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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AD] 2. 창공의 불청객 - 6

 

 

 

 궁성 에펠 지하에서 청아한 바이올린 선율이 울러 퍼졌다. 햇살이 비치
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듣는다면 무척이나 훌륭했을 법한 연주였지만 현실
은 햇빛하나 들지 않는 지하 관리실에서 연주되는 악기소리였다. 곡은 로
즐렛이 작곡한 봄바람의 미뉴에트. 천재 음악가 로즐렛이 봄의 햇살을 찬
양하기 위해 작곡한 곡으로 궁정무도회 때 자주 쓰이는 곡이었다. 연주자
는 무도회에서 궁정악단이 연주하는 것보다 더 경쾌하면서도 가볍게 연주
하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그렇게 연주했다간 경박하다는 소리를 들었겠지
만 지금 이런 칙칙한 환경에서는 오히려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
었다. 연주자의 기량은 상당했고 강약 및 호흡조절 또한 훌륭했다. 현을
타고 막힘없이 흘러가던 선율은 급작스럽게 클라이맥스로 치달았고 절정
에서 멎었다. 악기소리는 멎었지만 여운은 그보다 길게 이어졌다. 현이 파
르르 진동하는 느낌은 목뒤까지 전율을 느끼게 해줄 정도였다. 연주를 경
청하던 루즈라벤은 꾸밈없는 박수로 연주자의 기량에 화답해주었다.

 

 “배운 적이 있나 보지? 선율이 썩 좋군. 로즐렛의 가을환상곡이던가?”

 

 단정한 차림에 흑발의 머리를 올백으로 뒤로 넘긴 차분한 인상의 사내가
바이올린을 내리며 루즈라벤을 쳐다보았다.

 

 “……봄바람의 미뉴에트입니다. 십인장은 교양이 부족하군요.”

 

 “이것 봐. 분야가 다른 것뿐이라고. 내 전공은 과학기술이니까. 어쨌든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군. 심심하진 않겠어.”

 

 언데드 서열의 최고봉에 서있는 남자, 넘버 1 클로드는 바이올린을 케이
스에 집어넣었다. 앙상하게 마른 체격이었지만 이상하게 유약하다는 인상
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의 차분한 얼굴 탓일 텐데, 그의 얼굴에서는 그의
심중을 읽을 만한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글쎄요. 따분하군요. 이런 칙칙한 곳에서 연주해봐야 영 흥이 안 나서.”

 

 클로드는 자신의 침대에 앉으며 루즈라벤을 쳐다보았다. 결코 창조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루즈라벤은 개의치 않으며 준비했던 말을 꺼
내었다.

 

 “얼마 안 있으면 너희들이 공식적으로 표면에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
어. 그래서 궁성 내에 약속한 자네의 방을 준비 중이야. 클로드.”

 

 클로드는 자신의 방을 구석구석 살피며 마치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
처럼 읊조렸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으로 해주세요. 도시보다는 자연
풍경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하며 하루를 보
내기엔 그만인 풍경이면 되요.”

 

 루즈라벤은 비릿하게 웃었다.

 

 “이것 봐. 너희들은 전투 병기야. 너는 그 중에 최고고. 안 어울리는 말
은 좀 안 했으면 좋겠는 걸.”

 

 “그 쪽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난 나예요. 할 일만 잘하면 개인시간에 뭘
하든지는 자유 아닌가요?”

 

 루즈라벤은 벽에 기대며 양팔을 으쓱해 보였다.

 

 “그래, 뭐. 그렇지. 이제 궁성 내에 너희들이 살게 될 궁을 아예 따로
배정해 줄 생각이다. 이름은 무생궁(無生宮)이 어떨까? 너희들 10명이 알
아서 나눠 가지라고. 아, 로한이 빠졌으니 9명이로군. 그 곳에서 최고의
명당은 네 몫이다.”

 

 클로드는 비위가 상하는 걸 느꼈다. 무생궁이라. 잘도 끼어 맞추는군.

