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그녀와의 하룻밤

by 악마성루갈백작 posted Aug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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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집중할 수 있는 '꺼리'가 떨어지면 다시금 우울한 기분이 전신을 뒤덮고 허무한 슬픔이 가슴을 짓누른다.


"하아…"


특히 오늘처럼 온종일 비가 오는 주말이면 그런 우울증은 더욱더 지독해진다. 누군가 이 답답한 마음을 걷어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방의 불을 끄고 블라인드까지 내려버린 후, 창문을 요만큼 열어두고 저 멀리 비에 젖은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허무해지고 아득해지면서 머릿속에는 창문 밖으로 확 뛰어내리는 상상이 끝없이 펼쳐진다.


도저히 그 답답함을 어찌할 수 없어 창문을 활짝 열고 눕지만, 옷을 벗고 누워도 답답함은 가실 줄을 모르고 그제야 눈물이 차오른다. 정신 차려. 자신을 몇 번이나 다그쳐보지만, 이 바보 같은 허망함은 주체할 수 없다.



/



비가 끝도 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나는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우산도 가지고 나오지 않아 회사에 두고 왔던 작은 우산에 의지해 집으로 향하던 나. 쏟아지는 빗줄기에 바지와 신발은 다 젖고 양말 푹 젖은 난 허탈한 짜증을 느낀다. 운 좋게 텅 빈 버스의 빈자리에 앉았건만, 곧이어 서는 정거장마다 우르르 비와 땀에 젖은 사람들로 곧 버스는 가득 찬다. 퀴퀴한 냄새와 젖은 옷이 체온으로 말라 피어오르는 그 습기에 버스 안은 금방 눅눅함으로 젖어든다.


'계속 오네…'


조금 잦아들었다 싶을 무렵 버스 천장이 다다다닥 울릴 정도로 거센 비가 내린다. 내 앞에 선 아저씨의 젖은 옷에서 피어오르는 땀 냄새를 피해 고개를 창가로 돌린다. 구름에 우중충하던 하늘은, 교통체증에 멈춰버린 버스 속에서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릴없이 빗물이 때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꽉꽉 들어찬 버스 안에서 느끼는 고독이라니.


'내리자.'


어느새 버스는 ○○역 근처에 와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인파를 뚫고 급하게 내리느라 카드도 못 찍고 내렸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투둑투둑 맞으며 급하게 우산을 썼다. 빗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슥 닦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역. 걸어서 10분 거리에… 그녀의 집이 있다.



'왜 온 거지, 나?' 


그녀가 사는 원룸 앞에 서서 나는 멍하니 그 집을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거의 그쳤다. 그래도 난 우산을 쓰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온 거지. 와서 뭘 하려고. 내가 온다고 그녀가 반갑게 나를 맞이하기나 할까? 뭐냐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지금 다리 붙잡으려고 온 것도 아니잖은가. 도대체 무엇을 하러 왔단 말인가. 잠깐 빗줄기에 미쳤던 것일까.


'8시 반…'


벌써 20분도 넘게 서 있었다. 그녀가 집 안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아직 여기 살기나 할까. 집에 갈까. 배도 고프고, 아주 피곤하다. 옷도 축축하고 불쾌하다. 신발도 푹 젖었으니 아마 어마어마한 냄새가 날 거다. 무엇보다 힘들어. 피곤하다고.


'지금 딱 그녀가 나타나면 좋을 텐데.'


드라마나 영화 보면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오는 와중에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 앞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는 여자 주인공…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지. 집에 가자.


'잠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되나?' 그렇게 생각하자… 아니 그래도 여전히 마음은 부담스러웠지만 난 어느새 건물 안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콩콩콩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렸지만, 반응이 없다. 다시 한번 두드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집에 없나? 하는 아쉬움과 실망감, 그리고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면서 한 번 더 문을 두드려 보았다.


"…음! 음음! 누구세요?"


자고 있던 모양이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답하지. 전 남자친군데요~하고 대답해야 하나? 아니면 나야 하고 대답? 뭐라고 대답하지? 가슴이 쿵쿵거리며 도망치고 싶어졌다. 바보 녀석. 아까 20분도 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멘트 좀 생각해두지. 뭐라고 대답할까? 그냥 나는 "나야."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 안의 그녀가 조심스러워졌다.


"네?"


"나야."


"누구세요?"


"나야. ………."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 그냥 가, 라고 하면 어쩌지? 매달려? 아니 내가 왜? 그럼 넌 왜 여기 온 건데?


