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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AD] 4. 춘신(春信)의 무장 - 2

 

 

 

 수도 엘파하를 지키는 가장 유명한 무력집단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엘파하의 기사단이다. 엘헤미아에서 기사단의 의미는 전쟁발발 시 즉시
동원되는 병력이란 뜻인데, 그것은 엘파하의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여서
과거 북방정벌 때부터 수차례 큰 활약을 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
차출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수도에서 보내는 치안대는 항시 수도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위용이 덜하
다. 두 조직은 구성원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기사단원들이 대체로 귀족
들의 자제나 실력으로 벼락출세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치안대는 대부
분 민간인들이었다. 신분에서 오는 차이로 인해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기사단에 빛이 가려지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만 봤을
때 치안대 소대장 중 한 명인 바함은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지휘관으로써 빼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
능력은 북방정벌 때도 꽤나 훌륭하게 발휘되었었다. 주변으로부터 몇 번
이나 기사단에 들어가라는 제의를 들었으며 심지어 레이몬드 소속 제 3기
사단장인 버팔로에 추천까지 받은 바가 있는 실로 놀라운 인물이었다(들
리는 소문에 의하면 버팔로와는 북방정벌 때 친해졌으며 둘이서 자주 대
무를 하는데 아직까지도 서로 우위를 가리지 못했다고 한다). 수많은 기
사단원과 치안대원이 죽임을 당한 이번 테러에서 바함은 매튜와 직접 대
면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그 후 그의 허풍이 섞인 무용담은
치안대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되었다). 결코 녹록치 않은 경험이 배인 치안
대의 살아있는 전설 바함은 지금 전우들의 장례식이 끝나고 궁성 바깥으
로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설에 걸맞을 만큼 용맹한 기세로 코
를 파기 시작했다.
 후비적후비적.
 대부분의 전설과 소문이 그러하듯 그것이 완전한 사실에 근거하는 경우
는 드물다. 사람들은 바함을 강직하고 정의감 넘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
지만 실상 그는 그다지 의로운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더 큰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기 싫기 때문이다. 그
것은 그가 치안대에서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
년 소대장으로 남아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지휘관 역시도 중대장 못
지않은 능력을 발휘하는 이가 적은 봉급을 받으며 계속 그 자리에 남겠다
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밑의 부하 직원들은 바함의 위용을 익히
알고 있어서 그를 대하는 태도가 중대장을 대하는 태도 못지않았다). 그
의 실제 성격이 어떻든 그의 능력은 진짜배기이니 일만 잘하면 상관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래 진실을 추구하는 척 하면서도 진짜 진실에는 그다
지 관심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바함의 머릿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가 있었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바함은 열심히 코를 후
비며 장례식 때 보았던 아름다운 루이나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 진짜 죽였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 있지? 몸매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그의 동기와 부하의 죽음을 기리는 슬픈 날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아도
충분히 저질적이다. 바함의 생각이 머리가 아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람들의 질타를 받게 될 구역질나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사실 사람들 중
에 최소한의 이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 해도 사람들의 추한 속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어찌 장례식
을 참관한 모든 이가 진정으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으랴. 죽음을
모르는 이들이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다분히 가식적인 일이다. 그들
이 진정으로 슬퍼하는 건 공포 속에서 자신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은 아닐
까? 그런 의미에서 바함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고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이상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에 더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겉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생존자의 사고(思考)
였다. 물론,

 

 ‘아으, 진짜 한 번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도가 좀 지나친 것 같다.

 

 “자네가 바함인가?”

 

 상상 속의 감촉을 만끽하고 있던 바함은 화들짝 놀라 코를 후비던 손을
뺐다. 그의 앞에 어느새 검은색 정복을 차려 입은 이가 서있었다. 다급해
진 바함은 어정쩡한 자세로 공상의 산물인 자신의 하체를 숨기려 했다.
다분히 웃긴 자세가 된 그를 쳐다보던 이름 모를 이는 미소조차 짓지 않
았고 덕분에 바함은 스스로가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상대방은 전혀 한심
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한 채 전혀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함으로써 ‘나는 네가 진짜 한심해 보인다’라는 의지
를 명확하게 전달시켰다.

 

 “자네가 치안대의 바함인가?”

 

 소대장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가한 자신이었기에 바함은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이가 자신보다 지위나 신분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겨우
자신을 진정시킨 바함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큼, 큼! 음! 누구십니까?”

 

 “지금 이 자리는 좀 그러니 자리를 옮기지. 자네를 뵙고자 하는 분이
있네.”

