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법칙

by 악마성루갈백작 posted Jun 2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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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안 그러다가 대체 왜 그래? 어? 내 주변에 여자친구들 많은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이번에 취업했다고 그동안 만날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해서 밥 한번 쏘겠다는 거, 그래서 그러라고, 그래서 밥 한 끼 먹고 영화 한번 보고 왔어. 전화는 영화 보느라 꺼놓은 거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구질구질해서 나 진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싫은데, 그런데 네가 말도 안 되는 오해, 어이없는 망상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있는 그대로 설명했어."

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말이 없다. 나도 이제는 짜증이 난다. 나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 말만큼은 안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묵묵무답이니 어쩔 수 없다.

"너…"

잠깐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 말했다.

"넌 지금 내가 전화 안 받은 1시간 반이 이렇게 속상하고 스트레스받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 그래서 이리 짜증이 나 있고."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여기까지 왔으니 할 말은 다 해야겠지.

"그런데… 나는 너랑 사귄 1년 반이 그랬어. 너 내가 전화하면 제때 받은 적 몇 번이나 되니. 내가 메신저로 말 걸면 제대로 대답 몇 번이나 해?"

그러자 수연은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다.

"그게 그거랑 같아?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너도 예전 이야기 했으면서'라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것을 억지로 참고 나는 재반박했다.

"다른 건 뭔데. 너 내 전화 안 받았을 때 다른 남자랑 뻘짓거리 해? 메신저 대답 안 할 때 다른 남자랑 사랑 이야기해? 아니잖아. 나도 그래. 그냥 오랜만에 만난 동생한테 밥 한 끼 얻어먹고 왔어. 그런데 너는 그거 때문에 이리 화나고 골나고, 어젯밤에 내가 전화 그렇게 해도 안 받고. 너 내가 네 남자친구들, 아는 오빠들 만날 때마다 이랬으면 어떨 거 같아? 난 한 번도 너 그런 거 갖고 트집 잡은 적 없어. 그런데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보니까 정말 서운하고 어이없다."

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없이 반박했다.

"나는 그럴 때 항상 너한테 다 누구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 했어. 그런데 넌 아니었잖아. 왜 그랬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어제 7시에 나한테 온 전화는 기억 안 나? 그거도 안 받았지. 내 전화는 뭐, 마음 내킬 때만 받는 전화냐? 이젠 정말 말할수록 더 화가 나네."

수연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원점으로 말을 돌렸다. 궁지에 몰렸다 싶었나 보다. 그냥 이쯤에서 서로 끝내면 얼마냐 좋겠냐만, 그녀는 끝까지 해보자는 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라고 말하려던 것을 참고 침착하게 말했다.

"영화 보느라 전화 꺼놨고 그새 네가 전화를 해서 너 감정 상했으니 솔직히 잘한 건 없어. 그런데 네가 지금 의심하는 행동은 한 적 없어."

일부러 빌미를 던져주었다.

"내가 뭘 의심하는데? 어? 내가 무슨 생각하는데? 그리고 넌 그럼 자기가 잘못한 거 없단 거네?"

떡밥을 던져주니 역시나 그대로 문다.

"네가 이상한 의심을 안 했으면 이렇게 화나고 뿔나고 전화도 안 받고 난리를 피울 이유가 없지.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너 속 상하게 했으니 잘한 거 없다고. 다만, 네 의심이 억울하고 속상하다는 거고."

내가 할 말은 사실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말해봐야 구질구질 해지는거고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온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감정의 여운을 추스를 시간, 달리 말해 화가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하겠지. 소갈딱지 밴댕이 같은 그녀는 그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고. 또 '내가 잘못했소'의 사고방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머리, 아니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그것을 표현하면 죽기라도 하는 줄 알아서 못하는 것인지 하여튼간에 '어쨌든 네 잘못이야'라는 원점 주장에서 맴맴 돌다가 내가 그저 빌고 또 빌어 감정이 사그라지기를 은근 바라고 있겠지.

"그럼 앞으로 나도 너한테 말 안 하고 다른 남자랑 막 영화보고 그래도 되겠네?"

조금 누그러졌나 싶었더니만 다시 짜증나는 소리를 한다. 그래, 결국 그녀는 해명이나 과정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나 지금 아주 짜증 났으니까 넌 나한테 욕 좀 먹어야 돼'라는 거겠지. 어떻게 매번 똑같을 수 있을까?

"에휴."

지겹다. 그래, 사실 딱 fact만 놓고 보면 그녀가 화날 만도 하다. 다른 여자랑 사전에 자기한테는 말도 없이 단둘이 영화보고 밥 먹고 왔다. 게다가 영화 보는 내내 전화기를 꺼놓고 있어서 짜증이 났고, 뒤늦게 사실을 추궁해보니 여자랑 영화 본 거다… 화 날만 하지. 암. 그래,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내가 사과를 하면 그건 더 모양이 우스워진다. 이상해지는 거고. 그녀도 그럴 것이다.

"왜 사과하는데? 뭘 사과하는데?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정말 그거 때문에 화났다고 생각해?"

이 4연속 콤보 들어올 건 뻔할 뻔자고 저거는 무슨 답을 해도 그냥 정답이 없는 군대식 고참형 유도심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사과할 것도 없다. 게다가 그런 걸로 사과를 한다면 너는 나한테 백번도 넘게 사과해야 한다. 너는 그러겠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사과를 하느냐고. 나도 그렇다.

내가 이 상황이 짜증이 나 한숨을 내쉬자 그녀는 더 눈을 부라리더니 드디어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든다.

"나 네가 이러는 거, 힘들다. 헤어지자."

항상 이별을 무기로 쓰는 그녀. 그리고 그 무기에 수도 없이 상처를 입은 나. 그리고 더 이상은 상처입기 싫은 나. 사실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잘 대해주고, 내가 아무리 네 편을 들어주고, 내가 아무리 너를 지켜줘도, 그냥 그건 나 혼자만의 발버둥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그래, 너도 그러면 네가 가슴 뛰고 설레는 다른 남자 만나라. 매번 싸울 때마다 이별을 입에 달고 사는 너, 이제는 내가 싫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은 이 자리에 있기 싫었다. 착한 남자? 좋은 남자? 영원한 네 편? 다 엿이나 먹으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