띠리삣-


하지만, 문이 열렸다. 2개월 만에 보는 그녀다.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았다. 더 예뻐지지도 못생겨지지도 않았다. 그냥 딱 2개월 전의 그녀다. 넌 변한 게 없구나.


"왜 왔어?"


그녀는 문은 열었지만 나를 안으로 들이지는 않겠다는 듯, 문 앞에 서서 물었다. 난 머리를 거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그녀는 잠깐 대답이 없다가 "들어와." 하고 맥빠진 목소리로 나를 안으로 들였다. 형광등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방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그녀의 냄새'가 났다. 향긋하면서도, 생활감이 있는 그런 냄새. 아늑했다. 무척 그리웠다.


"뭐야 도대체. 왜 온 건데?"


입구에서 물었으면서도 내가 방 안에 앉기도 전에 그녀가 물었다. 나는 물이 뚝뚝 흐르는 양말을 벗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밥 먹었어?"


물에 젖은 양말을 벗으며 대답하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냄새나니까 화장실 들어가서 벗어." 하고 시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그렇게 했다. 그리고 2개월 전처럼, 익숙하게 웃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거울을 바라보며 젖은 머리를 슥슥 다듬고는 벗은 옷을 화장실 수건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샤워를 했다. 시원했다. 개운했다. 그리고 물줄기 속에서 나른함을 느끼며 빗물과 땀을 흘려보내면서 그녀와의 재회로 얻은 기쁨을 만끽했다. 다 씻고 수건을 찾았지만 없었다. 그래서 문득 수건 좀 달라고 말하려고 하던 순간, 화장실 문고리에 그녀가 수건을 걸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래, 항상 이랬었지.



"집에 김치도 없어?"


"나 집에서 밥 안 먹잖아."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그녀가 내준 내 예전 티셔츠─여기 있었군.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라─에 그녀가 가끔 집에서 뒹굴 때 편하다며 입던 바지를 입고, 그녀가 끓여준 라면을 먹노라니 꼭 2개월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걸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다.


"…천천히 먹어."


내 모습이 게걸스러웠던지 그녀는 한마디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먹는 속도를 조금 줄였다. 그녀는 라면 먹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왜? 먹고 싶어?" 하는 내 질문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됐거든?"하고는 "라면 다 먹으면 바로 돌아가." 하고 말했다.


문득 마음속에 묘한 기대감이 피어오르던 나를 슥 밀어내는 말이었다. 그래도 가란다고 그냥 슥 갈 수야 없지. 정말로 그랬다면 오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런 생각까진 한 적도 없지만, 그냥 문득 그런 감정이 들었다.


"왜 대답 안 해?" 하고 묻는 그녀에게 난 대답 대신 "물 좀 줘." 하고 손을 뻗었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물을 따라주었다. 배가 고파서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손맛이 그리워서였을까. 그녀의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다 먹었어? 다 먹었으면 가."


이제 밥 먹고 난지 5분도 안 되는 나를 서둘러 쫓아내려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기보다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했다. 혹시 나 말고 다른 남자 있나?


"혹시 다른 남자 있어?"


그러자 그녀는 "왜? 궁금해?" 하고 물었고 나는 뚱한 마음에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어, 궁금해." 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정말 있다면 널 우리 집에 들여보냈을 것 같아?" 하고 다시 물었다. 없구나.


"다른 남자 생겼으면, 정말로 빨리 가려고 했지. 맞아 죽기 전에."


그러자 그녀는 "그럼 빨리 가야겠네". 하고 말했지만 내 말이 웃겼던지 입가에 웃음이 있었다.


"없잖아." 하고 말하며 나는 냄비와 수저를 들었다. "있거든?"하는 그녀의 말을 뒤로하고, 싱크대에 냄비를 놓고 물 좀 받아놓고 화장실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대충 입을 헹구고 화장실을 나오자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뭐해? 빨리 안 가고."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콜처럼 창 밖으로 거세게 비가 내렸다. 난 얼른 창가로 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꽤 날 보내고 싶어하네. 비가 저렇게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 어떻게 집에 가? 이 날씨엔 택시 잡기도 힘든 거 알잖아?"


"너… 안 본 사이에 엄청 능글맞아졌어."


창문을 닫으며 돌아보자 그녀가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의식적으로 회피했던 그녀의 모습을 다시금 보았다. 우선은 얼굴이다.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관능미와 백치미가 적절히 결합한 형태라는 것을 더욱 또렷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신비스러운 요염함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하면서도 우울하고 창백한 표정이 한데 어울려 오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내고 있다.