 

 바함은 수치심 때문에 대놓고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약간의 불쾌감을 느
꼈다. 앞에 있는 이가 분명 자신보다 신분이 높음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
만 본인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따라오라니. 기사단보다 하위
에 있는 조직이라 해도 치안대는 명실상부한 군의 조직이다. 아무리 귀족
이라 해도 명령체계를 넘어서는 명령은 내릴 수 없다. 특히 지금의 군사
력 대부분은 대장군이 장악하고 있다. 그가 누구기에 치안대에 중대장과
맞먹는 자신에게 절차도 없이 무례하게 오라마라 하는가.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만.”

 

 “비번인거 알고 있네. 잔말 말고 따라오게.”

 

 이것 봐라? 바함은 눈빛을 바꾸며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
다. 자신의 뒷조사를 한 인물이라. 북방정벌에서 생환해 올 수 있었던 그
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거절하면 분명 불이익이 있으리라. 바함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좋습니다.”

 

 상대방은 뒤돌아서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바함도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인파 속으로 합류했다. 바함 역시 눈치는 있었고 괜히 두리번거려 사람들
의 주의를 끌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
던 그가 갑자기 몸을 틀어 샛길로 빠져들었다. 그와 같이 방향을 틀던 바
함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마법이라도 부린 듯 순식간에 인적이 드물어
졌다. 바함은 다시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그는 점점 사람
이 없는 곳으로 자신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될 법도 했지만 매튜
와의 대면 후 바함의 담력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놀라울 정도
의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는 뒤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
지만 분명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도망칠 것을 대비한 건가.

 

 “슬슬 누구인지 말씀하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함은 결국 따라가는 것 외엔 별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계속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자 사람의 인적이 아예 없
는 골목이 나왔고 그 곳에는 창고라 추정되는 건물이 있었다. 사내는 열
쇠를 끼워 문을 열고는 바함을 쳐다보았다.

 

 “들어가게. 기다리고 계시네.”

 

 바함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어둡고
칙칙할 거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안은 제법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내부조명도 밝았다. 그리고 방 중앙에는 뒷짐을 지고 서있는 남자가 있었
다. 바함이 창고 안으로 들어오자 그가 뒤돌아섰다. 흰색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넘긴 연배가 꽤나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깊이 팬 주름
은 노화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지식과 경험으로 뭉친 조화의 산물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이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뿜어져 나오는 기운
이 제법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네. 바함.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로군. 우선 이런 장소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점을 이해해주게.”

 

 이미지에 걸맞은 묵직한 음색이 바함의 귀를 후벼 팠다. 큰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이 몸은 세이류드라고 하네.”

 

 바함은 충격으로 몸이 굳었다. 그가 아는 바 그런 이름을 가진 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로, 록셀의……?”

 

 자신을 세이류드라고 소개한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함은 자
신을 찾은 이가 이 정도로 거물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록셀 가
문은 엘헤미아 3대 귀족 가문 중 하나였고 세이류드 공작은 바로 그 가문
의 수장이었다. 현재 국왕은 후계자가 없기에 세습 서열로만 따지면 록셀 
가문의 자제가 후계자 일 순위라 할 수 있었다.
 명실상부 수도 내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다.
 에펠로스 알이 재빠르게 세이건에게 군사력을 부여해주지 않았다면 에펠
로스 가문은 당대에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는 야망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물급 인물이기에 바함은 도통 그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
었다.

 

 “치안대 소대장 바함, 록셀 공을 뵙습니다. 그런데 대체 저를 찾으신 이
유가……?”

 

 “이번에 꽤나 많은 부하들을 잃었다고 들었네. 실제 언데드와 접촉했었
는데도 살아남았다지? 북방정벌 때도 제법 활약했다고 들었고. 대단한 전
적을 갖춘 이라 알고 있네.”

 

 “과찬의 말씀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기사단마저 손을 쓰지 못하는 적 앞에서 살아남았어. 운이라면 그것도
실력일 테지. 겸손은 그만 됐네.”

 

 바함은 의혹에 가득 찬 눈길로 세이류드를 쳐다보았다.

 

 “제 실력을 칭찬하시려고 이 자리를 마련하신 건 아닐 테죠?”

 

 “물론.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네.”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한낱 소대장일 뿐인 제가 록셀 공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자네가 적임자야.”

 

 “예?”

 

 세이류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용이 좀 직설적이더라도 이해해주게. 지금부터 할 얘기는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일세. 자네의 명성을 믿고 얘기하는 것이니 부디 비
밀을 지켜주길 바라네. 자, 자네는 이번 테러사건에 대해 수상하게 느껴지
는 구석이 없나?”

 

 바함은 팔짱을 끼며 세이류드의 질문에 호응했다.

 

 “말씀하시죠.”

