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노인공경

by Yes-Man posted Jun 27,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이쿠, 나 죽네!”

낡은 회색 신사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내 앞에서 오열을 하며 쓰러지려 한다. 나는 애써 무시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 길거리의 사람들 옷은 많이 짧아져 있었다.

“이봐 젊은이.”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젊은이는 할아버지 있는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요.”

“외가 쪽도?”

“네.”

“그러구먼.”

할아버지는 뭔가 잘 안 풀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꽤 더워보였지만 우선 나는 에어컨 빵빵한 시내버스를 타고 있었으므로 밖의 풍경과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젊은이.”

이번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네, 어르신.”

“자네 한국 사람이지?”

“굳이 따지자면 맞겠지만 어머니가 미국인이십니다.”

할아버지는 약간 황당하다는 얼굴로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러구먼. 계속 말 시켜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나는 이번에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는 버스 승강장에 정차했다. 승강장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꽤 이쁜데?’

아쉽게도 이 버스를 타려고 하는 것 같진 않다.

“젊은…….”

“네, 어르신.”

이번에는 나도 조금 예상했다. 내가 빠르게 대답하자 오히려 할아버지가 약간 놀란 눈치다.

“계속 말 걸어서 미안하구먼. 자네 나이가 몇인가.”

“21살입니다.”

“허허, 어리구먼. 대학교 다니고 있는가?”

“예.”

“그렇구먼.”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다가 버스 안을 살펴봤다. 내 앞쪽에는 할머니가 앉아있었고 반대편에도 임산부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그 앞으로는 세네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사탕을 물고 앉아있었다. 내 뒤쪽으로는 팔에 깁스를 한 아저씨가 앉아 있었고 그 뒤와 옆쪽에도 노인분들이 앉아있었다.

버스는 어느새 노선의 절반을 지나고 종점역에서 몇 정거장 앞이 목적지인 나는 지루함에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내게 말을 걸던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이보게 젊은이. 나는 다리가 아프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할아버지는 자기 몸을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르키며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렇게 많이 아프다네, 젊은이.”

곧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고 나는 한마디 했다.

“정정하시네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버스가 급정거 하면서 잠에서 깼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 몇 정거장 전이었다. 안심을 하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던 순간 할아버지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젊은이.”

“예, 어르신.”

“자네는 지금 어디 가고 있나.”

“아르바이트 하러 갑니다.”

할아버지는 이제야 뭔가 풀린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허허, 그렇구먼. 아까 대학교 다닌다고 했지? 학비 자네가 마련하는 겐가?”

“예.”

“효잘세, 효자야.”

할아버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이 짓게 깔린 얼굴로 계속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말일세. 효자이지만 예의는 별로 없는 것 같구먼.”

나는 할아버지의 뜬금없는 말에 놀랐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나이 칠십 먹은 노인이 힘들게 서 있는데 어떻게 그리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가.”

“아니, 그게.”

“어른 말에 말대꾸 하는 거 아니네.”

“…….”

정말 황당했다. 아까부터 말 걸었던 이유가 눈치 주는 거였나. 나는 할아버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크게 불편한 곳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칠십이나 되신 분 치곤 매우 정정했다.

“젊은이,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노인을 공경할 줄 알아야하네.”

“…….”

나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 앉으세요.”

“허허 그러지.”

할아버지는 즐거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몇 정거장 지나면 목적지이기에 조금만 참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움직이는 건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재활을 시작한지는 오래 됐지만 걷기 시작한건 몇 달 전부터였기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중심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하차 문 앞에 도착한 나는 근처에 손잡이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뒤도 안돌아보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몇 분은 내 인생에 가장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간신히 버스 계단에서 내려온 나는 후들 거리는 다리로 정거장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았다. 아직 장애인 작업장 시작할 시간까지는 꽤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잠시 정거장에서 쉬다가 가기로 했다.

멍해서 한참 앉아 있다가 문득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손잡이도 잡지 않고 중심을 잡고 서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