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를 그의 사촌동생 윤형주가 노래로 만들려다 포기한 이유가 윤영춘 선생께서 '시도 노래다'라고 일갈하셨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익히 들어 본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가지 고민을 할 수 있게 된다.
시는 어디까지 시라고 해야 옳을까?
동방신기를 노래를 써서 냈더니 덜컥 교내 문예대회에서 당선이 되었다던 우스개소리는 비웃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문 작사가가 붙어서 만든 가사가 고등학교급에서 등수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이치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한 고교생의 재치에 감탄할 만하다. 이는 근래에 나도는 가요도 충분히 시라고 부를 만하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가 아는 시라는 울타리는 굉장히 넓어졌다. 이것은 국어 교과서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비석처럼 남아있었으나, 지금 아이유의 좋은날도 한 편의 시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한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 당신, 여러분이 쓰는 그 한 줄 혹은 서너줄의 메모는 '시'일까 아닐까?
나의 잣대를 들이민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나는 공무도하가나 구지가를 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불명의 말들이 쑥쑥 튀어나오는데 노래처럼 불렸으니 시라니. '얼레리 꼴레리~ 누구누구는 누구누구랑 사귄대요~' 한 이백년 지나면 이것도 고전문학이라고 연구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오해는 핵무기만큼이나 위험하다. 공무도하가에서 강 너머로 사라지는 놈이 돈 떼먹고 튀는 건지 임인지 구분도 안가는데, 구지가에서 물 퐁당거리면서 왕을 내놓으라는 건지 애들이 술래잡기 하는데 술래를 내놓으라는건지. 이상은 이상이상하다 만큼이나 이상한 해석이다. 산을 오를 수록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이 좁아지듯이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시의 범위는 좁아진다. 물론 이 범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범주라 할 수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우리들이 쓰고 싶은 '시'는 이 개인적인 범위에 들고 싶어한다.
요즘에는 어느 기성 작가의 '시는 천재나 쓸 법한 거' 하는 소리가 불쑥불쑥 가슴에 스민다.
포모에 들면서 각 장르의 경계는 많이 허물어지고 모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다이즘의 특성과 그 이후의 전개, 해체시 같은 것을 보면
과거시대에서는 시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도 많죠.
시에 대한 제 기준은 타당한 의미의 부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이기에 운율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이 점에선 제가 쓴다고 쓰는 시들은 엉망..)
해체시를 주로 보자면 장정일의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는
햄버거 레시피를 쭉 나열하였으며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하루’는 신문 내용을 나열했습니다.
황지우의 ‘의혹을 향하여’를 보면 산문시의 형태와 물음표의 반복적인 나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보면 이게 뭔 시냐고 하겠지만
분명 다 의미가 있는 표현들이기 때문에
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저도 시를 잘 못쓰지만 그런 제가 봐도 좀 아니다라고 느끼는
시도 전혀 욕하지 않습니다.
그 시를 쓴 사람의 자기만의 방식으로 발전 할 것을 저는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의 구분을 떠나서 언어적으로 옳지 못한 것은 분명 지적하고 고쳐나가야 하겠지만요.
항상 강의 감사하구요, 시랑 수필은 제가 많이 좋아하는 장르였는데
강의가 올라오니 기분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