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 CASE

by 욀슨 posted Mar 1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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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것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되려 글변비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이것참...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기타등등 모든 것은 다 허구입니다. 

*항마력 약하신 분은 읽는 걸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히히! 고증은 똥이야 똥! 배설물발사!


--


#1


OO시 교도소의 사형실. 화창한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안은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교수형으로 처형하는 다른 곳과 달리, 이곳에서는 전기의자를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의자에 중년의 사형수가 전신이 고정된 채로 머리에 적신 스펀지를 얹고서 앉아 있었고, 옆에는 전기의자에 연결된 기계의 레버를 잡고 있는 교도관과 고해성사를 위해 달려온 신부, 그리고 필기용 보드를 들고 있는 의무관이 서 있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신부와 교도관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사형수는 어딘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습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십시오. 늦지 않았습니다."


"난 그 아이들이 참 좋았어요. 정말 맛있었거든요."


"지옥에나 가라, 쓰레기야."

수석 교도관이 한 마디 더 하려는 신부를 묵살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동시에 고압전류가 흐르며 인간 이하의 살인마를 바싹 구워버리고 있었지만, 그는 연기를 내고 전신이 마구 끓어오르면서도 소름끼치는 쭉 찢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위에는 파란 불꽃이 마구 튀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침내 그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퍽 하고 터져버리며 사방에 머리카락 탄 냄새가 나는 내용물을 흩뿌리자, 신부는 그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점심을 모두 토해버렸다.


"사망시간 13시 9분. 수고하셨습니다."


옆에서 의무관이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2


"이게 뭐지?"

교도관 박씨는 얼마 전에 사형당한 흉악수의 방을 치우다가 방구석에서 종이 한 뭉치를 발견했다. 전부 그림이었는데, 하나같이 대단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모두 어린 아이들이 동물이나 광대, 혹은 다른 무언가와 놀고 있는 그림이었다. 전혀 불편할 것을 느낄 것도 없는 소재였건만 박씨는 그림들을 보자마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박씨는 그런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림 속의 아이들은 웃고는 있었지만 하나같이 어딘가 광적으로 공포에 질려 있는 기색이 있었고, 동물이나 광대는 금방이라도 그들을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을 줬기 때문이었다.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배경도 그저 도사리고 있는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박씨는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갖다 대려고 하자 그림들에서 시퍼런 스파크가 튀며 맹렬하게 진동했다. 박씨는 생각을 굳혔다. 이딴 그림은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박씨? 뭐해? 무슨 정리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

누가 부르나 싶어 박씨는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수석교도관이었다. 그는 박씨가 하려던 짓을 보고 당장 그에게 그림을 뺏었다. 한참을 들여다 본 후, 수석교도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수석교도관도 박씨도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걸 태워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 멍청한 사람아! 이런 걸 팔면 엄청나게 돈이 된단 말야."


"...돈?"


"그래! 세상에 돈 많은 괴짜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팔아서 돈을 챙긴다고는 해도, 대부분을 그 개쌍놈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들에게 기증하면 문제는 없을 거 아냐. 박씨, 그러니까 그거 없애버리려는 생각일랑 하지 말더라고. 빨리 정리 끝내고 와. 곧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수석교도관은 그림을 들고 나가버렸다. 각종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방 안에서, 박씨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박아넣은 채로 발견되었다. 아무도 그의 머리를 변기에서 빼내지 못한 덕분에, 경찰에서는 변기를 통째로 들어내서 시체를 수습해야만 했다.


#3

이기린씨는 돌아다니며 그림들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경비들까지도 거의 퇴근해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이런 조용한 분위기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큐레이터로 일하며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특권 중 하나였다. 언제나처럼 수많은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하며 지나가다가, 기린은 4층 구석에 있는 한 작품 앞에서 돈이라도 주운 것처럼 멈춰 섰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며 들어왔지만, 마치 교도소에서 팔아넘긴 살인자의 유품처럼 보이는 기분 나쁜 그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보는 둥 마는 둥 재빨리 지나가 버렸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림이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던 털복숭이 곰은 돌변해, 앞발을 휘둘러 잡히는 대로 아이들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조각을 주워먹었다.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곰이 너무 빨랐으니까. 빽빽한 숲에서는 안광을 뿜는 무수한 눈이 비쳐 보였고, 수많은 굶주린 맹수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고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가 그림 밖으로 도망쳐 나오려는지 기린씨를 제발 도와달라는 눈으로 보며 뛰어오는 순간, 곰이 뒤에서 앞발을 휘둘렀다. 그림 전체가 시뻘건 얼룩으로 뭉개지는 것과 동시에 액자를 위에 씌워진 두꺼운 유리가 깨져 무서운 기세로 비산했다.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는 1층에서 이기린 씨를 발견했다.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은 그녀를 양동이에 담아서 수습해야 했다. 바디백에는 도저히 넣을 수가 없었으니까.


#4

한밭시 어느 동네의 구질구질한 뒷골목. 이 뒷골목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지저분한 건물 안에서 김탐정(3x, 미혼, 민간조사원)은 런닝과 팬티 바람으로 다 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탐정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젠장, 돛대네."- 가뜩이나 환기가 안 되는 방 안에 자욱한 연기가 자리 잡았다.


"뭐, 수수께끼의 연쇄 변사 사건 발생? 개연성이고 개뿔도 없는 걸 가지고 무슨 연쇄는 연쇄야..."

김탐정은 변사 사건 이상으로 영양가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신문을 다 본 후, 필터밖에 남지 않은 담배를 구석의 쓰레기봉투에 쑤셔넣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유통기한이 이미 이틀 지나 있었다. 그리고 냉장고 옆에 있던 커다란 자루에서 플라스틱 주걱으로 내용물을 꺼내, 얇은 기름막이 덮혀 있는 이 빠진 그릇에다가 담았다. 자루에는 '진도견 사료, 영양만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그릇에 우유를 부은 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하아... 이제 개밥도 다 떨어졌군. 이젠 뭘 먹어야 하나."