 

 “통이 크군요. 언데드가 수도에서 그 난동을 부렸는데 그런 짓을 했다
간 반발이 심할 텐데요. 뭐, 세이건 씨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러다 정말
우리들이 다 도주하기라도 하면 어떡할래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그’가 있는 한 너희들은 결코 도주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클로드는 가볍게 조소했다.

 

 “하하, ‘구속자’ 말인가요? 이번 사태도 그가 있었지만 터진 거 아니
었나요?”

 

 “한 번 당했으니 더 철저히 감시하면 되지.”

 

 “뭐, 적절한 해결책이네요. 확실히 십인장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군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클로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애초에 발락 대신 ‘그’를 보내지 그랬어요? 아니면 저를 보내는 편
이 더 확실했을 텐데요.”

 

 루즈라벤은 팔짱을 끼며 클로드의 말에 답했다.

 

 “이것 봐. ‘그’는 자네들 상대하기에도 벅차. 그리고 발락을 무시하는
거야? 다수와의 싸움이라면 너보다도 우월한 녀석이야.”

 

 “발락은 어려요. 당신은 또 튜더 씨한테 욕먹을 걸요.”

 

 루즈라벤이 꿈틀했다.

 

 “지금 발락이 실패할 거라고 말한 건가?”

 

 클로드는 빙긋 웃었다.

 

 “얼마나 큰 효과를 나타낼지 ‘실험’이나 하는 루즈라벤 씨라면 잘 모
를 수도 있겠네요. 저였다면 전투력을 따지기 보다는 다른 요소들을 더
활용했을 겁니다. 튜더 씨가 다른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특별히 두 번째
추격자를 보내라고 지시한 건 그만큼 신중 하라는 뜻이었어요. 발락의 전
투력은 우수하죠. 인정해요. 하지만 그 불완전한 미숙함이 일을 그르칠 거
예요. 발락은 전쟁터에서 저보다도 우수한 성적을 내겠지만, 이번 일에서
는 저를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겁니다.”

 

 루즈라벤은 이를 갈며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을 받아내는
클로드의 얼굴은 온화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저희들을 만들었다고 우월감에 젖어 있지 마세요. 그러다 이번처럼 뒤
통수를 맞은 거니까. 당신들의 체스말로 이용되기에는 언데드는 너무 강
합니다.”

 

 

 


 튜더는 악살라스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노인네와 중년의 남
자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풍경이 썩 아름답지는 않았다. 튜더는 악살
라스에게 차분한 음색으로 질문했다. 클로드가 루즈라벤의 속을 들들 볶
고 있는 같은 시점에 튜더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반항룡의 전투력은 분명 인정하는 바야. 악살라스. 하지만 역시 조금
불안해. 클로드를 보내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악살라스는 다소 징그럽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튜더의 질문에 답했다.

 

 “보좌관. 세상에 완벽한 계획과 전략이라는 건 없어. 넘버 1 클로드를
보냈으면 그걸 보낸 대로 또 걱정을 했을 걸세. 발락은 그 능력만으로 따
지면 현월단 전부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우월하네. 그럼에도
실패한다면 천운(天運)의 문제이지, 계획이 부실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하
네.”

 

 튜더는 차를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실패할 일이면 무슨 짓을 해도 실패할 거란 뜻인가?”

 

 “계획에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건 분명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항상 우리 뜻대로 돌아가던가? 그랬다면 루이즈번은 진작 우
리 땅이 되었겠지. 이미 진행되어 버린 일에 미련을 두지는 말게.”

 

 튜더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실패하면 각하께 무슨 면목이 있겠나.”

 

 “어차피 이번 일은 나랑 루즈라벤이 일임한 거라네. 실패해도 책임은
우리 측에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그리고 정말 발락이 실패한다 해
도 그로 인해 발락은 좋은 경험을 하게 된 거야. 저돌적이고 답 없는 성
격도 좀 고쳐야지.”

 

 악살라스는 더 없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조금 딱딱해진 분위기
를 바꾸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궁성 하나를 언데드들에게 제공한다는 거, 사실인가?”

