸 상상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돼." 

 왜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대뜸 내게 섬뜩한 질문을 던졌다.


 "얘, 실은 뭔가 기대하고 있는 거 아냐? 이 애가 '강'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 아니라, '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던가."

 "그런 건 아냐!"


 정곡을 찔린 양 나는 당황해했다. 창 지앙과 말을 섞는 게 오늘이 처음이란 걸 깨달은 건 그 다음이었다. 초면에 서슴없이 반말을 한 걸 사과하니,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어, 어째서 사과하는 거야! 바보같아, 그런 일 하나하나 쪼잔하게 따지고 들 거 같아 보여?"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제멋대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단순히, 사과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일까?


 창 지앙의 말마따나, 실은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 앞에 나타난 소녀는 '강'이 아니라고. 죽은 소리가 되살아나 내 곁으로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온갖 감정들이 줄줄히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슬픔과 아쉬움, 고통, 분노, 죄책감... 소리를 잃고 갈 곳 없이 헤메이던 감정들이 소리를 닮은 아이를 향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처럼 마음 속에서 웅웅거렸다. 그런 감정들을 억누를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소녀가 소리 본인도,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강' 아닌 다른 무엇이었더라도, 나는 그녀를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거다.


 별안간 왼손바닥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려다보니, 등 뒤에 숨은 소녀가 자기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보자 소녀는 좀 더 세게 손바닥 위를 쿡쿡 찔렀다. 잠깐만, 이건...


 "리....하?"

 "뭐가?"

 "아니 방금 얘가 손바닥에...리하, 라고 쓴 거니? 그렇지?"


 확인을 위해 묻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아주길 기대하는 것 같은데, 대체 뭘까?


 조금 생각하던 창 지앙이 입을 열었다.


 "리하, 혹시 그게 네 이름?"


 소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창 지앙을 조금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뭔가 말하려는 창 지앙을 눈짓으로 말리곤, 나는 쭈그려 앉아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 편이 더 그녀 마음을 열기 더 좋을 것이다.


 "리하, 라고 했지? 넌 어디서 왔어?"


 고사리처럼 작은 손가락이 등 뒤를 가리켰다. 나도, 창 지앙도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과, 강변을 병풍처럼 두른 높다란 건물들.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그 중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확실지 않았다. 그녀가 '강'이라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다면 말이다.


 "설마...여기서 나왔단 말야?"


 소녀처럼 말없이 흐르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창 지앙은 믿기지 않는단 듯 물었다.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묻는 질문이었다. 경악한 탓인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런 탓인지, 그녀는 조심성없이 소녀 앞에서 이어지는 말을 내뱉어 버렸다.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 그도 그럴 게, 이건 '죽은 강'인걸! 어떻게 죽은 강에서 '강'이 태어날 수 있냔 말야!"


 그 의문점에 답할 수 있는 건, 눈 앞에 있는 소녀나 둔치를 감싸고 흐르는 저 한강뿐이리라. 강에게서 대답을 기대할 수 없기에, 나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내 얼굴을 가만히 들어다볼 뿐이었다.





 

 물론 그 다음 이야기도 있다. 어떻게 '한강'인 여자아이와 한 지붕 아래서 눕게 되었는가.


 단적으로, 그건 전부 저 제멋대로인 아가씨, 창 지앙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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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밍숭맹숭한 이야기가 됐네요;
 
 어쨌거나, 잠시 동안 창도가 접속이 안 돼서 못 올리게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접속이 되네요.
 어젠가 그제인가도 한 번 이랬던 거 같은데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말예요.

 다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