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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AD] 5. 생과 사에 걸친 자 - 1  

 

 


 -……고대국가 옐마론이 어떤 식으로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
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들에겐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자 했던 오만
이 화를 불러 신에게 멸망하고 말았다는 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는데 어디
까지가 진실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멸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
다. …(중략)… 옐마론은 일찍이 지상에 존재해오며 앞으로도 다시 없을
문명을 이룩했던 꿈의 국가였다고 전해진다. 고대인들이 누렸던 삶이 어
느 정도의 것이었기에 감히 ‘이상적인 국가’라는 오만함을 내비칠 수
있었을까. 분명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들을 영유했기에 그들
의 욕망은 신의 영역까지 넘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중략)… 옐마
론에 관련된 문헌들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은 그 자취도 희미하지만 그
잔재는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아있는 소량의 기록 중 가장
특기할만한 점은 옐마론의 지도자층이었던 신족(神族)이라 불리는 존재들
이었다. 그들은 14대 혈의 군주 에펠로스 알이 엘헤미아를 다스렸던 시절
에 만들어졌던 언데드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는데,
언데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에 반해 그들은 천성적으로 그 자질
을 타고나는 독특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고난 능력을 이용
해 옐마론의 정점에 섰으며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했다. 학계에
선 그들이 멸망한 이유가 바로 그런 오만 때문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새는 날개가 다 타버려 추락하고 마는 것이
다.……-

                                                               역사학자 포스먼 하일의 저서 中

 

 

 궁성 에펠 내부에 있는 작은 카페 에펠리.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의 젊고
예쁜 아가씨가 점장인 개인소유의 카페다. 궁성 내부에 개인의 카페가 있
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선대 군주들은 귀족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는 유흥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 통과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궁성 내부에 가게를 열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궁내에 면적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당연히 그 수요는 많지 않았
고 그런 의미에서 젊은 나이에 점장이 된 발렌타인의 수완이 얼마나 좋은
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그녀의 운이 좋았던 탓도 있다. 준수
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쉽게 점장에 눈에 뛰어 에펠리의 직원이 되었다.
점장의 안목이 정확했는지 그녀는 외모에 걸맞은 교양과 센스를 갖추고
있었고, 그녀 특유의 영특함을 발휘해 단순한 커피 제조에서부터 포괄적
인 가게운영을 다 익히는데 채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점장의 도
움 없이도 무난히 카페를 운영할 수 있게 됐을 때쯤 기막힌 운명의 장난
이 일어났다. 뜻밖에도 점장이 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에
펠리의 점장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벼락출세에 가까운 그녀의 인생을
시샘할 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게의 맛을 그대로 유지
해 재시험을 통과한 그녀의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 에펠
리의 점장은 발렌타인이니까. 그리고 그 점은 에펠리의 손님들에게 꽤나
중요한 요소였고 단골 중에 단골인 루만에게는 가히 절대적이라 할만한
이유였다. 루만은 휘휘하니 빈 가게에 들어오며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였
다.

 

 “사람이 이렇게 없어서 장사 되겠어? 내가 이렇게 꼭 찾아줘야만 유지
가 되니 원.”

 

 “와서 흰소리 할 거면 나가요.”

 

 “어? 손님 쫓아내도 돼? 어느 가게 주인이 이렇게 불친절하지?”

 

 스스럼없이 구는 루만의 태도에 자연스러움과 함께 친밀함이 묻어났다.
평상시 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혹감을 느낄 만큼 가벼운 모습이
었지만 발렌타인은 전혀 낯설어 하지 않았고, 이는 루만이 에펠리에 얼굴
도장을 확실히 찍어놓았다는 소리였다.

 

 “헤-, 오랜만이네요? 최근에는 거의 안 보였는데.”

 

 발렌타인은 한 번 찾아온 손님은 반드시 다시 찾아오게 만든다는 마법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루만은 그 마법에 취약하다. 그는 그녀의 미소
에 조금도 정신이 뺏기지 않았다고 주장하듯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스탠
드형 테이블에 앉았다. 두 호흡 정도의 여유를 얻은 그는 평정심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뿐만이 아니지 않았어?”

