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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탁환 작가님이 쓴 <방각본 살인사건>을 읽었습니다. 386세대의 고뇌와 무력감을 담으려 한 건지, 왜 그리도 주인공은 답답하기만 하던지요. 동생과 이 얘기를 하던 중, 문득 떠올린 걸 두서없이 정리해 봅니다.


 대략적 내용을 소제목에 담아 요약합니다.

 

#1. 우리는 아직도 이분화가 가능한 시대에서 살고 있다.

#2. 한국이 자랑하는 문화 콘텐츠는 여성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3. 남성적 문화광들이 즐길 문화 콘텐츠가 한국엔 없다.

#4. 여성적 문화 = 관계의 문화다.

#5. 가장 재미있고 역동적인 글은 남성적 문화에서 나온다.

#6. 그럼 우리가 전부 남성적인 글을 써야 하냐고? 천만의 말씀!




 #1. 우리는 아직도 이분화가 가능한 시대에서 살고 있다.


 유럽 역사를 살펴보면 여성주의 운동이 얼마나 천천히 성숙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양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급진전되긴 했지만, 여성이 투표권과 참정권을 얻고, 또 남성과 거의 동일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모든 유럽 국가가 백 년 이상의 기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여성주의가 갑자기 이식된 경우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히 대접받아야 할 것과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 듯합니다. 군가산점 문제, 지하철 여성전용칸, 여성전용임대주택 등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이슈는 여전히 많습니다. 즉, 한국의 현대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공동으로 만들어가는 사회가 아닌, 양자가 치열하게 대립하며 여전히 합의를 보아 가는 중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저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남성적 문화'와 '여성적 문화'라는 이분법을 적용해 분석, 사고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외부 지향적 문화와 내부 지향적 문화, 관찰하는 문화와 성찰하는 문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문화와 관계를 회복하려는 문화,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2. 한국이 자랑하는 문화 콘텐츠는 여성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한국 전통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한'이라고들 합니다. '한'은 슬픔, 애틋함, 달성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되며 한 방송국에서 방영된 실험에서는 '부끄러움'과도 연결되는 정서로 설명됩니다. 특유의 절제되고 억눌러진 정서. '한'은 내부 지향적인 정서며, 특히 여성에 의해 잘 표현될 수 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수많은 고전 시가에 나타나는 여성적 화자의 목소리, 한국의 대표 소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속 주인공. 오늘날에도 우리는 온갖 드라마 속에서 '한' 품은 여자들의 무서움을 목격하곤 합니다. 물론 '한'은 때로는 남자 캐릭터의 입으로도 이야기가 되곤 하죠. 한류의 한 축인 영화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 주인공들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속에 어쩌지 못하는 '한'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마초적인 양 굴지만, 내면은 잔뜩 상처입고 여린 인물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지요.

 한국에서 여성적 문화 코드를 갖춘 작품의 경쟁력은 만화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소년만화는 일본 만화의 침공에 의해 사라지거나, 혹은 일본 만화의 세례를 받거나, 또는 겨우겨우 명백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순정만화는 여전히 독자적인 팬층을 보유한 작가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한국 출판 만화는 명랑만화와 순정만화만 생존해 있고, 소년만화는 자생력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상황에서 유독 웹툰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진솔한 일상 이야기, 독특한 발상이 담긴 이야기, 출판만화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형식 안에서 웹툰은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지금은 온갖 소재와 장르가 실험대에 오르는 웹툰 시장이지만, 본래 웹툰은 소소한 일상의 재미와 감동을 독자에게 제공해 성장해왔다는 것을 많은 분이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자기 성찰적이고 내면 지향적이라는 사실이 웹툰 역시 여성적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케 해줍니다.

 앞서 밝힌 대로 김탁환 작가님의 <방각본 살인사건>은 답답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감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요즈음 한국 문학 작품들이 모두 이처럼 무기력하다 싶을 정도 내부 지향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현대 문화의 주류는 여성적 문화인 것입니다.



 #3. 남성적 문화광들이 즐길 문화 콘텐츠가 한국엔 없다.


 여성적 문화 코드가 여러 형태로 재생산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때문에 여성적 문화 코드가 담긴 콘텐츠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지금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여성적 문화 코드만으로 만족하진 못합니다. 개중엔 남성적 문화 코드를 욕구하는 사람들도 얼마든 있겠지요. 만화나 영화, 책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남성적 문화 코드를, 사람들은 게임과 스포츠, 혹은 정치활동을 통해 충족합니다. 그것도 부족하면 외국 문화 콘텐츠를 가져다 충족하고요. 4800만 국민이 모두 하루종일 드라마만 보지 않을 텐데도, 어째서 연간 100여편 가까운 자국 드라마 외에도 외국 드라마를 가져다 보는가, 하는 데는 그런 사정이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화나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자기가 가장 잘 만드는 여성적 문화 콘텐츠를 수출하고, 그 대가로 자기가 만들지 못하는 남성적 문화 콘텐츠를 수입합니다. 수입되는 드라마, 만화, 영화들에서 보이는 장르 편중은, 이들 수입되는 이야기들이 분산된 여러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게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4. 여성적 문화 = 관계의 문화다.


