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3 20:22

[UNDEAD] 3. 되찾은 미소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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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AD] 3. 되찾은 미소 - 4

 

 

 

 엘헤미아의 서해안에는 세 개의 무역항이 있다. 그 중 담당하는 해역 및
규모가 가장 큰 펠튼 항구는 수도 엘파하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
다. 펠튼 항구는 자체적으로 잡아들이는 해산물 의외에도 위쪽에 위치한
두 무역항을 통해 루이즈번에서 들어오는 귀한 물자를 수도로 유통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펠튼 항구 전체에 만연한 활기찬 모습은 그만큼의
부를 취급한다는 상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항구도 마찬가지겠
지만 펠튼 역시 눈부시게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사람들로 하
여금 절로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게다가 비가 그친 후의 햇살은 더욱 찬
란하다. 말 그대로 멋진 항구도시였다.
 바다.
 바다는 가늠키 어려운 깊이와 넓이로 인해 많은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바다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같
지 않다. 매일 같이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바다는 보는 이에게 언제나 다
른 느낌을 선사하며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한없이 처량함을
자아내다가도 존중해주고 싶은 고요함을 고집하기도 한다. 성난 파도처럼
꾸짖기도, 때론 부드럽게 매만져주기도 한다. 매일같이 바다를 보며 살아
가는 이들은 그렇게 바다를 닮아간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기 넘치는 모
습과 역동적인 생명력을 굳이 파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펠
튼 항구의 사람들은 그런 바다의 성질을 닮았다. 
 그들은 잔잔하다. 하지만 매섭다.
 십인장 루더가 관리하는 자유의 기사단은 그 색깔을 더욱 더 짙게 닮은
이들이었다. 구릿빛으로 탄 피부의 건장한 팔뚝.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들의 영혼은 참으로 자유로워 보인다. 바다의 짠 내가 가득 베인 그들
은 강인하며 깊이 있는 해학이 넘친다. 그들은 익살스럽지만 가볍지는 않
다. 그들은 자주 무료함을 달래지만 나태하지는 않다. 그런 그들이 현재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을 시간대에 성난 파도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담
력 있는 시민들조차 그들 곁에 다가가기를 주저할 정도로 날카로운 상태
였다. 평소에 장난스런 모습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그들은 가장 빠른 시
간 안에 최소한의 노력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인 것
이다. 루더 소속 제 5기사단장 발보프는 마법에 걸린 여인처럼 예민해졌
다는 것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기사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모두들 알고 있는가? 그들은 반드시 항구로 온다! 유켈만 항구로 갈 
수도 있겠지만 거리상 이 곳 펠튼을 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한다.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마라!”

 

 “옛!”

 

 “가장 큰 파도가 오기 이전에 바다처럼 잔잔해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보다 격렬해라!”

 

 “회항해오는 배에게 던지듯 적에게 경의를 표해라!”

 

 “밀려오는 해일처럼 모든 것을 격퇴하는 우리는!”

 

 “자유의 기사단!”

 

 “정의와 바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섬멸하는 그 날까지!”

 

 수도에 있는 엘파하 기사단의 명성을 모르는 이가 없기에 자유의 기사단
은 상대적으로 눈길이 덜 갈 수 밖에 없었다. 해안선을 지키느라 북방정
벌 때도 병력차출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실전경험이 거의 없다는 뜻이고,
전선에 나가지 않으면 전설을 만들 기회도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當然之
事). 날 소문이 없는 기사단의 명성이 어찌 높겠는가. 하지만 뚜껑을 열었
을 때도 마찬가지일까? 물론 아니다. 바닷가의 모래를 밟으며 훈련된 기
사들의 체력은 무척이나 강인했고 그들의 검술은 엘헤미아 내에서도 짝을
찾기 어려울 만큼 독특한 것이었다. 루더는 본인의 실력보다는 스승의 자
질이 더 큰 편이었고, 그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검술은 자유의 기사단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풍으로 인해 철제무기를 관리하기 까다롭다는 이
유 때문에 자유의 기사단에겐 기름칠을 많이 한 철제 무기와 목검 한 자
루가 주어졌는데 그들 대부분은 목검을 더 선호했다. 루더는 그 점을 착
안해 바다라는 환경에 최적화 된 파검술(波劍術)을 개발해냈다. 파검술은
검법이라고 보기에는 무척이나 가벼운 면이 있었지만 대신 훨씬 신속하고
예리했다.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두 자루의 무기를 유심히 관찰하던 피트
가 말했다.

