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44 추천 수 0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돌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 profile
    Yes-Man 2012.06.22 20:45

    집에 故기형도 시인의 시집이 있음에도 빈집이라는 이 유명한 시를 모르고 있었지요. 김애란소설가의 단편"네모난 자리들" 마지막 쯤에 "가엾은 내사랑 빈집에 갖혔네"라는 부분을 보고 나서야 부랴부랴 찾아 읽었다죠... 황지우 시인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시인이시고, 심보선 시인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관심 받는 시인이죠.

  • profile
    코드 2012.06.23 13:20

    좋은 글들입니다

  • ?
    크리켓 2012.06.24 21:50
    황지우와 기형도시인 조으므...

  1. 제2회 인디사이드 게임제작대회 출품작 리스트.

    Date2016.10.24 By인디사이드운영자 Views10596 Votes0
    read more
  2. 인디사이드 활동 규정.(ver.20160119)

    Date2015.02.16 By천무 Views12651 Votes1
    read more
  3. 여성부를 향한 돌직구

    Date2012.06.22 By황제폐하 Views471 Votes0
    Read More
  4. 여성부를 향한 돌직구

    Date2012.06.22 By황제폐하 Views413 Votes0
    Read More
  5. 테라와 블앤소의 최대 차이점.

    Date2012.06.22 By乾天HaNeuL Views227 Votes0
    Read More
  6. 천무님... 자랑질좀 합시다...

    Date2012.06.22 By독도2005 Views246 Votes0
    Read More
  7. 신검합일 캐릭생성이 막인고로

    Date2012.06.22 By황제폐하 Views217 Votes0
    Read More
  8. 신검합일이 막혔어요???

    Date2012.06.22 By乾天HaNeuL Views215 Votes0
    Read More
  9. 구사일생편을 하고 나서...

    Date2012.06.22 By乾天HaNeuL Views172 Votes0
    Read More
  10. 더위를 피하는 방법.

    Date2012.06.22 By별난별 Views226 Votes0
    Read More
  11. 고기를 먹고 싶네요.

    Date2012.06.21 By별난별 Views202 Votes0
    Read More
  12. 오늘은 기쁜 복귀날!

    Date2012.06.21 By슬픈좀비 Views221 Votes0
    Read More
  13. 오늘 정전?

    Date2012.06.21 By야후우후우 Views219 Votes0
    Read More
  14. 지출....

    Date2012.06.21 By乾天HaNeuL Views216 Votes0
    Read More
  15. 유후 헬로!

    Date2012.06.20 By코드 Views198 Votes0
    Read More
  16. 제목을 정해야 연재를 할텐데!

    Date2012.06.20 By윤주[尹主] Views227 Votes0
    Read More
  17. 으 먼가 잘못 건들여서 게시글을 지우지도 못하네

    Date2012.06.20 By박남정 Views251 Votes0
    Read More
  18. 내 간이 더는 못버티겠다..!

    Date2012.06.19 By슬픈좀비 Views225 Votes0
    Read More
  19. 와 창도 급바뀌었군요.

    Date2012.06.19 By슬픈좀비 Views222 Votes0
    Read More
  20. d-2

    Date2012.06.19 By乾天HaNeuL Views190 Votes0
    Read More
  21. 비가 잘오네요

    Date2012.06.19 By Views218 Votes0
    Read More
  22. 각자의 연재글 연재 주기를 약속합시다!

    Date2012.06.19 By윤주[尹主] Views220 Votes1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764 765 766 767 768 769 770 771 772 773 ... 1176 Next
/ 1176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