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0 11:15

생존자 2

조회 수 465 추천 수 1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밤새 아팠다. 이유는 모르겠다. 새벽 때까지 증상이 계속되는 통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땅콩버터가 상했었나? 별로 이상한 건 못 느꼈는데.

  여지껏 앓아본 경험 중에 제일 역겨웠다. 온 몸에 열이 올라 기운은 쭉 빠지고, 뼈가 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몸 여기저기에서도 전에 없던 이물감이 느껴졌는데, 제일 끔찍한건 단연 손발톱이었다. 느낌만 봐선 들락날락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얼마나 소름끼치던지, 하마터면 오줌 지릴 뻔 했다. 그냥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덕분에 신경이 곤두서서 눈이고 귀고 코고 할 것 없이 오감이 지랄발광을 떨어댔다. 빛도 안들어오는 곳에서 윤곽이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식중독 증상이 이렇진 않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괴물들이 병을 옮긴게 분명하다.

  놈들은 이제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당연히 그 놈들은 우리가 알고있는 환경 이외의 조건에서 살고 있었겠지. 식생은 환경을 따라가니 바이러스나 병균도 예외가 아닐게다. 분명히 아까 그 겨자색 쭈글탱이한테 옮았겠지. 졸지에 미지의 병균 X한테 내 목숨을 점거당했구나. 오늘은 어떻게 다시 상태가 나아졌는데, 내일은 또 어떻게 될는지. 시한부 생명이란게 어떤 개념인지 와닿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된 바람에 가까운 약국을 털기로 했다. 의사나 약사는 필요없다. 튀었거나 죽었거나 짱박혔거나 셋 중 하난데, 이 상황에 병원균 연구 시작하면 언제 끝나겠냐. 항생제 쳐먹는 수 밖에. 어차피 주인도 없을 가게니 터는게 죄가 되진 않겠지만, 여전히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다.

  기왕 나갈 거 먹을 것도 찾아보기로 했다. 물기가 많은 채소나 조리가 필수인 음식은 당연히 제낀다. 물이 1순위, 통조림이나 레토르트 식품, 초콜릿 같은 고열량 식품이 2순위다. 그 외엔 썩지 않은 것에 한해서 포장된 빵이나 즉석식품이 좋겠지. 선수를 친 이들도 있을테니 그런게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만..

난장판이 된 침실에서 큰 가방을 찾았다. 용량이 여행용 가방 정도는 될 것 같다. 캐리어라고 부르는 거 같던데, 나도 꼴에 X타X래X트 세대다 보니 X로토X 유닛 이름하고 겹치는 것 같아서 캐리어라고 하기가 좀 꺼려지더라. 죽을 때가 다 됐는지 잡생각이 많구만. 먼지를 털어내고 등에 멨다.

  벽에 귀를 대고 1분 정도 기다려봤지만 밖은 조용했다.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갔다. 순간 벽 쪽에서 머리가 흰 뱀을 본 것 같았지만 착각이었다. 사태 발생 하루 밖에 안됐는데 벌써 미쳐가나보다.

약국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해가 뜨면 또 온 도시가 괴물로 들끓을게 뻔한데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미 몇 놈은 일찍부터 행동을 개시했겠지. 늦으면 늦을수록 내 생명줄도 쫄깃해진다.

약국을 찾긴 했지만 안쪽에 체인이 걸려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지. 1층에 있는 약국은 대개 전면이 다 유리벽으로 되어있다. 정문이 잠겨있으면 옆에 벽을 깨면 장땡이지. 주먹 만한 돌을 찾아 집었다. 옷으로 감싸든 다음 힘 조절에 주의하며 유리를 깼다. 밀다시피해서 부순 덕에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금이 간 유리를 몇 번 더 돌로 찍어서 입구를 만든 다음, 윗부분의 부스러기를 다 떨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약국에 항생제가 있을 지는 나도 확신이 없었다. 외국이라면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항생제를 복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자잘한 감기에도 항생제 처방해놓고 안그랬다고 발뺌하시려면 숨겨놔야할테지. 차라리 병원을 찾아볼걸 그랬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항생제가 진짜 있더라. 찾은 자리에서 바로 한 알 삼키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아직 조용한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뭘 더 챙겨가볼까?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지만, 지금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선 욕심이 필요하다. 수면제나 비타민, 해열제와 소독약, 붕대 등 종류 별로 가져가야겠다. 문에 걸려있던 체인이 여전히 신경 쓰였지만, 창문 깨는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다. 하루 정도 지나서 다시 와보면 무슨 변화가 있겠지. 지금은 챙길만큼 챙기고 떠나는게 좋다.

  기초 의약품을 챙기고 카운터 뒤에서 땀을 훔쳐냈다. 어떻게 할까? 바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른 물건도 챙겨둘까? 물론 일찍 들어가는게 안전하긴 하지만 그게 최선일까? 약국을 털어서 잔병치레의 위험에선 어떻게 벗어났는지 몰라도 먹을 것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되었다. 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더 욕심을 부려야한다. 최소한 물이라도 꼭 확보해야한다. 은신처에 짐을 내려놓고나서 뒤져볼까 싶었지만, 무게가 1킬로그램 정도 밖에 안되는 걸 도로 놔두고 오긴 역시 시간이 아까웠다. 편의점이나 구멍가게는 어디에든 있지. 털자!