 

 “사실이네. 각하께서 국왕 폐하께 건의하셨고 허가도 받았지. 단 서열
10위권만. 로한이 빠져 9명이지. 인원이 적으니 소궁(小宮)이네.”

 

 “어제 테러가 있었는데 그게 가능한가? 귀족원에서 반발이 거셌을 텐데.”

 

 “항상 있는 일이지 않나.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탁상공론(卓上空
論)자들. 뭐, 여러 가지 이유로 잠재웠지. 각하가 건의한 건 훨씬 이전부
터고 허가도 예전부터 받았었네. 다만 언데드를 어떻게 공개하느냐가 문
제였지. 알다시피 거짓이지만 공식적인 언데드에 대한 공표는 이미 끝낸
상태일세. 이참에 한꺼번에 진행시켜버리면 반발할 틈도 없겠지. 후에 지
껄이는 건 무시하면 그만이고.”

 

 “언데드가 표면에 나타나는 것도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군. 신의 계시인
양 성전(聖戰)으로 포장해 북진하는 것도 이제는 손쉽겠어.”

 

 “모든 건 계획대로다. 유일한 걸림돌이 바로 현월단이지.”

 

 “그들의 목적이 뭔지는 알아냈나?”

 

 “추측하는 바가 있지.”

 

 악살라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튜더의 말은 더 없이 확고했다.

 

 “그들은 우리의 생산성을 타국에 팔아넘기려는 게 분명해.”

 

 “호오?”

 

 “오큐벨라스가 없으면 언데드를 만들 수 없어. 반대로 말하면 오큐벨라
스가 있으면 언데드를 만들 수 있지. 우린 이제 3기 언데드를 만들어낼
수 없게 되었지. 그들은 더 이상 엘헤미아에 발붙이지 못하게 되었고. 그
러면 어디로 가겠나. 혹한의 땅 루이즈번 밖에 없지.”

 

 “잠깐! 그 뜻은?!”

 

 악살라스는 튜더가 제시하는 결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튜더는
악살라스의 표정을 보고 그가 이해했음을 깨달았다.

 

 “그래. 그 것이 실현 가능한지는 일단 접어두고. 우리는 언데드로 무장
한 발키리와 싸우게 될지도 몰라.”

 

 

 


 세이건은 삐딱하게 선 채로 손을 까딱거렸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고민에
빠졌다. 튜더가 악살라스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미 대장군
에게 같은 내용을 전했던 탓이다. 분명 현 시점에서 그 얘기는 가장 타당
한 결론이었다. 역시 최대한 빨리 오큐벨라스를 되찾아야 했다.

 

 “루만. 튜더와 루즈라벤, 악살라스를 불러주게.”

 

 대장군 뒤에 서있던 해결사 루만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세이건은 튜더
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대체 왜? 그들
은 어째서 오큐벨라스를 훔쳐서 타국에 건네주려는 것일까? 수도 없는 생
명을 죽여 가며 자신들을 만들어내서? 그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해주
어서? 그것만으로 꽤나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 분명한 이 일을 계획했단
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명. 단장. 분명 이 모든 해답의 키워드는
그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물론 정체까지 아무 것도 알려
진 바가 없다. 세이건은 심신이 지쳐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며 이제 고지가 코앞이거늘. 그의 행보에 더 이상 적이 없
다고 생각할 시점에 최악의 걸림돌을 만났다.

 

 “부르셨습니까?”

 

 대장군의 뒤로 보좌관과 십인장 두 명이 들어왔다. 대장군은 뒤돌아섰다.
세이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다들 보좌관의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을 걸세.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불분명한 게 많지만 그들이 오큐벨라스를 훔쳐간 것으로 인해 앞으로 일
어날 사태는 짐작되겠지.”

 

 “걱정 마십시오. 발락이 갔지 않습니까. 오큐벨라스는 돌아올 것입니다.”

 

 대장군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악살라스와 루즈라벤을 강렬
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살기를 내뿜을 기세였다.