식사를 끝내고 입가에 들러붙은 둥글둥글한 개밥 하나를 아쉽다는 듯이 떼먹으며 탐정이 말했다. 고정수입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수입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라 사무실 방세와 수도세, 전기세, 전화비를 내고 나면 라면 살 돈도 없었다. 덕분에 탐정은 가격 대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진도견 사료를 주식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면 사무실을 집어치우고 차라리 노숙을 하면 되지 않냐고 누군가 분명히 물어보겠지만, 꼴에 이상한 자존심은 있어 탐정은 차마 그것까지는 하지 못했다. 탐정은 정말로 굶어죽기 전에-1주일 안에-일거리를 구하려면 전봇대에 광고 유인물이라도 붙여야 할 것 같아 후줄근한 츄리닝을 입었다. 아무리 그래도 런닝에 팬티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번에 비 오기 전에 떼어낸 전단지 뭉치를 옆구리에 낀 후 사무실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탐정은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전단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불륜조사, 실종자 탐색, 아무튼 뭐든지 다 하는 김탐정 탐정사무... 아니 민간조사원 사무실의 김탐정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보험광고 뒷부분은 가볍게 제칠 법한 속도였다.


"아빠 살려주세요(국어책 읽기). 잘 들었나? 네 딸이 잡혀 있다. 살리고 싶으면 다음 계좌로 돈을..."


"아오 O발!"


"뭐? 너쥐큼나보고취팔이라고한고야?"

탐정은 수화기를 힘차게 내려놓았고, 원래 그리 튼실해 보이지는 않았던 수화기 가운데에 살짝 금이 갔다. 어차피 박살나면 테이프로 다시 감아 사용할 테지만. 그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전단지를 다시 주웠다. 얼굴은 낚인 것에 대한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하고, 숨을 씩씩 내쉬고 있었다. 반쯤 주웠을까. 그는 다시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아까 낚인 것 덕분에 의심스러워 할 법도 하지만, 그는 역시나 조건반사적으로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물론 이번에는 그나마 좀 주워놓은 전단지를 소중히 옆구리에 낀 채였다.


"안녕하십니까. (중략) 김탐정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아, 나다. 육 계장이야.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흔한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탐정의 표정이 벽돌이라도 깰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 잘못 거셨습니다~ 야 춘삼아! 짜장면 2개 짬뽕 한개 날래날래 배달하라우 에미나이야! 짤리고 싶냐!"탐정은 우아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아랫층에도 들릴 큰 목소리로 계장이 소리쳤던 덕분에 그는 재빨리 수화기를 다시 귀에 갖다 댔다.

"야 정아! 이 인간쓰레기야! 너 슬슬 돈 없지? 공짜로 해달라는 거 아니야! 보수 두둑하게 줄 테니까 일단 들어나 보라고!"

"예 계장니임~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쇼." 방금 인간쓰레기라고 매도당한 사람 치고는 눈 앞에 당사자가 있었다면 구두라도 핥았을 법한 목소리였다.


"얼마 전에..."


#5

OO시 시내. 좋게 말하면 조용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워서-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아이들 키우기가 좋고, 나쁘게 말하면 개성 없는 그런 도시였다. 맛있는 음식도 없고, 뭔가 신나게 놀 수 있는 곳도 없고, 아무튼 아무것도 없어서 혹자는 '젊은이들의 무덤'이라고까지 부르기까지 했다. 시에 간신히 포함되는 변두리나 도심의 슬럼 같은 경우에는 집값이나 월세가 그리 비싼 건 아니라서 탐정 같은 거렁뱅이도 방을 구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탐정은 시에서 그나마 가장 번화한 거리-여기도 새벽이 되면 교차로 가운데에 누워 있어도 차가 오지를 않아 잠도 잘 수 있었다-를 활보하고 있었는데, 등에 길쭉한 플라스틱 원통을 메고 땟국에 절어 있는 바바리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그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에 사람들 모두가 그를 쳐다보고는 수근거리며 피했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한참을 걸어 그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경찰서였다. 그가 앞에 나타나자마자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의경 2인조가 탐정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전을 쳤다.

"정문에 수상한 남자 발견. 흉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 같음. 신속한 지원 부탁드립니다."


"개 같은 놈들아!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당장 계장 불러와!"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 탐정은 지원 온 의경들에게 진압봉으로 흠씬 두들겨 맞고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OO시 경찰청 강력반 만년 계장 육 계장. 그의 성과 직책의 절묘한 조화 덕에, 아무도 그를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고 그저 '계장'혹은 '육 계장'으로 불렀다. 그는 이것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느 날처럼 잡혀온 개자식들을 족쳐 사건보고서를 쓰고 있던 계장은 연락을 받고 급히 유치장으로 달려갔다. 지하에 있는 유치장에서는 딱 보기에도 수상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갇혀 창살을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앞에서 지키고 있던 근무자는 정말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보내 줘! 어? 그러고 보니 너 내가 나갔을 때 말단에 있던 놈 아냐? 빠져가지고! 요즘에는 명예퇴직자 이렇게 대우하게 되어 있나?" 남자가 계장을 쳐다보더니 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근무자는 이제 완전히 질린 눈치였다.


"실망이요, 계장님. 불러서 왔는데 두들겨 패고 여기다 집어넣다니."


계장은 근무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열쇠를 최대한 천천히 꺼내 유치장 문을 열었다. 탐정이 튀어나와 경장을 패려고 했지만 계장의 말 한마디에 고분고분해졌다.


"차비 없이 집에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지. 그래, 말 잘 듣는구만.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



"...이상이,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한 브리핑이다."

계장이 말을 마쳤다. 둘은 강력반 구석의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하지만 탐정은 커피 옆에 놓여 있는 각설탕을 계장 몰래 주워담는데 정신이 팔려 전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계장은 그걸 보고 빡쳐서 탐정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서슬에 탐정은 옷 안쪽에 감춰둔 각설탕을 죄다 쏟아내 버렸다.