그녀의 피부 빛은 흔히들 ‘백지장 같이 희다.’라고 말하는 여인들보다 훨씬 더 희다. 마치 푸른색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린 물에 담가, 희미하게 남은 누런 기운마저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린 와이셔츠와 같은 창백한 흰빛이다. 그토록 그녀의 얼굴은 한 번도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죽어 원귀가 되어버린, 빼어나게 요염한 미인의 유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빛과 피부 색깔만으로 보면 그녀의 얼굴은 흡사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입술은 물론 붉은빛을 띠고 있지만, 핑크빛에 가깝고, 관자놀이에 어려 있는 푸른 실핏줄들은 그녀의 헬쑥한 안색을 더욱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다. 강하게 표백되어 버린 듯한 그녀의 얼굴과 먹에 갈아놓은 먹물빛 같은 그녀의 눈. 일부러 몸을 태워 반들거리는 갈색으로 만든 여자들에 비하면, 그녀의 얼굴빛은 몹시나 고전적이다.


머리카락은 또 어떤가. 동양적인 미를 물씬 풍긴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칼은 담황색(淡黃色)이 약간 섞인 불그스레한 색조였다. 지금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이 내 눈엔 짙은 브라운 빛깔로 보이긴 하지만 여느 때 보던 보통 여자들의 흔하디흔한 브라운 빛깔 머리카락은 아닌 듯 보인다. 그녀의 머리카락보다 아름다운 색감으로 피어난 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는 조금 긴장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 보는 건데?"


난 여기서 정신 잘 차려야겠다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당신 얼굴과 똑같아서."


괜히 '사랑해'라던가 '다시 시작하고 싶어'라던가 하는 병신같은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처럼 비 오는 날,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날, 그냥 그런 날의 인연으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물론 '그녀가 나를 아직 좋아한다.' 같은 가능성은 꿈도 꾸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다시 시작하자는 것을 말로 꺼내놓아서야 피차 생각만 많아지고 결국에는 더 최악의 상황으로 가기 쉽다.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오늘 하룻밤만 재워줘."


"진심이야?"


"왜? 혹시라도 내가 밤중에 덮치기라도 할까 봐?"


나로서도 짐짓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손만 잡고 잘게."란 말이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도 뻔한 거짓말로 알려졌는데 내가 한 말 역시 이와 비슷하게 들렸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2개월 전까지 우리 사이에서도 그 어떤 일도 없었어.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아아, 그랬지.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단 걸 잠시 잊고 있었네."


어딘가 묘한 어조였다. 체념한 듯한, 노인의 지루함 같은 것이 물씬 풍기는 말투. 그 순간 그녀가 생긋 웃으며─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웃다니─가늘고도 고운 손을 내 오른쪽 뺨에 대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살에 닿는 순간 긴 탄식의 한숨이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 느낌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따뜻하단 표현보다는 서늘한 쪽에 가까운 그녀의 체온은 내 몸의 열기를 빨아당기는 듯 보였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보는 그녀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마치 천 년 동안 무덤에서 이를 뽀도독뽀도독 갈아가며 잘난 척 뻐기는 군자들을 호려내어 오장육부까지 흐물거리게 할 목적으로 다시 환생한 여인 같아 보였다. 살아 있는 귀신과 마주 보고 있는 듯한 그 오싹함. 나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는 듯 소름이 돋아나면서 덜덜 떨리는 한기를 느꼈다.


나와 그녀의 얼굴은 불과 몇 c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녀의 입술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그 가늘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드러낸 목을 휘감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건…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문득 내가 왜 그녀의 곁을 떠났던 건지 기억났다. 그제야 그녀를 가볍게 밀어냈다─그것만으로도 내겐 큰 자제심이었다.


"…좋을 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인가? 내가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남겨진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고자 나는 화장실로 몸을 옮겼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범벅되었다. 세면대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사각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눈가가 처지며 유령처럼 창백해 보였다. 위험천만하게도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그녀의 관능적인 몸짓, 가볍게 거미줄처럼 흩어진 머리칼, 가느다란 몸의 라인, 그래도 나올 부분은 제대로 나와 있다. 하얗고 결이 고운 피부는 살포시 연분홍색으로 물들고, 가볍게 요동치는 가슴 언저리는 하얀 셔츠 사이로 속옷이 희미하게 비쳤다. 촉촉한 그녀의 두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여름밤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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