 

 발렌타인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수도테러사건이 있은 후 궁
성 내부 행정기관들은 뒤처리에 바빴고 귀족들 역시 지금 같은 시기에 유
흥거리나 호사하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단골이 많은 그녀의 가게가
지금 같이 조용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루만은 그녀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반가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가움이 단순히
손님이서만은 아니길 바랬다. 이런 작은 가게일수록 손님과 주인의 사이
는 보다 친밀하기에 단골들은 개인의 기호에 맞는 메뉴를 얻어먹을 수 있
다. 루만은 자신의 독특한 주문을 들어주는 그녀의 행동에 좀 더 깊은 의
미가 있기를, 단순히 소비자와 판매자만의 관계는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
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렌타인이 짧게 투덜거렸다.

 

 “꼭 카페에 와서 술을 시켜야 해요?”

 

 “꼭 시킬 때마다 같은 소리를 해야 하나?”

 

 갈색머리를 귀엽게 포니테일로 묶은 발렌타인은 투덜거리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믹키 펠튼’을 뚝딱 만들어냈다. 펠튼 항구 이름에 유래가 된
유명한 음유시인 믹키 펠튼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칵테일은 산뜻한 푸른
색깔과 달콤한 맛, 높지 않은 도수 때문에 여성들이 즐겨 마시는 칵테일
이었다. 루만은 섬세한 자세로 그녀가 만들어준 칵테일을 음미했다. 그 모
습을 바라보던 발렌타인이 눈을 흘겼다.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알아요?”

 

 “조용. 손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는 게 아니지.”

 

 “헤에-, 그거 칭찬이죠?”

 

 “발렌타인이 만들어주는 믹키 펠튼은 엘헤미아 최고니까.”

 

 발렌타인은 아부라 생각하며 혀를 내밀어 보였지만 사실 루만의 말은 진
심이었다. 그가 이곳을 찾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믹키 펠튼 때문이었으니까.

 

 “오늘은 한가한가 봐요?”

 

 “여러모로 서류 정리하고 뒷정리 하느라 바빴지. 이 맛이 그리워서 잠
시 짬을 낸 거야. 또 언제 바빠질지 몰라.”

 

 “무생궁에 항상 거주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래봬도 꽤나 능력 있는 남자라서. 에펠리랑 무생궁은 가깝잖아. 굳이
항상 그곳에 있을 필요는 없지. 나도 이런 시간을 좀 즐겨야 하지 않겠어?”

 

 - 딸랑딸랑

 

 손님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방울소리에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문 쪽
을 쳐다보았다. 카페 안으로 턱수염이 까칠하게 자란 중년의 사내가 들어
섰다. 루만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게 되자 적잖이 불쾌해졌지만
발레타인은 몸에 익은 동장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손님이군요? 무엇을 마실 건가요? 카페라고
적혀 있지만 간단한 식사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중년의 사내는 살가운 그녀의 태도에 걸쭉한 미소를 짓더니 호탕하게 말
했다.

 

 “궁성 내부에 제법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더니 이게 다 아
가씨 때문이었구만!”

 

 루만은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저분하
게 생긴 남자가 발렌타인에게 치근덕대는 것이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것
처럼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의 맘을 알 리가 없는 사내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루만의 옆으로 다가와 착석했다. 망할. 루만은 속으로 읊조리며 사내
를 쳐다보았다. 발렌타인은 사내에게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그의 말에 대
답했다.

 

 “어머, 그런 말씀 하시면 부끄러워요.”

 

 중년의 남자는 메뉴판을 건성으로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카페에서 술도 파는군? 젊은 아가씨가 솜씨가 좋은가 보군. 반하겠는
걸.”

 

 도가 지나친 추파에 결국 루만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좀 조용히 해주실 수 없을까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럽
니다.”

 

 남자는 루만의 말 속뜻을 오해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는 루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곧 피식 웃었다.

 

 “칵테일 쪽에는 조예가 별로 없어서. 옆 분과 같은 걸로 주시오. 어여쁜
아가씨.”

 

 “발렌타인이라 불러주세요. 드실 거는요?”

 

 “빵 하나 구워주시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밝게 대답하는 발렌타인을 싱그럽다는 듯 쳐다보던 남자는 다시 루만에
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참, 방해를 해서 미안합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죠.”

 

 “괜찮습니다.”

 

 “하하, 난 바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사과도 할 겸
드시는 술은 제가 대접하죠.”

 

 루만은 그 인연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수평선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말
을 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함이
무언가 더 말하려 할 때 발렌타인이 금방 믹키 펠튼을 만들어와 그에게
건네주었다. 바함의 손은 잔을 받아들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노골적으로
발렌타인의 몸매를 훑고 있었다. 루만은 억지로라도 자신에게 주의를 돌
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술 잘 마시겠습니다. 저는 루만입니다.”