"얌마, 듣고 있긴 한 거냐?"


"뭐하는 짓이요, 계장님! 일주일 양식이었는데!"


"그러니까 듣고 있었냐고."


"아니, 그거 보통 수사 진행할 때 계장님 부하들한테 해주는 거 아뇨. 브리핑 같은거 들어봐야 나한테는 개뿔도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래? 그럼 최초 희생자가 누구인지 말해보시지. 대답 못하면 일이고 자시고 그냥 너 쫓아낼거야."


"이기린, 3O세, 시립 미술관 큐레이터. 지난 주 금요일에 미술관 1층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됨. 유리조각 등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치열의 형태로 겨우 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음. 그야말로 조용하게 살던 사람이라 처음에는 자살으로 추정. 하지만 이후 조사에서 기관총을 동원해야 깰 수 있는 그림의 방탄유리가 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이기린의 유해에서 발견된 유리조각과 4층의 유리가 같은 것으로 판명되자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들었음. 다른 희생자도 할까요?"


이것 참. 계장은 혀를 찼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성격도 나쁘고 고정수입도 없는 주제에 일이 들어와서 귀찮게 되면 화부터 내는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옛날과 다를 것 없이 뛰어난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놈이 바닥에 떨어진 각설탕을 아깝다는 것처럼 주워 먹는 것을 보고 병신은 병신이라고 마음을 굳혔지만. 계장은 비웃는 눈으로 쳐다보는 탐정에게 됐다는 의미로 손사래를 쳤다.


"보수는 얼마나 주실 거요?"


"10."


"에이, 그거 누구 코에다 붙이라고. 400."


"미친놈. 100."


"350. 아니, 최소한 이 정도는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언제 또 이런 사건이 일어나 일을 맡을지도 알 수 없고."


"돈도 없어서 개밥이나 먹는 주제에 꿈은 커가지고.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개밥이라니,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네 귀에는 들리지 않냐?"


"어떻게 안 거요? 것 참 신기하네. 최근에 먹은 걸 보는 능력이라도 발달시키셨나 보구만?"


"옷에 그거나 떼고 말하시지."


탐정은 코트 소매에 커프스처럼 달려 있는 개밥을 발견하고 뒤늦게 떼어냈다. 그가 최대한 비참한 표정으로 그걸 입에다 넣으려는 걸 보고, 계장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어휴, 알았다. 200. 그 이상은 안 된다. 우리도 우리 사정이라는 게 있다고. 자, 됐지? 지금부터 당장 일 시작해. 우리도 못 건드려서 너한테 맡긴 거니까. 나중에 못 하겠다고 징징 짜면서 달려오지 말고. 그때는 울고 짜고 보채봐야 소용 없어."


탐정은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런 후 계장에게 사건파일을 받아 벗어놓았던 모자를 쓰고 경찰청을 나섰다. 계장은 피곤한 티가 역력한 모습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쭉 드러누웠다가, 문득 탁자 위에 둔 각설탕이 싹 없어진 걸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6


"아, 그러니까 현장에 들어오지 말라구요."


시립 미술관 앞. 경찰 하나가 탐정이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걸 보고 막았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지만 앞뒤가 꽉 막힌 경찰은 전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탐정은 뒷문으로 도둑놈처럼 숨어 들어가야 했다. 뭐, 무단침입과 도둑질은 그의 주특기이기도 했으니까.


미술관 안은 상당히 넓었다. 하지만 건물의 안은 대낮인데도 채광이 잘 되지 않는 듯, 대부분 어두워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변사사건이 발생한 이우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고, 오늘은 주말이라 앞에서 쓸데없는 사람-예를 들자면 괜히 기웃거리는 어린애들이나, 탐정 같은 노숙자나 놈팽이-들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한 덕분에, 살짝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겼다. 탐정은 우선 1층을 둘러봤다. 쭉 다니다가, 그는 바닥에 커다랗게 혈흔이 번져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시신는 지금쯤 장의사가 끈기를 가지고 꿰메서 관에 들어가 있을 테지만, 바닥에는 여전히 혈흔과 함께 유리조각,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파편들이 남아 있었다. 탐정은 위를 쳐다봤다. 4층에 있는 철제 난간 한 부분이 뜯어져 나가 있었다. 아마 거기로 떨어진 거겠지. 탐정은 품에서 이상한 기계 하나를 꺼냈다. 얼핏 보면 가이거 계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눈금을 제외하면 전혀 닮은 건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가 숫자는 전부 세상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을 법한 이상한 문자로 대체되어 있었다. 기계의 바늘은 오른쪽 끝에 미세하게 흔들리며 위치해 있었고, 계속 거슬리는 높은 음을 울렸다.


"이래서야 개뿔도 쓸모없구만. 나중에 꼭 따져야지."

탐정은 중얼거리며 기계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로 4층에 올라가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탐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그의 품 안에 들어있던 기계 역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거슬리는 높은 음을 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불과 10보도 되지 않는 곳에 아까 봤던 뜯어진 난간이 있었고, 탐정은 그쪽으로 향했다. 바닥에는 피가 묻은 유리파편이 널려 있었고, 난간이 뜯어져 나간 모양도 마치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림 자체에 비하면 주변의 광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까 슬쩍 챙겨온 팜플렛에는 틀림없이 아이들이 곰과 어울려 놀고 있는 그림이었건만, 지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만일 짐승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미친 곰 하나밖에 없었다. 탐정은 품 안에서 복잡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말뚝 하나와 망치를 꺼냈다. 그는 그림 앞으로 다가가서, 보호유리가 깨져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그림에 말뚝을 가져다 댔다. 동시에 그림 안에 있던 곰이 고통스러워하더니 곧 분노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탐정은 말뚝을 쥔 채로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러 피했고, 탐정이 있었단 자리로 유리조각들이 예리한 탄환처럼 튀어 날아갔다.