 

 “제법 분위기가 팽팽한데요?”

 

 사람들이 붐비는 대로의 한 건물 위에서 피트가 여유롭게 기사단의 순찰
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단장이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원들 대부분이 평소완 다르게 눈에 띄지 않는 평복으로 갈아입은 상태
였는데 항상 검은색 후드로 모든 것을 가리고 있던 단장의 변화가 유독
눈에 띄었다. 깔끔한 정복에 하얀 장갑을 낀 그의 모습은 말끔한 신사와
다름없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린은 홀린 듯 쳐다보았다. 단장은
피트의 표현을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했다.

 

 “노병이 제법 병사들을 관리하는 재주가 있군.”

 

 인실롭의 예상대로 단원들은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항구 안으로 들어
와 있었다. 물론 문지기들은 그들이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건물의 지붕
위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편하게 수면을 취한 그들은 동이 틈과
동시에 일어났고 지금까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린이 단장 옆에 앉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당장 배를 타야 되는 거 아냐?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아직도 뒤통수에
는 적이 쫓아오고 있는데.”

 

 “린. 알고 있잖아요. 엘로린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잖아요.”

 

 피트의 말을 듣던 린이 팔짱을 끼곤 불만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맘에 안 들어. 엘로린은 너무 순해 빠졌어. 당장이라도 두들겨 패야
정상 아냐? 나는 그래서 엘로린이 펠튼으로 오자고 하는 건줄 알았는데
말이야.”

 

 단장은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치 조용히 무언가를 질문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단장의 사유는 길지 않았고 바로 명령을 내렸다.

 

 “엘로린이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린다.”

 

 

 


 펠튼 항구 외진 곳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작은 언덕. 산책하기
에는 멀고 운동하기에는 가까운 그런 애매한 위치에 있는 그림 같은 언덕
에는 마찬가지로 그림 같은 바다가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언덕에는 강아지를 묻어놓은 것 같은 작은 무덤이 있었다. 무덤인지도 모
르고 지나쳐갈 만큼 작은 무덤이었다. 그 곳에서 엘로린은 서럽게 통곡하
고 있었다. 로한은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쓸쓸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이
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아서 머리만 벅벅 긁을 뿐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스캇도 나무에 기대어 묵묵히 하늘만 쳐다볼 뿐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 엘로린과 로한은 동갑으로 둘 다 23살이었다. 단원들
사이에서는 제법 연장자에 속하는 그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엘로린이 유
부녀가 어울리는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이까지 낳은 경
험이 있는 여자였다.
 엘로린은 우아한 외모 때문에 자주 오해받지만 귀족이 아니었다. 펠튼
항구에서 태어난 평범한 배경을 갖춘 그녀는 3류 귀족가문 중 하나인 멜
버크 가의 차남 하겔에 눈에 띄었다. 가문의 위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 하겔의 첫 번째 부인은 성격이 괄괄했고 괴팍했다. 그런 그
에게 엘로린의 우아한 자태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다가왔고 그래서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삼았다. 수많은 평민들
이 그녀의 출세를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멜버크 가
문은 물론 다른 귀족 가문들이 그 일을 곱게 볼 리가 없는데다 사람은 차
려 입는 겉모습이 달라진다고 해서 속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갑자기 달
라진 생활은 엘로린에게 너무나 벅찼다. 특히 외모는 귀족처럼 보였지만
귀족의 예법을 전혀 몰랐기에,

 

 ‘아니, 어떻게 귀족이 저런 천한!’

 

 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반응을 낳은 것이다. 그러다 귀족 가문 출신이 아
닌 게 밝혀지면 그보다 더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로린을 첩으로 받아들인 이후 첫 번째 부인이 엘로린 때문에 파혼을 하
자고 주장하면서 그들 가문은 더 큰 혼란을 맞고 말았다. 결국 하겔의 아
버지이자 가문의 수장인 멜버크 유겔은 가문의 골칫덩이가 되어버린 하겔
과 엘로린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했다. 

 

 ‘저는 귀족이 어울리지 않아요. 하겔님.’

 

 그는 엘로린을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다.

 

 ‘엘로린, 당신과 함께라면 세상의 모든 시선과 가문의 속박도 견딜 수
있소.’