 

 “상식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테러조직. 보좌관은 시
민들에게 그것을 신이 내린 특수한 능력이라 공표했네. 국가차원에서 관
리해오던 중 소수가 탈출해 그 난동을 피웠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지. 심
지어 이렇게 위험할 수도 있는 존재들을 지금껏 관리해오지 않았으면 어
쨌겠냐며 이번 사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 자, 이쯤 되면 슬슬 모순이
보이는가? 만약 단순 탈출이 주된 목적이었다면 적들이 그 난동을 피웠을
까? 쉽게 구할 수 없는 염뢰마저 터뜨려가며?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사건
에 희생된 일반시민이 극히 드물다는 거, 이상하지 않나?”

 

 바함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내부의 소행인 겁니까?”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 눈치가 빨라. 속칭 언데드라 불리는 존재의
실체는 국가에서 비밀리에 만들어낸 전투병기일세. 사람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낸 괴물이란 말일세. 얼토당토하다고 하지는 않겠지? 자네는 그들
을 직접 목격했으니까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겠지.”

 

 “솔직히 좀 놀랍지만 납득은 되는군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는 바로 대장군이야. 북방정벌의 염원을 이루기
위한 비장의 카드인 셈이지. 그런데 지금 이 사단이 일어나서 급히 덮으
려 들고 있단 말이야. 나는 분명 이번 사태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보
네. 피해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피해자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단순 난동이 아닌 다른 노리는 바가 있었다는 얘기
야.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얘기는 쏙 빼놓고 공표와 더불어 북방정벌
을 부추기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성을 되찾기 전에 말이야. 대중이
란 존재가 얼마나 미신적인 것에 쉽게 빠져드는지 알고 있나?”

 

 바함은 세이류드가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사람들은
공포란 감정에 휘말릴 때 더욱 쉽게 다른 것을 의지한다. 그리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이라면 기대는 정도가 신봉에 가까워진다. 언데드를 신의
계시로 위장해 성전을 부추기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
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건……,

 

 “록셀 공께서는 대장군이 이 이상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을 막으시겠다는
거군요.”

 

 세이류드는 꾸밈없이 감탄했다.

 

 “멋져! 바로 맞췄네. 언데드를 이용한 전쟁은 승전이 될 가능성이 너무
커. 그렇게 되면 내 아들이 국왕이 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걸
세. 난 세이건 그 무뢰배 같은 자식이 이 이상 궁성 에펠에서 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네. 그 놈이 국왕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녀
석의 야심은 끝도 없어. 녀석은 분명 국왕을 배신하고 나라를 차지할 것
이다. 그것도 승전이라는 아름다운 포장으로 인한 국민들의 열렬한 사랑
을 받으면서!”

 

 바함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들끼리의 싸움이
다. 군사력으로 나라를 장악하려 드는 대장군과 왕권 세습제에서 최고 선
두에 있는 록셀 가문의 싸움.

 

 “얘기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
입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십인장이 수도를 지키고 있는 지금의 구조에서 이번 사태는 대장군이
이제껏 쌓아온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 지금이야말로 공격할 적기인 셈
이지. 우선은 테러의 진짜 목적, 대장군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아내
주길 바라네. 그리고 언데드가 끔직한 실험으로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만
인에게 알린다면 그의 입지는 당장에 추락하기 시작할 거야. 다만 증거가
없네. 그들의 자료는 전부 루즈라벤이 관리하고 있고 그것들은 그의 지하
관리실에 있어. 우리가 손 쓸 방법이 없네. 남은 방법은 다방면으로 직접
부딪혀 보는 것인데 언데드란 능력자들을 두고 있는 그들을 상대로 내 사
람을 부리다간 쉽게 들통 날 가능성이 크네. 내가 자네를 고른 이유는 그
때문이야.”

 

 바함의 머릿속에서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다. 일
개 소대장일 뿐인 자신이라면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다. 치안대 소속인
자신은 궁성 에펠 출입이 자유롭다. 그리고 스스로 평가하기엔 좀 쑥스럽
지만 자신은 제법 끗발 날리는 실력자다. 이거 나밖에 없는데? 바함은 씨
익 웃었다.

 

 “바꿔 말하면 록셀 가문을 차기 군주로 추대하는데 제가 꽤나 큰 영향
을 끼칠 거란 말이죠?”

 

 세이류드 역시 바함을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바함은 보다 편안해진 자
세로 록셀의 수장을 대하기 시작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물론 결과가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겠네. 영지를 달라면
영지를 줄 것이고 작위를 달라면 작위를 주지.”

 

 권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바함에게 있어 높은 직위란 골치 아
픈 족쇄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겐 보다 본능적인 욕구가 있었다.

 

 ‘국왕이라면 루이나에게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놓아줄 수도 있을 터.’

 

 이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없는 법. 세이류드는 바함의 얼굴에서 일렁
이는 욕망을 읽었다.

 

 “거래 성립으로 봐도 되겠나?”

 

 “상응하는 대가를 준비해주셔야 할 겁니다.”

 

 세이류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만 하게. 그대 생애 최고의 것으로 준비할 테니.”

