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많은 대중문화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낸 여성 캐릭터들을 돌아보면 전체적으로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전쟁이나 정치 등의 거시적인 세계를 다룬 작품에서는 여성 캐릭터의 출연은 잘못하면 작품 전체의 깊이와 설득력을 엄청나게 반감시킵니다.
제가 과거 게임을 만들 때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 중 하나가 "님의 게임에는 왜 여캐가 없나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제가 남성주의적 사고가 강한 탓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정치의 세계에서 여성이 활약한 사례가 거의 없거니와, 인위적으로 창조해도 현실의 여성들을 대변해주는 표상으로 내세우기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작품을 보고 감동받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나온 표현처럼 "그것이 우리에게도 올지 모르는 것"이라는 감정이 들게 하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인데, 거시적 세계에서 두각을 발휘하는 여성상은 현실의 반영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더 의존해야 하니 출발부터 보편성 토대가 약합니다...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가정이나 학원, 기타 또래 집단 등 미시적 세계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게 하는 것인데, 일부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과 비중을 위해 함부로 장르를 바꾸거나 혼용하면 작품이 너무나도 산만해집니다. 그래서 보통 크리에이터들이 마이너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존재를 로맨스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인물에 의한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의 연결점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 실재의 여성들들 중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세계에서 분투하는 남성들의 정신세계에 로맨스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여성에게 고백하면 성공보다 차이는 경우가 훨씬 많고, 가정보다 바깥의 일을 중시하면 보통 미움을 받지 않던가요? ^^)
이렇듯 여성캐릭터는 사례의 반영보다 허구에 의존하게 하는 바가 너무 큰 게 아쉽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감동을 낳는 걸작이 별로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적판타지가 뒤섞인 망상의 나열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크리에이터란 현실세계에서 풀리지 않는 보편적 갈등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설득력있게 구원시키는 이야기를 짜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고민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PS - 최근에는 <미생>의 안영이처럼 결국 로맨스를 거부하는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여성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