"이런 식으로 죽인 건가... 이것 참."

그림은 맹렬한 기세로 꿈틀거렸다. 분명히 종이쪼가리에 불과했건만,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액자에 쩍쩍 금이 가는 것으로 봐서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탐정은 서둘러 품에서 곡옥과 부적이 달린 표창을 꺼내 그림에 던졌다. 그것들은 그림과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시퍼런 불꽃을 내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그림은 불이 붙은 채로 간신히 액자에서 빠져나왔고, 이미 반쯤은 불에 타 얼굴이 문드러진 그림 속의 곰은 다시 앞발을 휘둘렀다. 탐정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날아오는 유리조각과 생각보다 강력한 충격파에 얻어맞고 멀리 날아갔다. 그는 간신히 자세를 잡고 벽에 부딪치기 일보 직전에 멈춰 설 수 있었다. 몸에서 유리조각을 털어낸 탐정은 그림이 맹렬한 기세로 모서리를 퍼덕이며 날아오는 꼴사나운 모습을 봤다. 물론 여전히 불이 붙은 채였고, 그림 안의 곰은 이제 죽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탐정은 간단히 말뚝을 다시 꺼내 날아오는 놈에게 들이댔고, 그림은 속도를 줄였지만 결국 말뚝에 꽂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림은 가열차게 저항하며 펄럭였고, 모서리에 베여 탐정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 내렸지만 결국 탐정의 손이 망치를 내려치자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힘없이 그림에서 빠져 나갔다. 탐정은 그림이 타들어가도록 가만히 뒀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걸 그린 놈은 정말 짐승보다도 못한 놈이군. 한두명 목숨으로는 이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어. 좀 더 서둘러서 그림을 그린 놈을 찾아내 족치지 않으면..." 탐정은 아직 남아있는 유리조각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마치 유리조각이 탄환처럼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그는 그리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림과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을 듣고 경찰관들이 달려오는지 발소리가 들렸고, 탐정은 스며들어왔던 것 이상으로 조용히 미술관을 빠져 나갔다.


#7


탐정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서랍을 거칠게 열어 내용물을 전부 꺼냈다. 아까 던졌던 구슬, 얼마나 오래 내용물을 채워놨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김이 잔뜩 서린 분무기, 피딱지가 여기저기 말라붙어 있는 끔찍하게 오래된 책, 복잡한 문양이 가득 그려진 부채, 색색의 부적이 매여져 있는 표창 등. 그는 그걸 차례차례 벨트와 옷 안섶에 되는 대로 전부 끼워넣고 있었고, 부피 덕에 그러지 못한 물건은 전부 한쪽 끈이 떨어져 나간 모조가죽 가방에다가 넣었다.


그의 코트 안쪽에는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의 도형들과 문자들이 마구 새겨져 있었는데, 이 문양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또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코트는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한 것으로 물건을 판 행상인은 진짜 '숲의 검은 염소'의 털로 짰다며 엄청난 값을 요구했었다. 덕분에 적지 않았던 퇴직금은 거의 이 코트와 각종 도구를 사는 데 들어가 버렸고, 탐정은 지금처럼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코트는 1. 탐정이 수많은 수라장을 큰 상처 없이 헤쳐 나온 것과 2. 탐정에게 코트를 판 행상인이 수수께끼의 광신도 집단에게 납치되어 소식이 끊긴 것으로 진품임이 확인되었다. 정작 탐정은 그 소중한 코트를 얻은 이후로 한번도 빨지 않고 안에다가 이상한 도형과 문자만 잔뜩 그려놓는 등 정말 험하게 쓰고 있었다.


아무튼 탐정은 모든 물건을 다 챙기고 가방을 든 후, 마지막으로 구석에 놓여 있던 예의 그 긴 플라스틱 원통을 등에다 멨다. 그는 '당분간 안 들어옵니다. 집세는 OO시 경찰청으로 청구하세요.' 라고 적힌 조잡한 팻말을 바깥쪽 문손잡이에 걸어놓고 힘겨운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8

자기 머리를 아낌없이 남에게 떼어주는 히어로를 닮은 얼굴에 퉁퉁한 손가락이 마치 부르스트위너를 연상시키는 잉재웅(56세, 졸부)씨는 저택 내부에 몇 억을 쏟아 개인적으로 마련한 화랑을 감상하며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는 기묘한 내력이 있는 값비싼 그림들을 수집하는 천박한 취미가 있었는데, 그가 지금 감상하고 있었던 그림은 그런 조건에 딱 부합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을 차례차례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짓을 저지른 뒤, 붙잡혀 얼마 전에 교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살인마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 정신이상자의 작품답게 아이들 앞에서 온갖 재미있는 쇼를 보여주고 있는 광대들은 범죄자 특유의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는 아이들도 공포와 광기에 먹혀버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던 잉재웅은 문득 칼 먹기 묘기를 보여주고 있던 광대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응?"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칼은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의 입 안에 정통으로 꽂혔고, 아이는 눈을 까뒤집은 채로 선혈을 흘리며 목을 앉은 의자 뒤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재웅은 그림의 내용보다도 지금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한 발 물러섰다. 그림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액자의 유리가 그 기세에 금이 가며 쩍쩍 갈라졌다. 공포에 질린 그는 화랑의 문으로 달려가 열려고 했지만, 밖에서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것처럼 문은 덜컥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았다. 뒤에서 퍽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 중 일부가 잉재웅에게 튀었다. 그리고 서서히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쇠붙이가 서로 부딪쳐 쨍그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잉재웅은 여자 3만명을 따먹지 못하고 죽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생각하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화랑 구석에 있던 창문이 박살나면서 색색의 종이조각이 묶여져 있는 표창이 총알같이 날아와, 잉재웅에 뒤에 있던 무언가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잉재웅은 등 뒤의 기척이 급격히 뒤로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살난 창문의 턱으로 중절모에 바바리코트를 쓴 구질구질한 남자 하나가 가방과 길쭉한 플라스틱 원통을 멘 채로 힘겹게 기어 올라왔다. 누가 봐도 딱 도둑놈이라는 인상을 줬지만, 잉재웅은 방금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살아돌아온 꼴이라 그 자리에서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창문으로 기어들어온 도둑놈은 아까 같은 표창과, 수많은 잡동사니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들은 영적인 능력 따위는 개나 갖다줘버린 잉재웅도 심상치 않은 내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곧 탐정이 몇 차례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서 수많은 주술도구-표창, 알록달록한 부채, 신칼, 방울, 구슬 등-가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나갔고, 잉재웅의 뒤에서 이젤에 붙어 있던 쇳조각을 말뚝처럼 세워 그를 꼬치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던 광대 그림은 약간 지나칠 정도의 주술병기 세례에 맞고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화랑 구석에 있던 비싸보이는 태피스트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탐정은 가방에서 분무기를 꺼내 그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분무기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은 시퍼런 액체 불꽃처럼 보일 정도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그림은 그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탐정이 몇 차례 분사하자, 그림은 검은 기운을 뿜어 올리며 시퍼런 불꽃에 타 그냥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다.


