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일기] 삼첩화

by 욀슨 posted Nov 1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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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기타등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물론 그 실제 인물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O월 O일

 

이것저것 하느라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다. 두통이 심해서 버티다 못하고 결국 타이레놀을 먹었다. 정기적으로 두통이 찾아오다 보니, 가끔씩은 머릿속에 혹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검사라도 받으러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분명히 내가 먹은 것 중에서는 메티스는 없었는데. 두통이 가라앉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잡상들이 무의식의 수면을 치고 올라온다. 예를 들자면, 내가 인터넷 상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프로그램이나 로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거기서 나아가서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 사귀어 왔던 사람도 전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나도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사람이랑 구분도 할 수 없는 그런 로봇들. 어쩌면 나는 통 속의 뇌고, 거기에 과학자들이 전기신호라도 주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고 있는 건 아닐까.

 

O월 O일

 

쓰레기통 앞을 지나가다가, 커피니 핫식스니 하는 음료 캔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개수로 봐서는 한 사람이 마신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지만, 프랑스의 문필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진하게 내린 커피를 하루에 마흔 잔, 그것도 모자라서 커피콩을 수시로 집어먹다가 40세에 심장질환으로 죽었다고 한다. 굳이 이런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사람 정신을 억지로 깨워두는 약이 몸에 좋을 리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을 보면 발자크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그리 넓지도 않은 부지에는 도서관 옥상에까지 카페가 들어서 있고, 자판기에서까지 핫식스를 판다. 매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학교에 들어와서야 에너지 드링크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내가 너무 게을리 살았던 걸까. 아니면 시대에 뒤처진 걸까. 이렇게 계속 없는 시간을 짜내고, 또 짜내서 남는 건 무엇일까. 이래서야 전력 질주하는 자동차 뒤에 묶여서 달리고 있는 개랑 다를 게 없다. 자동차를 따라잡기 위해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 보지만, 결국에는 탈진해 길고 긴 피 얼룩만 남기는. 만일 누군가 저렇게 힘이 빠지더라도, ‘불행한 사고였을 뿐입니다.’ ‘저희는 분명히 경고문구 붙여 놨거든요. 전부 소비자 책임입니다.’ 같은 말이나 돌아오겠지. 단지 낙오자의 넋두리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어 보인다.

 

O월 O일

 

오늘도 옥수역에서 내렸지만, 동호대교를 건널 수는 없었다. 고가도로를 타고 올라가기에는 차가 너무 많았다. 대체 나는 뭐가 두려워서 고가도로를 오르지 못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기둥 밑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개찰구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손에 쥐고 있는 건 전부 쭉정이고, 훅 불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건 뻔하다. 게다가 스스로 그만둘 수도 없다. 만일 올해 12월이 인류가 넘길 수 있는 마지막 장의 달력이라면, 차라리 기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까지 떠밀려서 걸어왔으니, 갈 때도 그렇게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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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구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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