 

 루만은 평온함을 가장하며 믹키 펠튼을 한 모금 마셨다. 바함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치안대에서 일하는지라 제법 궁내 사람들과 친한데 처음 듣는 이
름이군요.”

 

 “하하, 인맥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이 넓은 궁내 사람 전부를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제가 유명인도 아닌데. 게다가 치안대에서 일하시면 궁내보
다야 바깥에서 근무하실 테고.”

 

 그 나이 처먹고 허풍 좀 작작 떨어라. 말이 될 소리를 해야지. 인맥으로
내가 누군지 알 정도면 그것만으로도 훈장감이다.

 

 “맞는 말이올시다. 그저 일개 치안대 소대장일 뿐이지요. 하지만 인맥이
넓은 건 진짜입니다. 치안대에서도 사교성 하면 저니까요. 제 이름을 모르
는 사람이 없죠. 하하핫!”

 

 “아, 연배가 있으신데 소대장이셨군요. 치안대 일은 손바닥 보듯 훤하시
겠습니다?”

 

 그 나이 먹고도 아직 소대장이냐. 무능력으로 유명한 거겠지.

 

 “그건 그렇고 저기 저 근사한 아가씨는 혹시 애인이십니까?”

 

 “하하, 무슨. 아닙니다. 저도 일개 고객일 뿐이지요. 저 젊은 나이에 궁
내 카페에 점장을 할 정도니 쉽게 넘볼 수나 있겠습니까?”

 

 너랑 다르게 능력도 출중하고 외모도 멋진 여자다. 집에 가서 턱수염 좀
깎고 정신 좀 차린 뒤 네 마누라한테나 잘해주는 게 사는 도리이지 않겠
냐.

 

 “음, 뭔가 귀가 간질간질하군요.”

 

 “하하, 인맥이 넓으신 분은 대화 주제에 자주 오르는 법이죠.”

 

 마음의 소리.

 

 “아, 어쩌다보니 제 얘기만 잔뜩 했군요. 그 쪽도 젊은 나이에 궁내에서
여가시간을 보내는 걸로 봐서는 제법 끗발이 있는 친구 같소만?”

 

 루만은 가볍게 조소했다.

 

 “개인비서입니다. 오랜만에 쉬고 있죠.”

 

 “아하, 하긴. 최근에 있었던 테러 때문에 제법 분위기가 뒤숭숭했지. 나
역시도 오랜만에 휴가를 내서 쉬고 있소이다. 같은 처지인데 즐거운 시간
보내봅시다.”

 

 루만은 이 장소에 얼굴 털이 좀 많은 친구만 사라져 주면 몹시 즐거워질
것 같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발렌타인한테 입구에 ‘개와 바함 출입
금지. 단, 휴일에는 개 출입가능’이라고 붙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해보라고 조언하기로 마음먹었다. 루만에게 있어 이런 일개 소대장 따위
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은 하찮은 존재였다.

 

 “와, 이번 테러 진짜 엄청나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 때문에 저도 제 소
대원들을 전부 잃고 말았죠.”

 

 루만은 고개를 조금 들어 바함을 쳐다보았다. 치안대원과 언데드가 붙는
다면 결과는 뻔할 뻔자다.

 

 “유감이군요.”

 

 “갑자기 특수한 능력이 생긴 언데드라는 존재들이라. 참 믿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직접 겪어본 저는 그 이야기가 수긍이 가더군요.”

 

 “실제로 보니 어땠습니까?”

 

 “정말 무서웠습니다. 직접 대화도 나눠봤는데, 그들에게서 재미난 이야
기 하나를 듣게 되었죠.”

 

 순간 루만은 어렴풋이 바함이란 이름을 본 기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번 테러사건 때문에 치안대는 많은 병력을 잃었고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적은 생존자들의 진술로 작성된 보고서. 그 보고서에 분명 바함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루만은 그 보고서에서 특기할만한 점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으며 바함에
게 질문했다.

 

 “대화까지 나눠보셨다니……, 놀랍군요. 무슨 얘기였습니까?”

 

 루만은 보고서에서 언데드와 대화를 나눴다는 생존자의 기록을 본 기억
이 없다고 확신했다. 단순한 허풍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던 걸
까.

 

 “이번 사건 배후에 대장군이 있다는 말이었죠.”