"뭐하는 짓이야! 내가 그 그림이랑 태피스트리를 얼마 주고 산 줄 알아!"

잉재웅이 그제야 소리쳤다. 하지만 몇 마디 더 하려던 잉재웅은 탐정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웃기지도 않는 그림 어디서 구했어. 당장 대답해."


"다, 당연히 경매에서 구했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라, 돼지새끼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식으로 하는 거냐? 아마 들어본 적 없겠지. 나는..."


탐정은 대답 대신에 피딱지가 말라붙은 무시무시하게 낡은 책 하나를 꺼냈다. 잉재웅은 그걸 보고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는데, 책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탐정이 책을 펼치자 안에 있던 책장들이 거의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비산했고, 공중에 고정되어 잉재웅을 겨냥했다.


"마지막 기회다."

탐정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고, 잉재웅은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머뭇거리며 둘러대려고 했다. 탐정이 손짓 한 번을 하자, 페이지 중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와 잉재웅의 목젓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살짝 갖다 댔을 뿐이었지만, 재웅의 목이 살짝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재웅은 실금하며 주저앉았다. 여전히 수백 장의 책장은 재웅을 겨냥한 채였다.


결국 잉재웅은 지린내를 풀풀 풍기며 그림의 내력을 불었고, 탐정은 그걸 다 듣고는 복잡한 손짓을 했다. 책장들은 다시 질서졍연하게 날아들어 책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책과 분무기를 가방 안에 넣고는, 다시 깨진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너, 얼굴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반드시 신고해서 감옥에 쳐넣어 주겠어! 이 개 같은 놈아!"

잉재웅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로 소리쳤다. 그러자 돌연 밖에서 아까의 책장 하나가 날아오더니 재웅을 옷 째로 화랑의 벽에다가 고정해 버렸다. 덕분에 잉재웅은 벽에 고정된 채로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9


탐정은 택시를 타고 시 교도소로 향했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암시를 걸어 돈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게 한 후 차에서 내렸다. 시립교도소의 담장이 그의 앞에 높이 서 있었다. 칠이 벗겨지는 흰 시멘트벽은 버림받은 성채를 연상시켰고, 교도소 주위의 공기는 무거운 영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한두 놈 있어서는 이런 기운이 풍기지 않지. 제대로 찾아온 게 맞긴 한 모양이군.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좋겠지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운터 건너편에서 교도관이 물었다. 탐정은 일분일초가 급하니만큼 그에게도 암시를 걸어 곧장 수석교도관실로 안내하도록 했다. 졸부가 그림을 사들인 건 수석교도관을 통해서였다고 하니까. 그는 암시에 걸린 교도관을 따라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쳤다.


"저기에요."

4층 복도에 들어오자, 저 건너편 끝의 방을 가리키며 교도관이 말했다. 양쪽에는 각각 5개의 문이 1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탐정이 한 발을 떼기가 무섭게, 좌우에 있던 문이 모두 벌컥 열리며 수많은 종잇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로 스케치북의 뜯어진 조각에 연필로 그려진 조잡한 데셍이었는데, 하나같이 영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전부 그 저주받을 그림들이었다. 그림마다 저 두려운 외계와 심연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혐오스러운 존재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다행히 개개의 힘은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탐정은 자신을 안내한 교도관을 피신시킨 후, 품 안에서 주술도구를 꺼냈다. 그림들이 일제히 탐정을 돌아보더니 달려들었고, 탐정 역시 투척병기를 던져 반격했다. 미술관과 졸부의 저택에서 마주쳤던 놈들에 비하면 상당히 수준이 떨어지는지 그림들은 최초로 날아간 신칼과 방울 등에 스치기만 해도 대부분 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림들은 계속해서 쏟아졌고, 탐정은 분무기까지 꺼내 뿌렸지만 수는 도저히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탐정이 1분 뒤에 다시 한번 놈들을 처치하기 위해 품 안에 손을 넣었을 대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림들은 탐정의 사지에 마구 달라붙었다. 약하다고는 해도 여러 놈이 뭉치자 탐정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거의 코끼리가 깔아뭉개는 수준이었고, 탐정의 코트는 주술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이런 물리력에는 그냥 매우 튼튼한 코트에 불과했다. 놈들, 아니 놈들 뒤에 있는 누군가는 그를 눌러 죽이려는지 더 많은 그림들이 탐정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탐정은 바닥에 완전히 엎드린 꼴이 되어버렸다. 벌써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탐정은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으깨져서 피 얼룩이 되어버리기 전에 탐정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서 높은 비명 같은 주문을 외쳤고, 동시에 그의 모조가죽 가방이 폭발하며 안에서 수많은 누런 종잇조각의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건방진 놈들... 꺼져 버려!"