 

 엘로린은 바다 같이 깊은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공간과 시간
에 구속받지 않는 사랑을 약속했다. 그녀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하겔의 사랑은 세상을 넘지 못했다. 유겔은 모든 
원인을 자신의 아들을 유혹한 마녀 엘로린에게로 돌렸다.

 

 ‘이걸 받고 조용한데로 당장 사라져라.’

 

 건네받은 것은 거액의 돈이었다. 그녀는 자존심마저 모두 능멸당한 채
멜버크 가에서 버려졌다. 그녀가 바란 건 남편의 따스한 사랑 밖에 없었
는데……. 하겔은 결국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을 선택했고 엘로린을 버렸다.
그때 그녀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남편의 사랑도 아이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평생 사랑한
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 아이를 낳았다. 엘로린은 남편의 사랑이 절실했다.
그녀의 아이도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다. 엘로린은 그 아이를 데리고 돌
아가면 귀족 가에 다시 받아들여질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녀는
그만큼 순수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품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졌
다. 애물단지라는 표현으로도 묘사가 불가능한 엘로린을 쳐다보는 멜버크
가의 눈빛은 경멸 보다 더한 경멸이었다. 하겔은 겨우 부인을 달래고 있
는 입장에서 갑자기 나타난 엘로린과 아이를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그들
의 선택은 잔인한 것이었다. 아이는 엘로린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집되는 언데드 프로젝트에 팔렸다. 가문의 독이 되는 여자는 그
렇게 멜버크 가에서 삭제됐다. 최후의 목격자에 의하면 그녀는 아이의 무
덤을 스스로 만들고 그곳에서 미친 듯이 통곡했다고 한다. 얼핏 보면 실
성한 여자처럼 보였는데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애타게 불렀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녀가 겪은 가혹한 진실이었다.
 로한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현실에 침을 뱉었다.
그녀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역겨움이 쉬 가시
지 않았다. 로한은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는 서럽게 울고 있는 그녀를 붙잡고 끌어안았다.

 

 “울지 마.”

 

 로한 그 스스로도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다. 엘로린은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바보처럼 울지 마. 왜 멍청하게 당하고만 사는 거야?”

 

 로한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눈을 마주쳤다. 태양보다 더 뜨거운 눈
이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로한은 말없이 일어섰다. 엘로린은 눈물이 그
득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로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자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남자는 피눈물을
흘려도 모자라.”

 

 로한은 언덕 밑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로한?”

 

 로한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스캇에게 말했다.

 

 “그녀를 지켜줘.”

 

 스캇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은 빙긋 웃었다. 불의 꽃이 움직였다.

 

 “맘에 드는군. 가자.”

 

 린이 물었다.

 

 “어디로?”

 

 “그녀가 빼앗긴 미소를 다시 훔치러.”

 

 

 


 멜버크 가는 비 개인 후 맑음이라는 날씨를 즐길 줄 아는 고상한(척 하
는) 귀족 가문이었다. 비록 서열이 낮은 귀족이라 해도 티타임 정도는 즐
겨줘야 귀족의 체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던 평화로운 정오
는 격렬한 불길과 함께 문이 부셔지면서 같이 박살났다.

 

 “뭐, 뭐야?”

 

 화염보다 더 격렬하게 타오르는 이가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장
에 실내가 후끈하게 달아올랐고 1층 로비 곳곳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멜
버크 가의 장남 안겔은 급작스런 이 상황에 아연실색했다. 로한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보다 더 강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물었다.

 

 “하겔은 어디 있나?”

 

 “누구냐? 너는!”

 

 안겔은 즉시 훈제구이가 되었다. 물론 단장의 뜻을 거스를 생각이 없었
던 로한은 그를 죽일 정도로 태우지는 않았다. 본보기로 그를 구워버린
로한은 옆에 있는 하인에게 재차 질문했다.

 

 “두 번 안 묻는다. 하겔은 어디 있나?”

 

 “2, 2층! 2층 휴게실에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야, 썅. 내가 말하면 아냐? 안내해야 될 거 아냐!”

 

 서슬 퍼런 로한의 벽력같은 호통에 하인은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오
줌을 지렸다. 그리고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로한
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바깥에
서 소란을 듣고 멜버크 가의 사병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3류 귀족
이라 그런지 굉장히 적은 인원수였다. 그들은 침입자인 로한에게 즉시 돌
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로한이 아닌 1층 천장으로 돌격하고 말았다.
로한은 슬며시 뒤돌아보다 다시 앞을 보았다.