 

 예상치 못한 충격에 루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실롭은 발밑에 쌓여있는 눈을 보며 참 오랜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끔찍한 패전을 겪었던 북방정벌 때 그는 옵슬레이 땅을 넘어 루이즈번으
로 향했었다. 성난 맹수만큼이나 난폭했던 그때의 날씨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잔한 눈이었지만, 그는 마음속에 조금씩 일어나는 반감을 억
누르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장소에 가장 원하지 않는
이유로 오게 된 건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옵슬레이의 설경을 보던
인실롭은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그’가 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강함에 의문을 가져봤던 적이 없던 인실롭에게 무
(武)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이가 있다. 다시 그를 만나는 시점이
왜 하필이면 아직까지 임무를 성공하지 못한 지금인가. 그는 자신의 임무
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비록 그가 지휘한 부대가 자신의 기사단이 아닌
언데드라 할지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그들을 통솔해 왔다. 그러나 자신의
부대는 이미 한 명의 부상으로 인해 두 명의 전력이 빠졌으며 이번에는
부대원이 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미 죽어있기에 언데드란 이름이 붙
여진 존재들이 죽었다는 것을 생물학적이나 인권적인 면에서 토론해본다
면 희극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할 수 있겠지만 인실롭은 보다 인간다운 자
세로 자신이 부족했기에 잃을 수밖에 없었던 대원의 손실을 겸허히 받아
들이고 있었다.
 인실롭은 왠지 모르게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남은 부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당연하지만 추격팀의 사기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시끄럽고 경솔하기 짝이 없던 발락도 클라보의 죽음에 충격을 먹
었는지 간혹 리더스카이에게 짜증을 부리긴 했어도 평소보다 훨씬 조용해
져 있었다. 루더는 자신의 관할 밖으로 나오지 않고 율리아 항구에 남았
다. 그는 피해사항을 정리하기에도 바쁠 것이다. 정서적인 공황상태에 빠
진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인실롭은 언제부턴가 경의를 가지고 현월단을 대
하게 되었다. 현월단이 지나간 자리에는 일찍이 엘헤미아 역사에 없었던
끔찍한 피해가 남았다. 당대의 전설이 될 만한 그들의 존재가 인실롭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곳에는 엘헤미아의 전설이 될, 아니 이미 전설
이 된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는 두 전설이 부딪히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엘헤미아의 전설이 깨질지도 모른다고 나지막
이 속삭여왔기에.

 

 ‘그 전설은 내가 깰 것이다.’

 

 인실롭은 다시금 투지를 불태우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승부에서 가
장 중요한 것은 기량보다도 마음가짐이다. 마음에서부터 패할 수는 없다.

 

 “인실롭. 묻고 싶은 게 있다.”

 

 몬반이 인실롭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지?”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지. 고수는 정확히 하수의 기량을 파악하지만 하
수는 고수의 경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솔직하게 얘기하
지. 나는 야인으로 살아오며 온갖 무기를 다뤄봤고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내 기록을 봤으면 내가 넘버 3 로한과 싸워서도 이긴 적이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순수 병장전에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십인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존재들이 지
위에 입각한 허풍선이들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제는 알아. 너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면서 예전의 내가 얼마나 오만했던가 깨닫게 됐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자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야. 나는 그 누구보다 스스로
의 기량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나는 너 만한 인물이 세상
에 둘씩이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하이막스란 자가 엘헤미아에서
그토록 유명한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지? 흔히 일어나는 소문의 부풀림
인가, 아니면 진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건가?”

 

 인실롭은 몬반의 질문을 끝까지 경청하더니 침묵했고 침묵한 뒤, 다시
침묵했다. 그래서 질문한 몬반의 입장이 조금 우스워졌다. 몬반이 화를
내야 하나 생각할 무렵 불현 듯 인실롭이 입을 열었다.

 

 “십인장이 왜 강한지 말해줄까.”

 

 긴 침묵 끝에 나온 그의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몬반은 고개
를 갸웃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실롭의
성격상 헛소리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원래는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대들한테는 말해두겠다.
그대들은 언데드가 오큐벨라스를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대들은 그대들이 오큐벨라스의 첫 피조물쯤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
실은 그렇지 않다.”

 

 인실롭의 차분한 말투 때문에 충격은 조금 늦게 찾아왔다. 몬반은 크게
동요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바깥에 알려진 바와 달리 오큐벨라스는 과거부터 그 신비한 힘 때문에
국보로 존재해왔다. 그대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처음 사용된 존재일 뿐, 그
이전부터도 그 힘은 꾸준히 사용되어 왔지.”