책장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무리지어 다니며 그림들을 공격했다. 수많은 그림들이 책장에 꿰뚫려 시퍼런 불꽃을 내며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3분이 채 되지 않아 복도에는 더 이상 남아 있는 그림이 없었고, 방에서도 겁을 집어먹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는지 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재가 휘날렸다. 책장들도 힘을 잃고 사방에 떨어져 불타고 있었다.


"넌 내게 굴욕감을 줬어... 역시 너무 오래 쉬었나."

탐정이 오른쪽 옆구리를 붙잡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그의 전신은 엷은 재로 덮혀 있었다. 옆에 쌓여 있던 인조가죽 조각과 재의 더미에서 책을 집어든 탐정은 혀를 찼다. 분명히 죽어 껍질이 벗겨졌음에도 아직도 꿈틀거리는, 알 수 없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표지 안에는 뜯어져 나간 책장들의 일부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탐정은 식지를 깨물어 피 조금을 책에 떨어뜨렸고, 겨우 책 몇장만이 꿈틀거리며 자라나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일 주일은 양동이에 담궈놔야 겨우 복구되겠군..."

그는 저만치에 굴러가 있던 분무기를 집어들었다. 아주 조금의 내용물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액체는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던 주술도구들도 거의 시커멓게 변색되거나 파편이 되어버려 쓸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요컨대, 탐정은 완전히 파산 상태였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문에서는 지독한 영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안에 있는 게 뭐든 간에 탐정은 거의 맨주먹으로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와 싸워야 할 판이었다.


"언제나 이게 문제야. 이래서야 또 적자구만."

불평하며, 탐정은 떨어져 있는 그나마 멀쩡한 도구들을 닥치는 대로 주워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여전히 오른쪽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로 서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로댕의 작품처럼 버티고 서 있는 문의 고리를 붙잡고 활짝 열었다. 안에서 역겨운 영기의 돌풍이 쏟아져 나와 탐정은 잠시 휘청거렸다.


"빨리도 도착했군. 내 귀여운 새끼들이랑 즐거운 시간 보냈나?"


#10


생각보다 넓은 집무실에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이젤의 소름끼치는 그림에 마지막 붓질을 하고 있던 남자가 목만 180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수석교도관이었다. 그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고, 말하거나 할 때도 부자연스럽게 움찔거렸다. 탐정은 수석교도관이 머리를 목 관절이 없는 양 돌려 그를 본 거나, 얼굴빛이 가지색이라는 것보다도 방 안의 분위기에 질려버렸다. 커튼도 모자라 아예 창문에 판자를 쳐서 모든 빛을 막아버린 방 안은 수석교도관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기괴한 그림들로 빈틈없이 도배되어 있었다. 아까의 그림들처럼 달려들어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가장 질 나쁜 영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바닥에는 목이 없는 검은 수탉의 시체, 무슨 지방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양초, 피가 묻은 기괴한 형상의 단검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적갈색의 말라붙은 얼룩이 카펫이 깔린 바닥에 일종의 진을 그리고 있었다.


"교도소에서 사형당한 수많은 흉악수들의 영혼을 그림에다가 담았지.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못해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아무도, 심지어는 자네조차도 막지 못할 거야. 물론 지금 놈들은 내 영력 밧데리에 불과하지만..."


수석교도관이 일어났다. 여전히 목은 뒤로 돌아간 채였다. 탐정은 혼신의 힘을 담아 주머니에 담겨 있던 주술도구를 모두 그에게 던졌지만, 그림 두 개가 수석교도관의 앞을 가로막아 결과적으로는 피해를 전혀 주지 못했다. 물론 그림들도 무사하지는 못해,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버렸다.


"이미 자네의 수법은 모두 파악하고 있어... 한참 우아한 식사를 즐기던 때도 나는 너 같은 놈들에 대해서 조사를 좀 했거든. 거기다가 그림들과 나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미 네 패는 전부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수석교도관은 기묘하게 뒷걸음질치며 탐정에게 다가오다가, 바닥의 물건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더니 허리를 꺾으며 팔로 땅을 짚어 마치 거미 같은 형상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탐정은 분무기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액체와 함께 남은 책장을 모두 날려보냈다. 책장은 서너 개의 푸른 불화살이 되어 수석교도관에게 날아갔다. 큰 폭발이 일어났고, 교도관은 뒤로 크게 날아가 쓰러졌다.


탐정은 주문을 중얼거리며 말뚝과 망치를 꺼냈다. 주문은 점점 높고 기복이 심해지고 있었고, 수석교도관에게 씌인 악령은 기괴하게 꺾인 사지를 미친 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키히히히히! 훼이크다 병신아!"

수석교도관이 기묘한 움직임으로 말뚝과 망치를 모두 피하며 탐정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탐정은 그 서슬에 말뚝을 놓쳐버리고, 망치는 아예 뺏겨버렸다. 손을 미친 듯이 털어내자 겨우 수석교도관이 떨어졌지만, 물린 자리에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애들보다는 별로지만 씹는 맛이 좋군!"

씌인 남자는 불에 타서 여기저기가 흉하게 문드러졌지만 여전히 건재했다. 그는 손에 든 망치를 마구 휘둘렀고, 탐정은 피했지만 그만 어깨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오! 내 어깨야!"-고무망치라 다행히 뼈까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충격과 고통은 상당했다. 이어 수석교도관이 발을 뻗어 탐정의 배를 가격했다. 하필이면 뼈가 부러진 곳을 맞은 탐정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과 뜨거운 키스를 했다.


"겨우 이 정도냐? 키히히햐햐햐햐! 역시 도구가 없으면 좆도 아니구만! 발끝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주마!"

수석교도관이 몸으로 아치를 만들며 게처럼 걸어 탐정에게 서서히 걸어왔다. 신음하던 탐정은 품 속을 뒤졌지만 이미 던질 수 있는 건 다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11


"너 같은 영능력자를 잡아먹으면 호랑이 기운이 솟겠지! 히낄꺌낄!"