 이제 글 얘기로 넘어와 봅시다. 글 쓰기 전, 수많은 캐릭터들의 관계도를 짜고 구상하는 분들이 많으실 줄로 압니다. 저도 자주 그렇게 하니까요.

 단도적으로 말해, 관계 중심으로 이야기 전체를 파악하는 건 여성적 사고 방식입니다. 이야기는 관계가 안정된 상태에서 시작해, 어떤 사건에 의해 관계가 무너지고 다시 그 관계를 본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을 주목하면서 진행되죠. 인물들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건, 드라마나 순정 만화에서도 자주 보이는 모습입니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지 않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 드라마가 아닌, 미국이나 영국 드라마를 봅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어, 주인공이랑 저 조연이랑 둘이 사귀나?' 혹은 '쟨 왜 매번 행복해지질 않아!' 하면서, 캐릭터들이 다른 캐릭터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관람합니다. 그러다 이렇게 묻습니다. '왜 쟤네들은 맨날 저렇게 뭐가 안 맞냐?'

 미국은 남성적 문화 코드가 강한 나라입니다. 도전 정신이 강하고, 슈퍼히어로와 강력한 지구방위대 군을 가진 나라입니다. 동시에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벨리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죠. 남성적 문화는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명확한 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문화이죠. 미국 드라마는 매 화마다 다른 문제가 주어지고, 주인공들이 그것을 나름대로 해결하면서 종료됩니다. 그 문제 때문에 흐트러진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드 속 주인공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그것 때문에 흐트러진 관계 위에 다른 새 관계를 정립합니다. '엇갈린 관계 위에 쌓은 새로운 관계'는, 결국 그 근본적인 관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파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미드 속 등장인물들 간 엇갈림의 정체입니다.

 한국 드라마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둘 사이에 관계가 엇갈린다면, 그건 아직 두 사람이 관계 회복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두 남녀가 몸이 뒤바뀐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흐지부지 해결이 됩니다. 중요한 건 그 해프닝으로 인해 두 사람 관계가 시작되었고, 또 발전되었다는 사실뿐이죠.



 #5. 가장 재미있고 역동적인 글은 남성적 문화에서 나온다.


 삼국지가 왜 인기있는가, 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일견 복잡해 보입니다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삼국지는 수많은 '라이벌과 라이벌의 대결' 이야기입니다. 조조와 유비, 조조와 손권같은 군주뿐만 아니라, 제갈량과 주유, 사마의와 제갈량처럼 책사, 장수들도 모두 라이벌 대 라이벌 관계로 엮여 있습니다. 라이벌이 사라지면, 곧장 또다른 라이벌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삼국지>에 나타나는 갈등 구조 자체는 내용에 비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로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가 있습니다. 끊임없는 라이벌 대 라이벌 이야기. 단순한 구조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갈등 탓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이것이 소년 만화가 인기를 모으는 방법입니다. 소년 만화는 관계를 복잡하게 정리하지 않습니다. 나, 아니면 적, 그도 아니면 조력자. 기껏해야 그 정도입니다.  인물 관계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는 거죠.



 #6. 그럼 우리가 전부 남성적인 글을 써야 하냐고? 천만의 말씀!


 지금까지 제가 얘기한 건, 어디까지나 국내에 이렇게 미충족된 수요가 있고, 그것을 충족시키려면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콘텐츠를 사와서까지 한국 사람들은 남성적 문화 코드를 은근히 바라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더욱 단순하고 갈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라이벌 대 라이벌 구도로 전개된 이야기가 필요하단 거였죠.


 그렇다고 남성적인 글쓰기가 만병 해결책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여러분이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와 같은 이야기를 쓴다는 건, 즉 스포츠나 게임, 현실 정치 참여를 통해 어느 정도 만족을 누리던 독자층을 빼앗아와야 한다는 소리일 겁니다. 글이 스포츠와 게임, 신문 정치면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것도 여성적 방법이 아닌, 남성적 방법으로 말이죠.


 남성적 문화 코드로 글쓰기, 구체적으로 추리, 판타지, SF, 라이트노벨 등 현재 대형 서점에서 외국 서적들이 다수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들에 참전한다는 것은, 이처럼 강력한 경쟁자들과 다투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문화 콘텐츠는 그 하나하나가 내용과 소재, 아이디어 면에서 차별화되어 있으므로, 경쟁에서 승리한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이태껏 자신이 여성적, 관계적인 글쓰기를 해왔다면, 한번쯤 남성적, 문제 지향적 글쓰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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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乾天HaNeuL 2012.05.09 23:47
    ......전 성격이 상당히 괴상(?)하기 때문에 관계가 복잡한 소설을 더....(?????)
  • profile
    윤주[尹主] 2012.05.10 08:04
    고전을 좋아하시는군요 ㅎ 대하소설 많이 읽으셨을 듯요
  • ?
    乾天HaNeuL 2012.05.10 19:27
    대하소설 안 읽었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ㅋㅋㅋㅋㅋ 뭐라고 할까. 특별히 취향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없어요.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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