 

 바함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율리아 항구는 서해안에서 루이즈번의 해협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항구다. 면도날처럼 서있는 차가운 공기를 맡으면 그 점을 바로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엘헤미아 최북쪽에 있는 항구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현월단의 도주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트로고스를 타고
수도테러사건의 대한 전언은 이미 전국에 퍼졌으며 그것은 율리아 항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십인장 루더는 펠튼 항구에서 그들을 놓친 것에 끔찍한
자기 환멸을 느낀 나머지 트로고스를 통해 율리아 항구에 전 군함을 배치
하도록 준비시켰다. 아무리 크레센트 호라 해도 이 정도 수준의 방어진을
뚫고 도망간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군함이 모인 것만
으로도 충분히 전쟁 급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어서 항구 내 시민들은 두
려움에 떨며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율리아 항구에는 일찍이 없
었던 인공재해란 역사가 쓰이고 있었다. 최선두에 배치된 군함의 선수에
는 젊은 남자하나와 어린 사내가 서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바로 클라보와 발락이었다.
 클라보는 이전에 한번 보여줬던 바 있는 물기둥을 만들어 냈다. 바다인
지라 일전에 비해 규모가 작았으나 그 부피와 면적은 꾸준히 커지고 있었
다. 그 사이로 발락의 벼락이 내리꽂혔다. 강렬한 스파크가 일며 물기둥이
폭발할 듯 부풀기 시작했다. 시민을 포함, 기사단원들마저 두려움에 젖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그들을 신이라고 속인다면 당장에라도
엎드려 절할 것만 같은 그런 경외감이었다. 바다가 맹렬히 출렁이며 순식
간에 파도가 거세어졌다. 겨울에서 봄이 다가오는 지금 같은 시기에 보기
드문 재해이기에 더더욱 장관이었다. 그들이 두 시간이 넘게 투자해서 만
들어낸 결과였다. 그들은 너무 큰 힘을 쏟아 부은 것 때문에 곧 강제적인
수면상태에 빠질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직은 규모가 부족하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율리아 항구에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용오름을 만
들어냈다. 이미 바람계산은 끝났다. 신의 역사가 가미되지 않은 인공적인
재해는 완벽하다 싶을 만큼 정확하게 크레센트 호가 올 방향으로 남하하
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규모가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 더 이상은 못하겠어!”

 

 지친 발락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클라보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
으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지치지 않는 언데드가 기력을 다했다는 건 강
제수면에 빠질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클라보는 그의 버릇인 소매로 입
을 가리는 행동조차 하지 못한 채 앞으로 쓰러졌다.

 

 “이번 싸움에서 저희들은 일단 아웃이군요.”

 

 “꽝! 잠시 패스지 아웃은 무슨!”

 

 둘은 서로를 마주보다 씨익 웃고는 이내 수면상태에 빠졌다.

 


==================================================================
 연재주기를 매주 토요일로 바꿨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은 연재주
기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투씬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춘신의 무장 도입부는 다분히 지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만, 지금 이 부분부터가 본격적인 언데드의 스토리가 드
러나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제 소설에 등장인물이 많아서 이름 헷갈리실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이
번에 바함 등장하신 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 쓸모가 있는 캐릭터들이
라서 등장하는 겁니다. 기억 못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말씀드리는 겁니
다만 바함은 현월의 밤 챕터에서 매튜랑 조우하고도 루이나 덕분에 살아
남았던 인물입니다. 이번 화에 나온 이름 중 현월의 밤에서 나왔던 사람
들이 꽤 있다는 거 아시려나. 여하튼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앞서
나온 등장인물들이 언제 재활용될지 모르니 그 부분도 기대해주시길.

 

 자, 그럼 우리 현월단 일행은 다음 화에는 등장할 수 있으려나.

Who's yarsas

profile

 인간의 망상은 한계가 없지

?
  • profile
    khashaker 2012.09.16 04:34
    글씨가 몰리는 듯한...
  • profile
    yarsas 2012.09.16 09:23
    스마트폰으로 보시면 줄이 끊어져서 보이실 겁니다. pc버전으로 보기 좋게 일부로 간격 조절해서 올리고 있어요.
  • profile
    욀슨 2012.09.17 08:50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으니(정확히는 사고로 잃은 거지만), 저런 모략을 꾸미는 친구들도 생기는군요. 점점 흥미진진해집니다.
  • profile
    yarsas 2012.09.17 22:04
    에펠로스 왕가는 300년 넘게 대가 끊어진 적이 없는 제법 행복한 왕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왕권이 강력했다는 얘기기도 하고 루이즈번 외에는 적국이 없으니 가능한 얘기였죠. 지금처럼 왕권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모략자의 등장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죠. 대장군의 존재가 아니라면 이미 록셀 가문이 왕이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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