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by 시우처럼 posted Dec 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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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 내려쪼이는 태양볕이 무척 따스하다. 10월의 바람이 시원하게 털 사이로 파고든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염을 축 늘어트린 채 담벼락 위에 웅크려 있던 나는 지가던 차의 경적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잠이 들고 꾀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깔고 앉았던 오른쪽 뒷다리가 저려왔다. 서서히 다리를 빼보려고 했지만 관절에서도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만 일어나볼까?'

 

 나는 천천히 자리애서 일어났다. 그리곤시원하게 등을 쭉폈다. 두둑거리며 관절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했다. 몸도 후드득 털었다. 침이 흘러내린듯 축축한  앞발을 혀로 햝았다. 이제 뭐하고 놀까나.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자 심심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실 해야할 일이 아침 부터 밀려있었지만 딱히 누가 보채는 사람도 없고 잠시 농땡이 부린다고해서 세상이 뒤집어 지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유난히 수염을 바짝 치켜세워도 감지되는 위험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기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군. 나는 라시우스. 누가 지어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시우스라는 이름이 적힌 목걸이가 목에 걸린 걸 보면 그게 아마 내 이름이겠지. 덧붙여 하얀색에 얼룩덜룩 노랗고 검은 반점이 매력적인 수컷 고양이가 바로 나다. 왜 하필 수컷인가 하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지만, 나도 그래서 언젠가 내가 수컷인 이유에 대해서 고민도 해봤지만, 수컷이 수컷인거에 무슨 이유가 있겠어. 왜 나는 수컷인가요! 하고 어느 날은 조물주를 탓해본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크게 불만이 있는건 아니었다. 뭐랄까. 그저 할일이 없으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할일은 있지만 그다지 의욕이 없다고나 할까? 아님 적적하다고나 할까? 이왕에 만들어 줄꺼면 말벗이라도 같이 만들어 줄것이지 혼자서 말하고 대답하는 것도 매번 참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슬슬 걸어볼까 하여 폴짝 담 위에서 뛰어내렸다. 폭신한 발바닥으로 바짝 마른 흙먼지가 달라붙었다. 잠시 이 먼저를 털어낼 수 없을까 고민해보지만, 과연 어떻게 털어낼 것인가. 나는 앞발을 들어 발바닥을 흔들어 털어댔다. 이제 됐나 싶어 발을 내려놨지만 텁텁한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아, 하고 잠시 신세한탄을 해본다. 고양의 사회의 문명이 인간만큼 발달 했더라면, 신발을 신거나 아님 양말을 신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 따위는 지금의 쓰레기봉투를 뜯어대는 동족들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 백만년이 지난들 이루어질 일인가 싶다.

 

 차가 한대 지나간다. 저 안에는 인간이 타고 있을것이다. 이 지구라는 공간을 자기 멋대로 쪼물닥거리는 종족. 용서할 수 없게도 얼마 전에는 내가 주로 낮잠을 자던 공터를 폐쇠해버렸다. 무슨 빌딩이라도 지으려나 본데, 나는 허락한바 없지만 자기들 멋대로 내 구역을 침투하고선 사과 한마디 조차 없다. 저런 싸기지 없는 인자들을 내가 왜 굽어살펴야 하는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 밖에 없었다.

 

 [라이우스]

 

 이래저래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마침 눈에 띄인 가로수에 등짝을 긁으면 참 시원하겠어 하고 생각하는 찰라, 머리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가끔 뜬금없이 심지어는 똥을 눌때도 들려오곤한다. 

 

 [무슨 일이야, 또.]

 

 나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생각했다.

 

 사실, 머리속을 읽어대는 이런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뭐라고 해도 이 녀석은 항상 혼자 떠들고선 사라져 버려서 이젠 거의 자포포기한 상태라고 할까나.

 

 [P-13 구역, 개체 넘버링 7731, 상시 모니터링 필요]

 [뭐? 변이점들을 찾아내 수정하는건 어떻게 하고?]

 

 하지만 내 질문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거기서 끝나버렸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이 터져나온다. 갑자기 뭐야 이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정도것이지. 그러니까 이젠 나보고 스토커라도 되라는건가.  불쾌해진 나머지 꼬리가 빳빳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든지 간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저런 명령조의 말투를 들었어도 하루종일 낮잠을 자든, 고양이들과 사교생활을 하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마침 공원에서 간식도 얻어먹을 시간이고, 결국 나는 목소리가 지정한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간식도 먹고, 고양이들과 몇시간 놀고 난 다음, 혹시라도 시간이 남으면 그 때가서 잠시 둘러나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찌됐든 나는 고양이고, 그것도 할일이 없어 무료한 고양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 목소리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할일이 없는 김에 겸사겸사 하는 일이라는 거다. 

 

 나는 이렇게 넒은 마음씨를 가진 내 자신에게 감탄하며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간식을 가지고 나왔으려나.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