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88 추천 수 1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평소 같았던 저녁 시간이 끝났다. 남편이 사온 과일을 씻고, 손질하는 건 내 몫이었다. 사과 두 알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오면서 거실에 앉아 TV를 보는 남편을 흘겨보았다. 자기한테 눈치 주는 걸 알아본 남편은 금세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면 도와 달라 하지 그랬어."

 "됐어. 이런 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상 불편한 몸으로 거실 한편에 자리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남편 부축을 받아 소파에 기대어 앉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지쳐 있었고, 모든 게 귀찮고 짜증만 났다. 그래서였을까.


 "그래, 이런 몸으로 오늘 외출까지 했다고?"


 두 사람 몫으로 불어난 와이프 몸을 간신히 눕힌 이 한심한 남자가 한다는 소리에 꼭지가 돌았다.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얘기였다. 남편이 별 악의 없이, 때때로 황당하리만치 눈치 없는 얘기를 자연스레 꺼내놓는다는 건 결혼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하지만 왜, 그런 거 신경 써줄 처지가 안 된다. 자기 몸 가누기도 힘든 사람이 무슨 남 생각을 한다고?  곳간에서 인심 난단 게 괜한 소리가 아니다.


 "왜? 난 바깥바람도 쐬면 안 되니? 갑갑한 집에 하루 온종일 앉아 있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한데?"

 "뭘 화를 내고 그래?"


 예상대로 남편은 내 반응을 뜻밖으로 받아들였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일으킨 반향이 의도잖게 컸던 것일까?


 "배는 불러오지, 온몸은 쑤시고 뻐근한데 그렇다고 집안일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 남들처럼 이런 때만이라도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옆 동 희선 씨네 얘기야?  그러니까 나도 말했잖아. 애 낳을 때까지만 이라도 당신 엄마한테 좀 봐주십사 부탁하자고."

 "엄마가 뭐니? 자기한텐 장모님이지. 그리고 희선 씨가 아니라 정현 씨네. 희선 씨는 5층에 혼자 사는 여자잖아. 지난 번 반상회때 봐놓곤."


 아무튼, 하고 남편은 그 화제를 피했다. 기억력 나쁜 것도, 자신에게 불리하면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것도, 전부 남편이 가진 안 좋은 버릇이다. 좋게 말하면 대범한 거지만 실상은 지나치게 사람 무르고 허술한 성격일 뿐. 연애할 때는 그런 단점조차 인간미라고 생각했었다. 하긴 누구나 그러지 않던가? 제 눈에 낀 콩깍지란 놈은 연애할 때는 보이지 않다가 고 놈의 충성인지 혼인서약인지를 하고 난 후부터 비로소 하나둘, 조금씩 드러나는 거지.


 "그리고 우리 엄마한테 신세질 생각, 난 눈곱만큼도 없어. 자기도 알잖아. 우리 친정 섬마을이라 한 번 뭍에 나올 때마다 생고생인 거. 예순 다 되가는 노인네야, 우리 엄마도. 그런 노인네한테 손주 볼 때까지 식모 노릇 좀 해달란 거, 난 죽어도 말 못해."


 내 말에 남편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쩔 수 없단 듯 알았어, 알았어. 하고 연발하는 그를 보고 속에서 다시 불이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참아 넘긴 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배가 다시 살살 아파왔다. '아빠, 아빠…….' 환각 속에서, 아이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제 친부를 찾아 고사리 같은 손발을 흔들며 엉엉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다시 15평 아파트 거실 안이었다. 아이는 다시 조용해졌다. 남편은 발치에 앉아 내가 가져온 사과를 서툴게 깎았다. TV 속에선 연예인들이, 개인정보 관리에 대한 얘기를 한껏 늘어놓는 중이었다.


 "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데서 장보고 받는 카드 영수증, 예전에는 진짜, 귀찮다고 쓰레기통에 그냥 구겨 버리는 분들 많으셨거든요? 근데 이런 것들 보면 카드 번호 일부랑 이름, 주소, 심지어 어떤 건 자기 싸인 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렇게 무심코 버리는 영수증이 개인 정보로 수집되기도 한다면서요?"

 "네, 최근에는 가정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에서 이런 개인 정보를 수집, 업자에게 판매한 일당이 체포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알선업자에게 판매되어 추가적인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하니까요, 시청자 여러분의 충분한 관심과 주의가 필요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금요일 아냐?"


 TV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내 쪽을 돌아보고 잠시 동안 그 큰 눈을 끔뻑이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금요일 맞는데?"

 "나 몸 좀 일으켜 줘. 오늘 쓰레기 내놓는 날인데 잊고 있었어."

 "내가 할게. 뭐 내놓으려고?"