"아, 거 진짜 시끄럽네."

탐정은 상당히 머뭇거리다가 등에 메고 있던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었다. 통에서 강력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물론 살인마의 영혼과 그 주위의 그림들이 뿜는 영기도 흉흉하기 그지없었지만, 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는 차원이 틀렸다.


"이놈, 개밥이나 먹는 주제에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니...! 이런 건 자료에 없었는데..."

탐정은 대답 대신에 길쭉한 뭔가를 뽑았다. 수석교도관-에 씌인 살인마의 영혼-은 그걸 보고 정말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흔한 나무 배트에 못을 잔뜩 박아놓은 형태였으니까.


"뭐야! 못 박은 배트라고! 나는 그런 거에 죽고 싶지 않아!"


"뻔뻔한 놈. 네가 한 일을 보면 뚫어뻥으로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고맙게 생각하시지. 이래 뵈도 제대로 된 제작과정과 축성의식을 거친 퇴마병기 압살봉이다. 데이터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지. 근래에는 이걸 꺼낼 만한 놈이 전혀 나오지 않았거든. 거기다가 쓰고 나면 매우 피곤하고. 아무튼, 지옥으로 갈 준비나 해라."


수석교도관이 괴성을 지르며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부유시켜 무서운 속도로 날려 보냈다. 탐정은 제법 그럴싸한 타구자세를 잡으며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날아온 물건들은 박살이 나거나 수석교도관 쪽으로 다시 날아가 버렸다. 수석교도관은 되돌아온 물건들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에 탐정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방망이로 수석교도관을 후려갈겼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교도관은 바닥에 뒹굴었다.


"으으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그 순간, 고통으로 바닥에 뒹굴고 있던 수석교도관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빠져나왔다. 동시에 교도관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기운은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더니, 중년 남성의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받은 피해 때문인지 악령은 재빨리 도망가지 못하고 그저 기어갈 뿐이었다.


"...냑님... 약속이랑은 틀리지 않습니까!"

탐정은 그 뒤를 계속 따라가며 악령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보통 방망이였다면 무력하게 스쳐 지나갔을 뿐이겠지만 방망이를 내리칠 때마다 찰진 소리가 나며 악령은 굉장히 아파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악령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탐정이 그의 머리를 박살내 버리려는 순간....



"거기까지."


뒤에는 갑자기 보통 사람의 두세 배는 되는 덩치의, 정장을 입고 나이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덕분에 방망이는 악령의 머리를 반쯤 박살내버리고 나서야 겨우 멈춰 섰다. 머리가 반이 박살났는데도 연쇄살인마의 영혼은 아직도 성불해버리지 않고 바닥에서 그냥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정장은 매우 비만해 보이는데다가 손이 비정상적으로 컸고, 소름끼치게도 어깨 사이에 얹혀 있는 머리는 잘 만들어진 밀랍 모형처럼 보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말할 때 입도 달싹거리지 않았다. 탐정은 등장했는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것까지 포함해, 이 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결론내릴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의 말은 일종의 텔레파시처럼 정신에 직접 울려 전달되고 있었다.


"약속을 어긴 건 너야. 이래서 난 너희 인간들이 참 싫어. 벌레 같은 놈들. 아니, 유...(탐정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에 있는 벌레들에 비하면 너희는 정말 하잘것없는 존재야. 언제나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려고 하고, 해달라는 건 참 많지. 내가 너희들을 잡아먹기 위해 소환에 응한다는 건 알고 있기는 하니? 그런 주제에 겁도 없이 내 이름을 맘대로 불러?"


"위고 님, 한번만 봐 주세요. 제발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싫어. 변명은 저 무저갱에서나 하시지."


위고라고 불린 남자는 탐정의 옆을 놀라운 수준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 맨손으로 도망가려는 악령의 다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악령은 뭔가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진저리쳐지는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바닥 쪽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고, 정신에 직접 울리는 긴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악령이 위고의 손바닥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 위고가 탐정 쪽으로 돌아섰다. 탐정은 그의 손을 봤는데 흉측하고 거대한 손바닥 가운데에 굶주리고 예리한 이빨이 가득한 입이 침을 질질 흘리며 열렸다 닫히고 있었다. 보나마나 다른 쪽 손바닥도 마찬가지겠지. 이때까지 못 볼 것을 많이 봐온 탐정이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오늘은 정말 잘못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상대해온 시시껄렁한 악령과는 차원이 틀렸다. 만일 세상에 정말로 악마가 있었다면 이런 놈일 것이었다. 탐정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창문도 없었고, 그랬다가는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할 것 같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친구, 너무 겁내지 마. 내 이름은 위고. 이 도시에 문이자 열쇠인 자의 강림을 돕기 위해 찾아온 옛... 아니, 어차피 이 이름으로 말해봐야 모르겠지. 아무튼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은 아니고, 악마 따위는 더더욱 아냐. 그런 저급한 놈들이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는 탐정의 마음을 모두 읽고 있었다. 탐정은 순간 치부를 엿보인 것 같은 굴욕감과 끈적거리는 수렁 같은 깊은 공포를 느꼈다. 압살봉 사용의 후유증이 갑자기 몰려오는 것 같아, 탐정의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하나 제안을 하고 싶군. 어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도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빨도 박히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탐정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자네가 내 계획에 훼방을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물론 방금 저 치의-"그는 그렇게 말하며 수석교도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몸 안에 들어가 있던 놈이야 계약도 밥 먹듯이 어기는 쓰레기였으니까 그 놈을 거의 때려죽이기 직전까지 간 건 눈감아 줄게. 하지만 다음부터는 저런 놈들이 벌이는 일에는 절대로 간섭하지 말아줘. 물론 거저 해달라는 건 아냐."