 

 “자네들에게 실망하고 있다는 점을 숨길 수가 없어 유감이네.”

 

 “예?”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세이건을 쳐다보았다. 세이건은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들을 선발하고 그 정도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건 자네들이 그
만큼 결실을 맺으라는 의미였어. 그 자리에 안주하며 받는 것만 누리라는
뜻이 아니란 말일세.”

 

 튜더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려하던 일이 터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루즈라벤과 악살라스는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사형선고와도 같은 대장군
의 말을 기다렸다. 대장군의 말은 짧았지만 그 느낌은 칼날을 씹어뱉는 
것 같았다.

 

 “발락이 실패했네.”

 

 

 


 인실롭은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건너온 발락을 노려보았다. 언데드라는 녀
석들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것들이야! 인실롭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
다. 분노로 가든 찬 인실롭의 언성은 불같았다.

 

 “대체 왜 이토록 독단적인 짓을 했지! 멍청한 녀석!”

 

 발락은 인실롭의 폭언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반항룡이라도 자고 있는 상황에서까지 반항하기는 어려운 모양이
다. 인실롭은 반응 없는 상대에게 더 이상 화풀이도 하지 못했다. 클라보
는 한숨을 쉬었다.

 

 “리더스카이가 처음부터 우리를, 아니 인실롭 씨만이라도 옮겼다면 분
명 다 끝날 일이었을 텐데. 정말 저능하군요.”

 

 인실롭은 진이 다 빠져있는 리더스카이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클라보의
시력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다 들었기 때문이다. 인실롭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리더스카이를 탄 발락이 엘몬데드 협곡을 넘
어갈 때만해도 그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판단했다. 리더스카이가 발
락을 내려준 후, 자신까지 건너편으로 옮겼다면 임무는 오늘로 종결되었
을 것이다. 하지만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패인은 발락이었다.
 발락은 최고의 기동력을 갖춘 리더스카이를 스스로 버렸다. 그리고는 단
신으로 현월단과 싸웠다. 물론 그의 전투력은 수면도 취하지 못해 더 이
상 능력을 구사할 수 없는 단원들을 사로잡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인실롭은 알고 있었다. 능력을 아직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원 중
한명인 ‘피트’의 능력을. 현월단의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피트는 넘버
가 26밖에 되지 않는 전투력이 낮은 인물이지만 능력은 그렇지 않았다.
피트의 능력은 방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붙는다면 십인장이라 해도
얼마든지 승패를 뒤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피트의 능력은 강제수면. 나비
의 날개처럼 손에서 ‘강제적인 수면에 빠지게 만드는 분말’을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수한테 동시에 쓸 수도 없고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자와 직접 접촉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한번 성공하면 고래조
차 잠재우는 막강한 능력이었다. 리더스카이가 정신을 차려 제때 발락을
잡고 도망쳐오지 않았더라면 발락은 지금쯤 단원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
다. 그를 데리고 온 리더스카이는 정신적인 탈진 상태였다. 몬반 역시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리더스카이가 있으니 한 명씩 넘어가면 되겠군. 추적을 계속하는 수밖
에.”

 

 리더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죠는 어졔 축졔 때, 루즈라벤 님이 지속젹인 비행훈련을 시켜서 이졔
한계에요. 수면하기 죤까진 더 이상 날 수 없어요.”

 

 인실롭은 더 이상 조류로 변할 수 없는 리더스카이를 보며 허탈한 표정
을 지었다. 날지 못하는 그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클라보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생각했다.

 

 “적들도 수면을 취해야 하니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방향이
애매하군요.”

 

 인실롭은 한숨을 쉬다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머리가 복잡했다. 숱하게 많
은 난관을 넘고, 자신에게 기량을 뽐내는 많은 적들을 베어 넘기며 지금
까지 걸어왔다. 하지만 이번만큼 자신을 당혹스럽게 하는 적은 정말 오랜
만이었다. 인실롭은 무의식적으로 턱의 흉터를 더듬었다. 자신의 턱에 흉
터를 남긴 자 역시 그런 적이었다.