 

 “인간이 아니라면……. 뭐지?”

 

 “도구다. 물건 또는 무기라고 할까. 십인장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무예가
뛰어나야 한다. 뛰어난 자질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오큐벨라스를 통해 최
종검증을 받지. 우리는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른다. 선택을 받으러 갈
때 우리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 또는 가장 오래 같이한 물
건을 가져오지. 물론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 때문에 뛰어난 실
력을 가졌음에도 십인장이 되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반대로 무예가 좀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사람도 오큐벨라스의 선택에 따라서 십인장이 되기
도 하지. 그대들이 본 루더 같은 인물도 실제 기량은 그대보다 못할 것이
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선택을 받으면 그 도구에는 그대들처럼 신비한
능력이 깃들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라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능력은 십인장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유지된다. 루즈라벤
녀석이 영혼과 도구가 이어지는 거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
내가 선택받기 위해 내놓은 물건은 바로 이 칼이다. 우리 집안 대대로 내
려오는 보검이지. 일전에 단장과 붙었을 때 내가 나무 세 그루를 동시에
쪼개버리는 것을 기억하는가? 내 보검에 깃든 능력은 일격필단(一擊必斷)
이다. 칼날 위치에 닿기만 하면 무엇이든 반드시 베어진다. 그 대상이 선
택받은 무기일 경우만 제외하고.”

 

 몬반은 급히 예전의 기억을 되감아 보았다. 생각해보니 단장과 붙었을
때 인실롭의 칼과 단장의 칼이 맞붙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눈치 채지
못했군.

 

 “그래서 모든 십인장들은 강할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무인으로써 자질
이 충분하고 그 점을 더 빛나게 해줄 능력까지 얻었으니까. 인간을 향해
직접 그 능력을 이용해보겠다고 생각한 건 대장군이 처음이었다. 천재적
인 발상이었지. 뭐 이 정도면 대충 이해가 되었나.”

 

 몬반은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인실롭의 말이 끝나면 괴물인 자신
이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들이미는 것 같았다.

 

 “하이막스가 나보다 왜 유명할 수 있었냐고 물었나? 솔직하게 말하지.
그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엘헤미아의 북벽이라 불릴만한 능력
을 가졌다.”

 


==================================================================
 1부의 마지막 챕터라고 할 수 있는 ‘생과 사에 걸친 자’ 시작합니다.
마지막 부분이니 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단장의 대한 진실이 조금씩 밝
혀지는 챕터이니 많은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십인장이 왜 강한
지 밝혀졌고 조만간 능력자 배틀이 있을 것 같군요. 본격적인 살육전은 2
부로 넘어가야 하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길.

 

 학업생활 및 직장, 그리고 하나의 알바. 총 3가지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개인시간이 정말 적습니다. 분량 맞춰내는 게 참 빠듯하군요. 이번 주에
녹음작업이 있다 보니 정말 바빴습니다. 자꾸 늦어지는 것 같아 죄송하군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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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인간의 망상은 한계가 없지

?
  • profile
    욀슨 2012.10.22 09:14
    바함 쪽 이야기도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군요. 그것보다 오큐벨러스에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본격적인 능력자 배틀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연재일자 같은 경우에는 너무 무리하게 맞추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격주로 늦추는 방법도 있을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매 주 보는 쪽이 더 좋기야 하겠지만)
  • profile
    yarsas 2012.10.23 16:24
    되도록이면 연재 일자 맞추는 겅 자신과의 싸움이자 스스로의 약속이라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에 쫒겨 글 퀄리티가 영 맘에 안 들지만.. 나중에 한꺼번에 퇴고해야죠..뭐..
  • profile
    윤주[尹主] 2012.10.25 20:06
    시간에 쫓기면서 이 정도라면 대단하신 거죠. 보는 입장에선 매주 호강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책도 그리 안 읽는데 말예요 ㅎ
    다음 챕터에서 하이막스가 등장할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도 흥미진진했지만 현월단과 하이막스가 조우했을 때 얼마나 대단한 장면이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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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rsas 2012.10.27 16:42
    아, 정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행복해지게 만드는 칭찬입니다 ;ㅁ; 제가 더 열심히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네요. 항상 좋은 말씀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뉴_=..

    윤주 님도 장편 연재를 언젠가는 재개하시리라는 걸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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