 아까 말다툼을 의식했는지, 남편은 자기가 하겠다며 먼저 나섰다. 조금 고맙긴 하지만, 속이 빤히 보이는 친절 따위 덥석 받아들 생각은 없다.


 "됐어. 요 앞에 나가는 건데 뭐."

 "무리하지 말고. 일반쓰레기만 내놓을 거야? 다용도실에 있는 거?"


 남편은 보기 드물게 의욕 충만해 있다. 할 수 없지, 하고 남편에게 손짓해 곁에서 부축하게 했다.


 "그러면 같이 나가. 어차피 분리수거할 것들도 내놔야 하니까."


 캔이나 플라스틱 따위를 분리수거하는 통과 일반쓰레기 수거 통은 각기 다른 곳에 있다. 꽤나 큰 단지라선지,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며 일반쓰레기 수거함은 네 개 동이 함께 쓰도록 중앙 진출입로 옆에 두고, 분리수거함은 각 동마다 설치해둔 탓이다.

 우리가 사는 통로는 중앙 진출입로 바로 곁이라, 같은 동 가운데 통로 옆에 둔 분리수거함보다 일반쓰레기 수거함이 좀 더 가까웠다.


 "그럼 내가 분리수거함 쪽에 갖다올까? 거기가 더 멀고."

 "기왕이면 일반쓰레기를 버려줘."


 내 말에 남편은 왜냐고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이 남자는.


 "일반쓰레기는 던져 넣어야 되잖아. 나 몸 무겁고, 팔도 올리기 힘들고."

 "그래 그럼. 내가 갖다올게. 그거 버리고 곧장 자기 데리러 갈께. 됐지?"


 그제야 겨우 일이 분담됐다. 나는 한숨을 쉬곤 남편과 다용도실로 갔다. 다용도실이라곤 하지만, 실제론 세탁기에, 쓰레기를 임시로 놓아두는 부엌 곁에 딸린  베란다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좀 늦다 싶은 결혼이었지만 애는 의외로 금방 가졌다. 시부모님은 물론이고 남편도 적잖이 기뻐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 기뻐하지 않은 건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꼼꼼하지 못한 남편은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나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셈해 봐도 임신 기간이 말이 되지 않았다. 남편과 몸을 섞은 기억과, 임신이 되었던 걸로 추정되는 때와는 대략 두어 달 가량 차이가 있었다. 한두 달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정확히 남편과 잠자리에 들기 한두 달 전, 있었던 거다. 썸씽이. 그러니까 낮에 만난 그 남자와.

 남자는 대학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남편도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력 나쁜 남자라도 결혼식 날, 신부에게 유난히 사근사근히 대하던 남자 얼굴까지 기억 못하랴. 게다가 두 사람은 명함도 교환했고, 결혼 후에도 한 번인가 의기투합해 밤새 술을 마시다 떡이 되어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남편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고.

 상대 남자는 친절했고 자상한데다 매력까지 있었다. 자기 여자 친구도 아닌 여자를 위해 일부러 차를 태워 주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게 마음이 있네, 없네 하지 않아서, 나도 맘 편히 따라줄 수 있는 그런 상대였다. 상대에게 부담스럽게 대해지는 거, 딱 잘라 말해 질색이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 신랑도 이상적인 남편이었다. 부부긴 해도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이, 상대에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뭐, 내가 자기애를 배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거지.

 그랬다. 남편이 자기애라고 생각하는 뱃속 아긴, 사실은 딴 남자 애였다. 상대는 낮에 만난 그 남자. 우연히도 남자는 남편과 혈액형이 같았다. 유전자검사라도 해보지 않는 한, 남편은 죽을 때까지 자기애로 알고 이 애를 키울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아무리 봐도 자기를 닮은 구석 없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발가락 모양이 자기와 닮았다'며 자기위안하게 될지도.

 어찌되건 무슨 상관이겠어. 그는 아이 아버지는 아니지만, 평생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또 나를 위해서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현관으로부터 한여름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올 여름은 뭐가 이리도 더운지,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기온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공기에 짓눌려 한동안 멍하게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집에서 일부러 나온 걸 후회하게 될 지경이다.

 "뭐해, 안 나오고."

 남편이 채근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왔다. 계단을 다 내려와 남편과 헤어진 후, 구석진 분리수거함까지 천천히 걸었다. 두 사람이 사는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많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편이 불안하고 불편했던 건 몸 안팎에서 짓눌러오는 무언가 탓이었을 것이다. 그 무언가가 과거이건 미래건, 실감이건 허상이건 간에.

 그 때문이었다. 분리수거함에 다가갔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


 "꺅!"