그의 손에 달린 끔찍한 입 안에서 황금과 각종 보물이 쏟아져 나와 작은 산을 이뤘다. 팔아치우면 평생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도 좋을 정도의 양이었지만, 역시 출처가 출처이니만큼 하나같이 한번 보기만 해도 평생 악몽을 꿀 수 있을 법한 형상이었다. 내각 합이 180도가 넘어가는 삼각형, 빛나는 부등변다면체, 곡면에서 예리한 각으로 시시각각 바뀌는 모서리 등. 게다가 살아있는 것처럼 스멀스멀 움직이는 게 대번에 기분을 나빠지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탐정은 공포에 질린 가운데서도 순간 굴욕감을 느꼈다. 꼭 이건 '이거나 먹고 꺼져'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경찰청을 나온 것도 하고 싶은 것을,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더러운 보물을 받고 온갖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도시를 휩쓸고 돌아다니게 내버려 둔다면 왜 옷을 벗고, 개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걸까? 그는 방망이를 고쳐 쥐었다.


"...싫다는 건가?"

주위에 숨 막힐 정도의 사악한 영기가 휘몰아쳤다. 일반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미쳐버리거나 공포에 질려 죽어버릴 정도의 기운이었지만, 그래도 탐정은 무릎을 꿇는 정도로 끝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방망이를 쥐고 있었다. 위고는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탐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케 살아있군. 좋아.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게 될 거야... 너는 언젠가 내가 꼭 타락시키고 먹어치우고 말겠어. 다음번에 보자, 거렁뱅이."


위고는 자신이 뱉은 보물과 함께 서서히 담갈색의 지독한 냄새를 내는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방 안에는 무시무시한 영력이 감돌아 탐정은 일어서지 못했다.


#12


"야, 이 무식한 놈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OO시 모 병원. 탐정은 이번 사건을 해결하며 입은 부상으로 입원해 있었다. 그는 교도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발견되어 하마터면 취조까지 당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계장의 불호령에 곧장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생각보다 골절상도 많고 해서 결국 전신에 붕대와 깁스를 칭칭 감은 그의 모습은 거의 타이어 회사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다. 문병온 육 계장은 탐정의 옆에 있는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가끔은 개밥 말고 딴 것도 먹어보고 싶어서. 병원 밥 참 맛있구만... 드셔보신 적 있어? 없다고? 아무튼 일은 확실하게 끝냈수다. 그건 그렇고 내가 몽둥이찜질해준 친구는 어떻게 된 거요?"


"횡설수설하는게 영 좋지 않은데다 증거고 뭐고 나온 게 하나도 없어서, 아마 평생 정신병원 신세나 지게 될 거야. 방에 있던 그림들은 네 의견을 받아들여 전부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깔끔하게 청소한 다음에 소금까지 뿌렸지. 아무튼 사건은 앞으로 영원히 미제로 남게 될 거야."


"동일 '범인'에 의한 피해자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외다. 확실히 지... 아니 놈에게 걸맞는 더 나쁜 곳으로 영영 떠나버렸으니까. 죽은 사람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탐정은 멀쩡한 팔로 쥬스 병을 집어들었다. 계장은 그걸 받아 뚜껑을 따서 탐정에게 줬다. 탐정은 그걸 쭉 비우고는 옆에 있는 상자에다가 넣었는데, 상자에는 이미 마신 빈 병들로 가득했다. 상자 옆에는 양동이와 긴 플라스틱 통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양동이에는 적갈색의 끈끈한 액체가 가득했는데,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모서리만 수면 위로 내놓고 둥둥 떠 있었다.


"아무튼 너 좀 인간답게 살라고 약속한 금액에 더 얹어서 입금해 놨다. 예, 여보세요? 뭐? 알았어. 지금 갈게."

계장은 전화를 받더니 급하게 옷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리가 꼬여서 하마터면 탐정 옆자리에 누울 뻔했지만.


"급한 일이군. 뭐, 어차피 더 있어봤자 할 이야기도 없을 테니까 난 가본다. 제발 개밥 같은거 먹지 말고 빨리 나아라. 안녕!"


탐정은 계장이 병실을 나서자 숨겨놨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복도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탐정은 지금 자기 힘으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책은 두꺼운 검은 장정으로 덮여 있었는데, 탐정이 집어 들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손을 베인 탐정은 다분히 개인감정이 듬뿍 담긴 손길으로 주술각인이 새겨진 말뚝을 들어 그 머리로 책을 몇 대 쥐어박았고 그제서야 책이 잠잠해졌다. 물론 간헐적으로 부르르 떠는 것을 잠잠해졌다고 볼 수 있다면.

형언할 수 없는 옛 존재들을 묘사한 삽화들과 정신을 좀먹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문구들을 넘기며 탐정은 아직도 위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라도 그가 기척도 드러내지 않고 나타나 혐오스러운 손바닥에 가득 들어찬 짐승의 이빨을 들이댈 것 같았다. 더 나쁜 것은, 그가 '앞으로' 더 방해하지 말라며 그 추악한 보물을 제시했다는 거였다. '앞으로'? 도시에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던 그 연쇄살인마같은 놈들이 창궐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위고가 스스로 밝힌 목적인 '문이자 열쇠인 자'의 강림. 아마도 그는 위고와 같이 인간도 악마도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이상의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최소한 위고의 발목을 붙잡아 그의 계획에 재라도 뿌리지 않으면 이번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OO시를, 아니 전 세계를 위협할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지상에 마계가 펼쳐지겠지. 물론 OO시를 중심으로.


너무 많은 생각으로 어지러워져 탐정은 안대를 하고 최대한 편하게 누웠다. 일단 회복이 급선무였다. 몸도, 도구도. 특히 주술도구의 경우 심각해서 상처가 낫자마자 당장 계룡산으로 달려가야 할 판이었다. 많은 일이 남아 있었다. 탐정은 억지로 눈을 붙였다.


꿈속에서 수많은 무지개색의 거품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거품들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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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