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행복한 세상

by 드로덴 posted Aug 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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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이번 달에만 벌써 세번째 입원이시네요."

 

 "전생에 이 병원하고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흐흐흐.."

 

 간호사는 그런 농담은 하는게 아니라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에 핀 보조개는 내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제 평생에 준호 씨 처럼 여러군데 자잘하게 골고루 다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주의력 결핍 아닌가요?"

 

 "에헤이~ 농담도. 전 멀쩡합니다. 그리고 이건 다 영광의 상처라구요."

 

 왼쪽 어깨, 언덕길에서 손수레를 끌고 올라가던 노인이 힘이 빠져 끌려가려는걸 붙잡다 탈골. 오른손 약지, 피크닉 나와있던 세살배기에게 날아오는 농구공을 막다가 인대 늘어남. 코, 시비가 잘못 붙은 외국인 말리다가 흑형에게 강타당해 주저앉음. 양다리 정강이 뼈, 만취한 취객 집에 데려다주다가 도랑에 빠져 금이 감. 인대 늘어난 것만 제외하고 세번을 다 여기서 신세졌다.

 

 "준호 씨는 영광의 상처라고 하시지만, 무리해서 남을 도와주려고 하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외국인이 싸우는 것만 해도 그래요. 그냥 지나쳐도 괜찮았잖아요?"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그 외국인하고 시비가 붙은게 하필이면 중학생들이라서.. 가만 놔뒀으면 아마 무사히 끝나진 않았을 걸요."

 

 "어느 쪽이 말인가요?"

 

 "당연히 중학생들이지요. 어린 놈들이 철없이 욕 싸지르고 다녀봤자 흑형한테는 못당하니."

 

 "흑형이요?"

 

 "자매품으로 흑누나도 있지요. 흑형이 뭐냐면.."

 

 그렇게 병실에서의 하루가 또 지나간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이야기라고 해봐야 8할은 내가 혼자 떠드는 식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훌륭한 청자(표현이 오글거린다. 내 손! 내 발!)인건 확실하지만.. 그런 탓에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턱이 뻐근해져서 음식 먹기도 싫어질 정도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먹을 수는 없다. 여기 입원하는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준 사람들이 반드시 병원비를 내준다는 묘한 법칙 때문이다. 내 돈내고 안먹는건 어떨지 몰라도 남이 준 것은 좀 그렇지. 게다가 난 식탐도 많다. 턱이 뻐근해봤자지.

 

 병원 TV는 꽤 오래된 터줏대감이다. 가끔..아니 상당히 자주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면서 고물 티를 내지만, 그래도 나올 건 다 나온다. 흑백 아닌게 어딘가. 옛날에 봤던 예능 프로 재방송이나 보고, 삼시세끼 나오는 병원밥 털어넣고, 그래도 배고프면 밥 시켜먹고, 날짜 한참 지난 신문이나 예전에 병실 쓰던 사람이 깜빡하고 두고갔을 잡지 읽고, 재활훈련하고, 약 먹고, 그래도 시간 남으면 하늘 보면서 멍때리고. 완전히 유유자적하다.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병원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된 인간이 맨날 남 도와주다가 중상 아닌 중상을 입어가지고 입원이나 하고. 진짜 손해본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아르바이트 하던 것도 병치레 때문에 짤리고.. 물론 안도와줬으면 더 큰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들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된다. 나는 선행을 베풀다 다쳤고, 그 선행을 보상받아 미묘한 생활을 유지하고.. 일이 항상 이렇게 되리라는 법이야 없지만, 이건 내 천성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솔직히 천성대로 사니까 좋긴 좋다. 야망도 없고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런 말로 사람 열받기야 쉽지만,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니까. 나 같은 사람 한 명쯤 있어도 멀쩡히 돌아갈 세상이지않은가. 아니 나 같은 사람이 많을 수록 세상이 더 윤택해지지. 전쟁을 벌이고 사람을 등쳐먹고 후드려패는 모자란 짓거리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내 삶의 방식으로는 이 세상에 적이 생길 수가 없다. 내 쪽에서 먼저 주먹 날리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천성이고 나발이고 요즘은 꿈 때문에 미칠 것 같다. 아마 오늘도 꾸겠지. 침대에 누워있다보면 갑자기 꿈 속이다. 기지개 펴면 딱 닿을 정도로 좁은 통 속에 갇혀있는 꿈. 벽은 나무나 금속같은게 아니라 유리나 수정같은데, 온갖 개지랄을 떨어도 안움직인다. 게다가 통 속엔 파워에이드 빛깔의 푸른색 빛이 계속 일렁인다. 그런 데에 계속 갇혀있다고 상상해보라. 미칠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이게 꿈이라는 것. 다행인 김에 더 다행이면 안되나? 이런 꿈 좀 그만 꾸게 해주라!

 

 에휴. 이러나저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그러다가 일주일이 훅간다. 곧 있으면 퇴원일이다. 완치된게 아니라서 무리하면 또 병원으로 직행하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1박 2일이나 보자.

 

 "푸웁크크크큭!!"

 

 재방송이래도 좋아. 강호동 완전 사랑해, 돼에~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