 깜짝 놀라 내가 비명을 지르자, 그 시커먼 덩어리도 흠칫 놀라 허둥댄다. 고양이 따위는 분명 아니다. 그건 분명 사람이었다. 남자라고 생각한 건, 그 시커먼 것이 제법 덩치가 컸던 탓이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지만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근처에 있던 가로등이 얼마 전 나간 채 그대로였다.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상황에서, 남자가 괜찮냐고 한 마디만 했더라도 나는 적잖이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예상 밖으로 팔로 얼굴을 가리고 구석진 분리수거통 앞에서 내 쪽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비켜서려 했지만 무거운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남자가 세게 밀치고 지나간 탓에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밀려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욱……."


 바닥에 부딪친 순간, 곧바로 온 몸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넘어지면서 무심코 땅을 짚었던 왼팔이 비명을 질렀고 등도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무엇보다도 배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보! 괜찮아? 피가 나잖아!"


 언제 왔는지 남편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곧바로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듯하다.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 줄을 간신히 붙들어 잡았다.


=========================================

  <생일 축하해...> 두번째 화입니다.
 아직은 전조 정도뿐이란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후반부는 진행이 빨라서 다음 한 화 내에 완결이 될 것 같네요.

 마지막 부분은 27일 수요일에 올리겠습니다. 재미있게 보실 수 있으셨다면 좋겠네요^^;
?
  • profile
    클레어^^ 2011.04.24 02:07

    헉... 섬뜩하네요...;

    그 정체불명의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설마 낮의 그 내연남?

    TV에서 카드 영수증 이야기 할 때부터 약간 섬찟했습니다.

  • profile
    윤주[尹主] 2011.04.24 06:18

     그렇게 읽어주셨다니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공포물인데 공포물답지 않단 생각이 들어서, 살짝 고민했었거든요. 하지만 결말 때문에라도, 그냥 공포물로 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 올라올 결말부분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이제껏 올린 내용들이 충분히 얽혀들어가는 이야기가 되도록 검토하는 중이랍니다;

  • ?
    Roci 2011.04.24 06:43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생각 했어요. 이후의 이야기를...

    나름 다음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면 재밌을까?

    어떤식으로 진행될까?

    상상하면서 읽으면 상당히 재밌어 지거든요. ^^

    '생일 축하해, 우리아가' 처럼 독자에게 상상의 문을

    열어 주는 글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습니다. ㅎㅎ

    다음화 기대하고 있어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4.24 07:17

     상상의 문을 열어 준다, 그렇게 쓰고 있는 걸까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 올려주시는 이야기 보면서 뒷 얘기 생각해보는 걸 좋아해요. 아직 그다지 풍부하게 상상하지 못하지만서도;;;


     다음 주 결말이 기대하신 만큼 좋을지 모르겠네요. 그 때는 또 조언 부탁드립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3260 단군호녀 27화 2 ♀미니♂ban 2011.05.02 629 1
3259 시크릿Secret (23) - Ch. 8 속죄 4 윤주[尹主] 2011.05.02 709 1
3258 노래방 그대 모습은 장미 - 김범수 2 테시우스 2011.05.01 1968 1
3257 G1-여신강림-만남.Part final 2 XatraLeithian 2011.04.29 452 1
3256 Lady Dragon Knight (5) 3 윤주[尹主] 2011.04.29 583 1
3255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별의 이야기 Side A - 4. 중간고사와 소풍 / 못 말리는 반장들 2 클레어^^ 2011.04.29 439 1
3254 던전 크롤(6) 1 백수묵시록 2011.04.28 538 1
3253 생일 축하해, 우리 아가 (3) 2 윤주[尹主] 2011.04.27 588 0
3252 [이번엔 도혁이 중심입니다 ㅠㅠ]별의 이야기 Side A - 3. 행복이 계속되길.../인기 많네... 2 클레어^^ 2011.04.26 419 1
3251 <시크릿Secret>, 5월 1일부터 연재 재개!! 윤주[尹主] 2011.04.26 1731 0
3250 Lady Dragon Knight (4) 4 윤주[尹主] 2011.04.25 521 0
3249 [꼴초에 관음녀에 정신 나간 변태녀] 4 Roci 2011.04.25 1166 1
3248 에스포와르(espoir) 3 샌슨 2011.04.24 646 1
3247 [쌀 사러 가요.]-단편 4 Roci 2011.04.24 666 1
» 생일 축하해, 우리 아가 (2) 4 윤주[尹主] 2011.04.23 588 1
3245 잊을 수 없는 것 1 네이키드 2011.04.22 777 1
3244 [컬러가 있는 소설]별의 이야기 Side A - 2. 첫 주말 4 클레어^^ 2011.04.22 508 1
3243 『맛보기』횡단보도 4 ♀미니♂ban 2011.04.22 562 2
3242 백수일기 하얀송이™ 2011.04.22 658 0
3241 그녀에게 네이키드 2011.04.21 735 0
Board Pagination Prev 1 ...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