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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 노만이라는 인물의 장례식을 통해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고약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어떤 허무감을 불러 일으키기를 원한다. 그것은 아마도 나 스스로가 알프 노만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생각할 때마다 허무감에 몸서리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허무란 결코 피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더욱이 인간 본연의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단지 알프 노만이 일생 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들이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 내가 말하는 허무란 오로지 그 사실만을 가리킬 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의 장례식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만큼 적당한 수단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시신이 매장되는 날에는 하필 기다란 장대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으며, 장례 행렬을 따르던 사람은 아름다운 유라 히브렐과 알프의 어린 손녀인 미렌 노만, 그리고 마을의 늙은 성직자들 몇명 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날의 광경이 더욱 공허하게 느껴질 것이다.

  병은 갑작스럽게 알프 노만을 찾아왔다. 의사는 그가 '일종의' 독감이라고 말했으며, 쉽게 치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라는 이것이 진짜 독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이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또 다른 질병이 알프를 찾아올 것이며, 결국에는 알프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던 것이다. 알프는 그만큼 노쇠해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 몇 년 동안 귀신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행동했으며, 유라나 손녀인 미렌하고도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죽어가는 노인들처럼 히스테리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집안을 오물로 더럽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라는 차라리 알프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유라가 가장 참지 못했던 건 알프의 무기력함, 시체나 다름 없는 그 모습이었다. 유라는 알프에게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다. 알프가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했기에 유라가 그의 수발을 들 필요는 없었지만, 만일 유라가 없었더라면 알프는 끝내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이 살던 논테는 작은 섬마을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몸을 던질만한 곳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알프는 죽기 직전에 유라의 흰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야. 너는 왜 여태까지 나를 떠나지 않았지?」

  알프가 그렇게 분명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을 유라는 실로 오랜 세월 동안 듣지 못했다. 하지만 유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그들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평소에 할아버지를 무서워하던 미렌은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빼꼼히 고개만 들이밀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목사는 기도문을 읊었다. 성직자 한 명이 그의 뒤에 서서 큰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유라는 맞은편에 서서 가만히 나무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우산을 씌워주는 성직자가 한 명 붙어있었다. 그 옆에는 미렌이 역시 검은 옷을 입고서 가만히 서있었다. 미렌은 무척이나 지루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길고 긴 기도문이 끝나고 장의사가 데려온 일꾼들이 삽으로 흙을 퍼내어 관 위에 덮기 시작했다. 관은 흙으로 점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미렌도 지루해하지 않고 열중하여 흙으로 덮여가는 관을 바라보았다. 미렌은 그것이 죽은 할아버지가 매장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미련한 아이가 아니었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장례식은 더욱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마치 우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취급될 정도로 성스러운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물론 실제로 알프 노만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논테의 사람들은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났고, 타인과의 어떤 교류도 없이 집안에만 은둔하는, 조금은 수상하지만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은 그런 노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비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거롭게 나와서 그의 매장을 시켜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라 히브렐은 일이 조용하게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프 본인도 틀림없이 이러한 방식을 더 좋아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비석에는 알프 노만의 이름과 출생, 사망년도 외에는 별다른 문구가 적히지 않았다. 유라는 그런 문구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어떤 말을 써놓아도 그것이 알프 노만이라는 사람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묘비명이 어쩐지 허장성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모든 문학적 감각을 동원하여 '최후에 남길 한 문장'을 지으려고 애쓰지만, 알프에게는 그런 취미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죽으며 남긴 말은 "왜 나를 여태까지 떠나지 않았느냐"는 물음 뿐이었다.

  유라는 미렌과 함께 조용히 묘지를 떠났다. 그 후로 모녀는 자신들의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갔고,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알프의 묘지를 찾았다. 유라 히브렐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남편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알프 노만이 매장된 뒤 3일 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바로 러프 베드라는 하르손 출신의 늙은 용병이 알프의 무덤을 찾아와 통곡을 하고 간 것이다. 알프가 하르손에 머물던 시절, 러프 베드와 친하게 지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게으른 용병 러프 베드가 제법 멀리 떨어진 논테 섬까지 찾아올 정도로 둘의 친분이 두터웠는가에 대해서는 다들 의문스러워했다. 물론 그러한 의문도 오래가지 않았다. 러프 베드의 조문에 대한 이야기는 이틀도 되지 않아 논테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그가 마치 문명으로부터 떨어져 멧돼지에게 길러진 사람처럼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만 사나흘쯤 더 길게 이어졌을 뿐이었다.

  이것이 효과적인 서장(序章)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 여러분이 이 죽음의 순간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알프 노만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것은 절대 알프 노만의 '전기'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유년기나 소년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할애되며, 또 그 얘기들은 내가 정말 하려고 하는 얘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알프 노만이 하르손에 머물던 시절이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이미 50을 넘겼으며, 정확하게는 5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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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1.05.23 05:40

      재밌겠네요. 장례식으로 시작하고, 모험을 마친 노년의 은둔자에 대해 풀어가는 이야기라니.


     후일담 얘기같은 분위기가 날까요? 그런 글은 좋아합니다. 또 쓰고 싶은 글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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