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의 생존전략 1화

by 윤주[尹主] posted Jun 2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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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첫 여자친구와는 섹스한 직후 헤어졌다.


 진한 첫경험의 순간은 너무나 짧고, 그렇기에 잔뜩 흥분한 심장의 떨림만큼이나 한편으론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나는 드러누운 채 한쪽에서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한 여자친구의 나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유려한 곡선을 눈으로 훑으며, 나는 그저 바보처럼 잠자코 있었다. 어째서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았을까? 우리 관계가 그녀에게는 만족스러웠는지 아닌지.


 이젠 그녀에게 물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질문할 대상이 더이상 이 세상엔 없기 때문이다. 그 날, 우리가 관계한 그 한밤중 인적 드문 강변 둔치에서 내 여자친구는 산왕에게 살해당했다.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했을땐 이미 여친의 모습은 사라지고 주위를 검붉은 피가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아연실색한대다 나약하고 무기력해서 그 상황에서도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 피와 신체 조각이 흩뿌려진 그 위에, 산왕은 서서 진심으로 안타깝단 듯 한숨을 토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은 이렇게나 하나같이 덧없고-,"


 그 완전하지 못한 한 줄 대사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산왕의 모습도, 그 목소리도 떠올리지 못하는 주제에, 어째서 그 잔인한 말의 내용만은 잊지도 못하는 걸까.


 그것이 여자친구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가장 기분좋은 경험과 가장 끔찍한 경험을 찰나에 오갔던 탓일까. 그날 이후 나는 그야말로 백치의 삶을 영유하고 있었다. 어떤 것에도 반응할 수 없었고, 어떤 것에도 감동할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방학 보충학습이 끝나는가 싶더니 2학기가 시작되고, 이런저런 행사를 하다보니 어느새 중간고사를 앞둔 시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흡사 말라붙은 고목에 눌러앉은 늙은 매미처럼 하루종일 책상 위에 눌러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각기 사정에, 일에 바쁜 시절이었다.


 "얌마! 너네가 내일모레 시험볼 놈들이 맞긴 하냐? '신성동맹'에 대해서는 꼭 시험때 물어본다고 내가 말했냐, 안했냐?"


 살벌하게 윽박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투. 헤이하치처럼 정수리가 빈 역사 선생님은 강단 위에서 우리들을 못마땅하단 양 쏘아보더니 그 중 한 녀석을 집어 물었다.


 "영광이."

 "네."

 "한 번 읊어봐. 신성동맹이 뭐야?"


 신영광, 성과 이름의 독특한 조합 탓에 종종 교회 다니냐고 오해받는 까무잡잡한 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물쭈물 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사람들이 강과 협상해서 생활권을 유지하고..."

 "공동의 번영! 그러니까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선 우선 우리와 가까운 강을 잘 대우해줄 필요가 생긴 거지. 그게 뭐 때문이라고?"

 "'산왕'이요."

 "그래, 산왕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강을 보전하면, 강은 인간을 산왕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그럼 재민이, 신성동맹을 맺은 주요 강들이 뭐뭐야?"

 '아마존, 나일, 도나우, 볼가, 인더스..."

 "양쯔, 유프라테스, 미시시피. 크고 작은 강들을 모두 세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우리는 이 여덟 개만 보면 된다. 어째서? 수능에선 얘네만 나오니까."


 수능 얘기가 나오자 교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나온다. 역사 선생님은 교탁을 몇 번 두들겨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야, 야. 꼭 공부도 못하는 놈들이 티를 내요. 이거 여덟 개 외우는 게 어렵냐? 어차피 수능에선 신성동맹을 맺은 주요 강이 뭐뭐 있느냐, 이 강들의 길이는 얼마고 유역 면적은 얼마인가, 이런 건 안 나온다고. 얘네들의 유사성을 잘 보란 거지. 봐라, 아마존은 남미 일대를 영역으로 하고 있지? 남미 일대가 뭐야? 밀림 아니냐고. 왜 밀림이겠어? 얘가 사람들하고 안 친하지? 개발 반대하고 막 그러잖아. 그걸 유식한 말로 반문명적 성향을 갖는다고 이야기한다고."


 반문명적 성향, 이라고 칠판에 적은 뒤, 선생은 그 뒤에 상반 관계 화살표를 덧붙였다.


 "아마존이랑 반대되는 게 뭐 있어? 생각해 봐. 이런 게 수능에 나온다고. 도나우, 볼가, 양쯔..."

 "짱개다."

 "짱개다, 짱개."


 양쯔강 얘기가 나오자, 교실이 다시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선생은 잠시 피식 웃으며 우리들을 가만 쳐다보다가, 1, 2분 가량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짱개가 뭐냐, 짱개가. 어쨌건 이 마데(Made) 년까지 해서 문명적인 성향을 갖는다, 라고 분류를 할 수 있겠지?"


 마데 년이란 말에 애들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중국제(Made in china) 공산품의 악명에다, 자연스레 '걸레'를 연상시키는 발음까지. 으레 하는 지저분한 농담들처럼 악의 없는 뒷담화였을까. 아무도 말리려들지 않고, 누구도 반발하지 않는 건 단지 그 발언에 악의는 없었다는 이유 하나 탓일까.


 한국이 양쯔 강의 보호권역 안에 포함되었을 때 기꺼워하는 건 국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좋다고 생각하는 나이 먹은 노친네들뿐이었다. 젊은 세대는 양쯔 강의 보호가 국가 주권을 침해한다느니 하면서 불만을 대놓고 말했고, 시위도 여러 차례 벌였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우고 촛불 시위를 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왜 저 짱개년한테 보호받아야 합니까? 누가 우리 '강'들을, 한강과 낙동강, 금강과 영산강을 살해해버렸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한 건 시위에 참가한 일반 관중도 아니고, 무려 금뱃지를 단 모 당의 유명 국회의원이었다. 충분히 외교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지만 중국 측에서 짤막하게 항의 서신을 보내왔을 뿐, 양쯔강은 조용히 침묵한 채 자기 일을 했다. 그러니까, 계속해 산왕의 침략을 막아내며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단 말이다. 예컨대 지금처럼,


 "어? 저거 양쯔다!"


 누군가 하늘을 보고 말했고, 다른 아이들이 일제히 창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책상에 심드렁하게 엎드려 있던 나 역시 분위기에 휘말려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차이나드레스에 타이즈 차림을 한, 낯익은 젊은 아가씨 한 명이 우리 학교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것도 공중에 뜬 채, 발 아래 아무런 지지도 없이.


 그녀가 양쯔강, 중국 수백만 평방킬로미터를 유역으로 한 아시아 최대 강이자 지금은 우리들이 산왕에게 대항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란 건 새삼 의심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반대편으로부터 밀려드는 시커먼 무언가로부터 우리 학교를 지키려는 듯 앞을 가로막고 선 양쯔강을 향해 누군가 황당하리만치 크게 외쳤다.


 "짱개는 물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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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그녀의 생존전략(줄여서 생존전략)> 본격적인 연재 시작합니다.
 초반 도입부는 다소 느긋하게 진행될 거 같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