 

 ‘발키리…….’

 

 루이나 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그녀는 천사 같은 외모와 달리 자신에게 잊
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를 선물해 주었다. 하이막스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믿던 그가 여자하고 승부를 내지 못하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그토록 강한 여자를 처음 보았다.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루이즈번에서 벌였던 그녀와의 사투, 눈처럼 빛나는 은빛
머릿결에 붉은 갑옷. 엘헤미아와 달리 세파(細波)로 이루어진 찌르기 위
주의 검술은 상대하기 까다로웠고 몇 번의 일격은 목숨을 잃을 뻔할 만큼
위험했다. 끝내 내지 못했던 승부는 끔찍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녀가 보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인실롭은 눈을 감았다. 갑자기
무슨 잡생각이람. 나이 먹어가는 티를 내는군. 인실롭은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잡생각을 통해 인실롭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답을 푸는데 성공했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사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을 정리해보니 드디어 알 것 같다.”

 

 클라보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죠?”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아니, 그 이상 다른 능력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
내가 봤을 때 알자로란 자의 능력은 그게 분명하다.”

 

 모두의 눈이 인실롭의 얼굴에 집중됐다. 인실롭은 확신을 담아 입을 열
었다.

 

 “알자로의 능력은……”

 

 

 


 매튜는 스캇과 같은 소수민족 출신이다. 탄광 근처에 거주하며 자신들이
캐낸 자원으로 무기를 만들어내는 전투민족 리퍼족. 그들은 그들 고유의
신앙인 탄광의 신 리퍼와 투쟁의 신 옐카를 숭배한다. 그들은 리퍼가 그
들에게 생명을 부여해준다고 믿었기에 모든 부족 원들이 한 부모(신)를
둔 가족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의 성은‘리퍼’였다. 리퍼족은 자신들이
긍지 높은 전투민족이라 생각했고 싸우다 죽으면 옐카의 품으로 돌아간다
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전사(戰死)는 최고의 명예. 실제로 그들은
소수민족들 중에서 특히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번번이 막아
내며 전투민족의 자부심을 지켰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기는 다량으로
생산되는 수도의 무기보다 훨씬 정교하고 견고한 것이어서 뛰어난 무인들
이 수소문 끝에 찾아오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리퍼족에게서 무
기를 받아내었다는 기록은 드물다. 진정한 전사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부
족에게조차도 리퍼의 무기를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하다보면 부
셔지는 경우가 많은 일반무기들과 달리 리퍼족의 무기는 관리만 잘하면
평생 동안 부셔질 일이 없는 놀라운 경도를 자랑했다. 그들에게 있어 무
기는 자신의 혼이자 평생을 같이할 반려(伴侶)였다. 부족의 전사는 죽는
다 해도 자신의 무기로 삶을 증명 받았다. 매튜가 하사받은 망치는 그 의
미가 특히나 더 깊은 것이었는데, 그의 무기 용아(龍牙)는 부족 대대로 
물려 내려져 오는 조상의 무기였다. 오랜 기간 부족을 통치하는데 뜻을
같이 해온 족장의 망치. 족장의 장남인 매튜는 성인식을 치르고 족장이
됨과 동시에 그 무기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매튜는 부족을 이끌 막중한
책임감을 어떻게 펴보기도 전에 부족 없는 족장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저항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토벌군의 숫자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괴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자신의 망치 용아에 맹세했다. 이 망치가 손에
쥐어져 있는 한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그의 존재증명은 바로 그의 무
기였다. 끓어오르는 전사의 투지를 진정시킨 것은 놀랍도록 차가운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았을 때였다.

 

 ‘싸워라. 죽을 때까지.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매 순간마다. 다만, 지금은
아냐.’

 

 매튜는 태어나서 그런 생명체는 처음 본다고 느꼈다. 전투의 신을 숭배
하는 그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자라면 이루어낼 수 있다. 이 자와
함께라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대난동을 부릴 기회를 주겠다. 날 따라와라.’