  난장판이 된 편의점에서 미처 깨지지 않은 달걀 몇 개를 건졌다. 라면이나 음료수 같은 건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즉석 식품같은 경우엔 죄다 포장지 채로 망쳐져서 도저히 먹지 못할 수준이었다. 과자같이 추상적인건 몰라도 내용물이 보이는건 놈들도 먹을 걸로 인식하는 걸까? 관찰관 납셨네. 현실로 돌아가. 영양 면에선 물론 계란이 엄청난 수확이지만 날 것으로 먹을 생각을 하니까 속이 니글거렸다. 나이 이십 줄에 최근 들어서 겨우 반숙에 입문했는데 날달걀로 진도를 빼자굽쇼? 빼야지 그럼 어쩔거야. 어휴. 통에 담긴 생수도 있긴 했지만, 한 번에 다 나르기는 아무래도 무거울 것 같아 숨겨놓고 나왔다.

  편의점에서 나와 코너를 돌다가 또 다른 괴물을 봤다. 바닥에 반쯤 녹아붙은 굼벵이? 해삼? 정체 불명의 자동차만한 고깃덩이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오래 보고 있을만한 풍경은 절대 아니었다. 곧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또 생각이 날 잡아끌었다. 젠장맞을, 약한 놈 축에 속한다면 분명히 이 구더기 괴물 주변도 난장판이 될텐데, 그럼 통에 든 물도 못쓰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보험삼아서 2리터만 챙겨서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를 떴다.

항생제 탓인지 속이 안 좋았다. 병균이고 유산균이고 다 죽이는 놈이니 지금쯤 내 뱃속에선 대격변이 일어났으리라. 또 먹게 하지만 말아라.

  멀리서 뭐가 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뭐든 간에 좆됐군! 전에 ET놈 떨어질 때 난 소리 만으로도 괴물이 꼬일 정돈데 폭발음씩이나? 은신처까지 가긴 시간이 없다. 빨리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이런 옘병, 미치려면 좀 곱게 미치던가! 이 미친 괴물 새끼들은 문이란 문은 보이는 족족 별 십지라할을 다 퍼부어놨다. 도대체가 멀쩡한 문이 없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놈들이 근처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나는 꼼짝없이 열리는 문을 찾던 건물 옥상에 그대로 갇혀버렸다.

 

?
  • ?
    드로덴 2012.05.10 11:18
    한글 두 페이지도 안되는거 하나 싸는데 몇 시간 걸리는 사람한테 윤주 님은 신이요 신 으헝엏
  • profile
    윤주[尹主] 2012.05.10 18:28
    별로 좋은 건 아니에요...저처럼 할일없는 백수가 되시면 저 정도 연재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세기말 배경에 등장인물 한 명으로, 묘사만 가지고 진행하려면 진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을 거에요. 인물 둘이나 셋이 뭔가 주고받는 게 있어야 이야기가 탄력을 받는데, <생존자>같은 작품은 혼자 진행하는 글인만큼 구상하시는 드로덴 님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많으실 겁니다;

    한 예로, 미드 <워킹 데드>는 세기말 배경이지만 여러 등장인물이 서로 주고받는게 있어서 덜 지루한 면이 있죠. 물론 그렇게까지 해도 세기말 목가적인 분위기라는게 긴장감이 좀 늘어지는 편이긴 하더군요;;

    아무튼 어려운 글, 잘 풀고 계십니다 ㅎㅎ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얘기라서 몰입이 되네요. 전 아직 이렇게까진 쓰지 못합니다^^;;

    아무튼 건필하세요~ 재밌게 보고 있으니까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620 이그드라실! 13화 2 윤주[尹主] 2012.05.07 529 0
619 미래와과거1세계관(?) 2 dbeld 2012.05.08 459 0
618 패션왕 2 다시 2012.05.08 1177 1
617 이그드라실! 14화 5 윤주[尹主] 2012.05.08 604 0
616 관계, 관계, 관계....인물 관계도는 이제 잊자! 3 윤주[尹主] 2012.05.09 494 0
615 이그드라실! 15화 2 윤주[尹主] 2012.05.09 515 1
» 생존자 2 2 드로덴 2012.05.10 465 1
613 이그드라실! 16화 3 윤주[尹主] 2012.05.10 501 0
612 이그드라실! 17화 4 윤주[尹主] 2012.05.11 695 0
611 『각자의 시각에서 보는 감각 로맨스』횡단보도 26화! 2 ♀미니♂ban 2012.05.12 447 1
610 [현실은 아직 5월인데...(설문조사 수정)]그래도 별은 빛난다 - 9. 여름방학의 시작 2 클레어^^ 2012.05.12 424 0
609 땀과 오줌의 노래 1 다시 2012.05.12 539 2
608 이그드라실! 18 3 윤주[尹主] 2012.05.12 505 0
607 이그드라실! 19화 3 윤주[尹主] 2012.05.13 471 0
606 이그드라실! 후일담 2 윤주[尹主] 2012.05.13 388 1
605 추천사 : <단군호녀> 1 윤주[尹主] 2012.05.13 838 1
604 [학원 판타지]발큐리아! 1화 5 윤주[尹主] 2012.05.16 640 1
603 발큐리아! 2화 3 윤주[尹主] 2012.05.17 597 0
602 미래와과거2 2 dbeld 2012.05.18 491 0
601 현실과 꿈 -5 2 다시 2012.05.18 474 1
Board Pagination Prev 1 ... 185 186 187 188 189 190 191 192 193 194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