 

 “도와줄 필요 없는데.”

 

 로한은 사병들에게 망치세례를 퍼붓는 매튜를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가
기 시작했다. 매튜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목청을 자랑했다.

 

 “맘에 들어! 맘에 들어! 난동 피우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 역시 단장은
화끈한 데가 있다니까!”

 

 슬며시 걸어 들어온 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이래도 되는가 모르겠네요. 시간이 없는데. 아아악!”

 

 린은 피트의 볼을 꼬집었다.

 

 “여자를 울리는 게 너 같이 계산적인 남자들이야! 피트! 안 닥쳐?”

 

 “왜, 저를……!”

 

 린은 피트를 걷어차 주곤 매튜를 향해 걸어 나갔다.

 

 “엘로린이 울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나설 이유는 충분해.”

 

 린은 매튜와 함께 분탕질을 하러 갔고 남겨진 세이지가 피트를 향해 고
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단장은?”

 

 피트는 빙긋 웃으며 세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실 일이 있으시데요.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요.”

 

 

 


 엘로린은 언덕 위에서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모두에게 텔레파
시를 날렸다.

 

 -제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에요. 당장 멈춰요. 저로 인해 여러분이 위
험해지는 건 싫어요.

 

 당장 멜버크 가로 달려가려던 그녀를 묵묵히 하늘만 보던 스캇이 막아섰
다. 그의 눈빛은 잔잔했다. 폭풍 속에 고요 같은 눈빛이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나?”

 

 그 말이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뭐라고요?”

 

 “아직도 그를 사랑 하냐고. 당신과 아이를 버린 남자를.”

 

 엘로린의 눈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스캇은 멈추지 않았다.

 

 “엘로린. 네가 무엇 때문에 펠튼 항구로 오길 고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를 정리하기 위함이란 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너는, 아니 너 스스로
는 과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 이건 동료에게 상처를 준 이에
대한 초승달의 의지다. 넌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어. 더 이상 눈물을 흘
리지 마. 네 아이에게 흘릴 가장 값진 눈물은 이미 흘렸어.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마. 당당히 남은 삶을 가져 가. 그건 네 몫이야.”

 

 스캇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로린은 그 손을 멍하게 바라볼 수 밖
에 없었다. 스캇은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가자. 당당히 네 과거를 맞이하러.”

 

 

 


 하겔은 휴게실이 전부 불타버리는 것에 끔찍한 심정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염의 기사는 끔찍함을 넘어 그냥 졸도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히힉! 누, 누구인가? 자네는?”

 

 “로한. 하겔?”

 

 “뭐?”

 

 “네가 하겔이냐고.”

 

 “그, 그래. 자네는 누구인가?”

 

 “로한. 엘로린을 아나?”

 

 아마 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도 로한의 화법을 따라가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뭐, 뭐?”

 

 “이 가문은 다 귀가 병신인가. 유전이냐? 엘로린을 아냐고!”

 

 “에, 엘로린? 자네가 그녀를 어떻게 아나?”

 

 그 즉시 그의 코가 박살났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코를 어루만졌
다. 코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이, 이익! 이 미친! 아악! 아파! 대체 넌 뭐야!”

 

 “로한. 그녀를 사랑했나?”

 

 하겔은 기가 막힌 이 상황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미친 소리야!!”

 

 “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냐는 소리다!”

 

 하겔은 악에 받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익. 대체 몇 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군! 난 이미
그녀를 잊었어! 걔 때문에 내가 받은 비난만 해도 충분해. 내 아이까지
데리고 올 땐 정말 기절할 뻔 했어. 뭐 때문에 이제 와서 내가 그녀 때문
에 맞아야 되는 건데! 너 대체 뭐냐? 너도 걔한테 홀린 새끼인가 본데 조
심하는 게 좋아. 걔가 얌전하긴 해도 좀 멍청하거든? 어느 가문인지는 모
르겠다만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로한은 분노로 온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몰골이 된 그의 모습은 저승에서 내리는 사형선고처럼 보였다. 하겔은 겁
에 질려 딸꾹질을 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녀가 어떻다고?”

 

 로한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딱 그만큼 하겔은 뒤로 기어갔다.

