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9 10:06

성배:1번 기록

조회 수 446 추천 수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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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문장을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줄은 몰랐다. 나의 유년시절? 소중한 사람들에게 남기는 유언? 내가 처한 상황? 집중할 수가 없다. 뭘 해야 옳은 지 모르겠다.

 

 2. 막상 무언가를 적으려고 했더니 두서없이 썼다가는 뒤죽박죽이 될 것 같아서 순서대로 숫자를 매기기로 했다.

 

 3. 잘 하고 있다, 나! 성급하게 굴지 말고 한 문장씩 쓰고 또 써서, 여기에 더 집중하자.

 

 4. 역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먼저일 것 같다. 내 이름은 한준호다.

 

 5. 나는 인간이다.

 

 6. 나는 갇혀있다.

 

 7. 나는 혼자다.

 

 8. 나는 지금 무서워서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있다.

 

 9. 글을 쓸 여유라는게 나한테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당장 죽을 지 죽지 않을 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지 모른다는게 문제다.

 

 10. 나는 내가 왜 여기있는 건지 알지 못한다. 여기서 깨어났지만 여기로 온 기억이 없다. 분명히 누군가가 나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11. 나는 깨어나기 전에 자동차를 고치고 있었다. 가다가 갑자기 타이어가 터져버려서, 갓길에 세워두고 스페어 타이어를 꺼내려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한 걸 보았다.  그것은 아마 세상에 다시없을 괴물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가죽이 찢어지면서 그 안에서 다른 것이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13. 나는 그 놈한테 죽었다.

 

 14. 손이 다시 떨린다. 나는 씨발같은 겁쟁이다.

 

 15. 나는 살아날 수가 없는 사고를 당했다. 나는 내 배에서 쏟아지는 내장을 주워담다 머리가 잘려나갔다.

 

 16. 지금 내 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다. 내 머리도 잘 붙어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죽었다. 지금 여기있는 나는 뭐지?

 

 17. 그 괴물을 생각할 때는 그저 공포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자 턱이 뻐근해졌다. 악어가죽이라도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18. 내가 여기서 깨어난 지는 아마 5시간 정도 지났을 것이다. 시계같은건 없지만 대충 그 정도일 것이다.

 

 19. 내가 일어나서 처음으로 한 것은 오줌을 싼 것이었다. 참을 수 없이 마려웠다던지 그런게 아니라 줄줄 새어나왔다. 하지만 내 오줌치고 그렇게 맑은 오줌은 처음 본다. 지금은 벽과 바닥이 다 빨아들여 냄새조차도 안난다.

 

 20. 이 벽은 오물을 흡수하는 것 같다. 내 머리카락도 흡수한다. 머리카락도 내 피부도 단백질이니 나도 잡아먹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까지 잡아먹었다면 여기서 깨어나서 글을 쓰려는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21. 지성인처럼 구는 것은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실제로 뭘 하고있지는 않지만, 뭔가 하고있다는 느낌을 준다.

 

 22. 이 곳은 사방이 하얀 색 금속으로 되어있다. 만져보면 요철은 느껴지지않지만 미묘하게 푹 들어가는 느낌이다. 순간 사람의 살갗같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이건 분명히 금속이다. 손톱 같은 걸로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고, 맥동도 없다. 그리고 차갑다.

 

 23. 벽에다가 글자를 쓰는 건 역시 무리다. 흔적이 남지 않는다. 결국 내가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은 내 시체를 덮고 있었던 천 말고는 없다. 내 시체는 지금도 방 한가운데의 긴 탁자 위에 누워있다.

 

 24. 목이 떨어져나가고 배에서 내장이 흘러내린 시체였으면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나의 시체는 상처부위가 실리콘같은 것으로 때워진 형태였다. 단백질 인형같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이건 내 시체인데 단백질 인형이라니.. 의심을 안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몸에 난 흉터나 점들로 미루어봤을 때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거시기가 확실하다.

 

 25. 나는 원래가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재능이 있거나 한건 아니지만.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회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니까. 24번을 쓰면서 겨우 유머를 되찾았다. 아니면 유머를 되찾을 여유를 얻었던지.

 

 26. 어쨌든 나는 지금 갇혀있다. 너비 7미터, 폭 5미터, 높이 2.5 미터 정도의 방이다. 내가 서있는 곳은 닫혀있는 문 앞이고, 내 쪽으로 발을 뻗은 내 시체와 그게 올려진 탁자가 저 멀리 다른 벽에 가까이 놓여있다. 왼쪽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사각형 상자가 세워져있고, 오른쪽에는 잡동사니가 정돈되어 놓여있는 4단 정도의 책장이 두 개 세워져있다. 올려져있는 것들은 대부분이 한 손에 잡히는 형태의 타원형 물체로, 벽이나 바닥을 이루는 물질과는 달리 약간 어두운 색에 요철이 있다. 까끌까끌해서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지만 안정감있게 잡힌다. 손에 쥐기 위해 디자인된 물건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용도는 여전히 알 수 없다.

 

 27. 내 앞으로는 창문이 하나 있다. 창 밖으로는 아주 멋지고 무서운 광경이 펼쳐져있다. 크기와 밝기의 차이는 있지만, 동그란 점같은 빛들이 옆으로 지나가고, 이따금씩 크고 작은 돌이나 형형색색의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배경은 새까맣기 그지 없다.

 

 28. 나는 여기가 우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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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riaroan。 2011.07.20 02:42

    처음에 맞춤법을 틀리셔서 그냥 넘겼는데

    이제 읽어보니 곳곳에 소름돋는 문장들이 (...) 굉장히 멋지네요

    덧추빵 !

  • profile
    윤주[尹主] 2011.07.20 08:50

     무섭네요...외계인 납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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