 

 대난동. 그거 좋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아스라한 기억과 함께 매
튜는 기절에서 깨어났다. 까칠한 털이 느껴졌다. 거구의 매튜를 업을 수
있는 건 변신한 스캇 밖에 없었기에 그가 매튜를 업은 채로 달리고 있었
다. 매튜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내려줘. 스캇. 이제 달릴 수 있어.”

 

 매튜는 자신의 발로 섰고 스캇은 얼른 변신을 풀었다. 단장은 매튜를 보
았다.

 

 “어떤가?”

 

 “날 뭐로 보는 거야? 다시 발락과 붙여줘도 상관없어!”

 

 “어휴, 저 근육덩어리는 일어나자마자 싸움타령이네. 얼마나 더 당해야
자기가 약하다는 걸 깨달으려나?”

 

 린은 평소처럼 매튜에게 독설을 내뱉다 당황하고 말았다. 평상시와 다르
게 매튜는 화를 내지 않고 린을 껴안아버렸다. 린의 얼굴이 목뒤까지 붉
어졌다.

 

 “뭐, 뭐야! 이 미친! 야! 내가 아무리 예뻐도 너 같은 게 날 넘보면 안
되는 거야! 대체 왜 이래?”

 

 매튜는 그녀를 풀어주고는 ‘부족의 증명’을 잡았다.

 

 “나도 미쳤나보다. 오늘따라 네 독설도 반갑군. 달려보자! 단장! 아직
할 일이 많잖아?”

 

 로한이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왠지 죽었다 살아나더니 힘이 더 넘치는 것 같은걸.”

 

 “보기 좋네요. 저래야 매튜 답죠.”

 

 피트가 빙긋 웃자 단장도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하늘이 시련을 내려도 인류는 단 한 번도 진보를 멈춘 적이 없
지. 우리 또한 불청객을 쫓아냈으니 한껏 달려야 하지 않겠나? 조금만 더
가면 안전하게 숨을 곳이 있을 거다.”

 

 단장을 주축으로 단원들은 신속하게 엘몬데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챕터 끝났습니다. 전개되는 내용을 보시면서 슬슬 단원들 구성이 조금
눈에 들어오시려나요? 스토리상 피트의 능력을 이제 공개하듯이 단장의
능력도 전개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원들 이름과 능력을 적어보겠습니다. 괄호 안에 숫
자는 서열 넘버입니다.

 

 단장 알자로 - ?
 전투 레이넌 로한(3) - 화염
 전투 스캇(13) - 늑대인간
 전투 리퍼 매튜(16) - 용망치
 보조 에니에스 린(22) - 염력, 전투 능력도 상당함.
 보조 더글라스 피트(26) - 강제수면, 참모.
 보조 글라시아 엘로린(34) - 텔레파시, 단의 식품과 자금 관리.
 보조 세이지(48) - 청각, 최연소 애기 언데드

 

 현월달이 소개하는 엘헤미아 국토종단 여행 가이드 이야기. 많이 기대해
주세요. 챕터 끝났으니 한주 쉬고 7월 27일 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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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尹主] 2012.07.14 07:08
    연재 어떻게 되었나 궁금했어요 ㅎ 뒤늦긴 하지만 역시 재밌게 봤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네요. 하긴 단장의 능력조차 공개되지 않은 지금은, 그렇게 열띤 전개 벌일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ㅎ
    그러면 다다음 주, 더 재밌는 에피소드 들고 오시리라 생각하고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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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rsas 2012.07.14 08:03
    언제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싱거웠나요 ^^;? 쓸모없는 캐릭처럼 보이던 피트의 재발견이라는 나름의 설정이었는데 ㅎ

    다음 챕터도 재밌게 봐주세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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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욀슨 2012.07.14 09:25
    한 챕터 수고하셨습니다. 또 새로운 등장인물들도 나오고, 흥미로워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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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rsas 2012.07.14 11:24
    욀슨 님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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