 

 “한 여자에게 자신의 분신을 심었어. 넌 아버지라고! 그게 아버지가 할
소리야? 한 여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나서 할 소리야? 넌 엘로린을
선택했잖아!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알잖아! 세상에서 그만큼 사랑받기 합
당한 여자도 드물어!”

 

 로한은 자신의 과거를 되새겼다. 수치심에 온몸이 떨려왔다.

 

 “지켜주지도, 책임지지도 못했으면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지는 못할망정
그녀를 탓해? 더러운 놈.”

 

 로한은 하겔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매튜와 린은 미친 소의 기세로 1층 로비를 휘젓고 다녔다. 덩치만 줄여
서 본다면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피해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장대한 분탕질로 인해 이미 사병은 전부다 쓰러져 있었고
로비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있었다. 대략적인 상황정리. 그들은 현관
문을 쳐다보았다. 스캇이 엘로린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스캇은 2층에
서 1층 로비로 이어지는 계단을 쳐다보았다. 로한이 하겔을 잡아끌고 내
려오고 있었다. 엘로린의 눈이 떨렸다. 로한은 엘로린 앞에 까지 걸어온
다음 그를 집어던졌다. 하겔이 그녀에게 기어와 구걸하기 시작했다.

 

 “에, 엘로린? 정말 엘로린이야? 헉헉! 사, 살려줘. 이 미친 녀석들이 날
죽이려 들어.”

 

 로한은 그를 윽박질렀다.

 

 “그녀에게 사과해!”

 

 그는 몸을 굽실거리며 엘로린에 다리를 붙잡고는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헐떡거렸다.

 

 “미, 미안해. 엘로린. 헉헉! 미안해! 정말! 제발 살려줘.”

 

 엘로린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피트가 바깥을
쳐다보더니 슬며시 말했다.

 

 “자유의 기사단이 오고 있습니다. 슬슬 움직여야겠어요.”

 

 “피트. 넌 머리는 좋은데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게 흠이야.”

 

 린은 톡 쏘아주었고 피트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엘로린은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그리곤 하겔에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
겔 역시 헐떡거리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하겔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슬프다기보다는 마치 시를 읊는 것처
럼 아득하게 들렸다.

 

 “하겔. 역시 저는 귀족이 어울리지 않았어요. 저에게 꿈같은 시간을 주
었던 거 감사해요. 비록 우리 끝은 그렇게 끝났었지만 그때의 시간은 제
인생에 참 의미 있던 시간들이었어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건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한 거예요. 결국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남자를 저는
사랑했네요.”

 

 그녀는 일어섰다. 수심이 가득했지만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
굴에는 분명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 아이를 잃었어요. 어머니로서 그보다 큰 아픔은 없어요. 그 상처는
평생을 가도 못 지울 거예요. 하지만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거예요.
제가 가장 인간다웠던 순간들이었으니까.”

 

 엘로린은 모두를 주욱 둘러보았다.

 

 “저는 그로 인해 많은 걸 잃었지만 저의 슬픔을 공유해줄 좋은 사람들
을 만났어요. 제가 고집을 많이 부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련하게 굴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다들. 저 때문에 폐가 많았군요.”

 

 로한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동료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세이지가 웃음 지으며 엘로린에게 다가왔다.

 

 “엘로린. 이제 미소는 네 거야.”

 

 엘로린은 화사하게 웃었다. 봄이 온 정원에 피어있는 꽃 같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다시 안 뺏기도록 조심해야겠네요.”

 


==================================================================
 컴퓨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쯤 챕터 마지막
화를 연이어서 올리려고요. 기대해주시길.

 

 다른 동료들에 비해 엘로린의 과거편은 훨씬 세부적으로 묘사가 되었습
니다. 전투의 비중이 적은 캐릭터인 만큼 묘사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좀 더 부각시키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주인공이 동료를 하나둘 모아가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
개되기에 캐릭터 하나하나를 독자들에게 인지시키는데 큰 무리가 없는 반
면, 언데드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현원달 8명이 동시에 나오니 그 생명력
불어넣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닙니다. 뭐 실력 없는 저를 탓해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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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욀슨 2012.08.27 20:59
    아이고, 저렇게 찌질한 남자라니. 엘로린이 정말 불쌍해지는군요. 매번 분량이 아쉬워질 정도로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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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rsas 2012.08.28 00:06
    감사합니다 T.T .. 글 쓰는 힘이 나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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