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팀 미션소재 이용 - "사실을 말하자면, 편지는 다른 의도였습니다."

by EsLu posted May 1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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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형상이 총천연색은 아니었습니다. 질끈 깨물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리는

것 같은 느낌일 뿐이었지요. 실제로 신음 따윈 흘리고 있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묘함. 그 오묘함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것은 마치 빛의 지향 같았습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공허의 저편에 고고하게 선 한 줄기의 섬광. 위선으로 가득한

악의 속에서도 오롯이 빛나는 성상. 사해에 수렴되는 억겁의 묘구들마저도 소녀의

이 마음을 그리지 못합니다. 그 날의 그 설렘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선생님- 오욕의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걸 유리코도 알고 있습니다.

꿈속의 기사처럼, 많은 이들이 마음의 통함을 원하지만 사실은 말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통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란 것을요.

 

 선생님. 그러나 간절히 바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여 더더욱 목이 말랐을 수도

있었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 일상의 지나가는 풍경일 따름이었지만, 소녀의

마음속에서는 다시없을 만치 아름다웠으니까요.

 

 유리코가 몇 줄 안 되는 토로를 적기 위하여 꺼내 든 이 펜이 멋없이 갈라진 편지지

위에서 얼마나 미끄러졌는지 모릅니다. 원하는 한 장이 이렇게 애를 먹입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애달픈 소녀가 지금껏 지내온 날들이 그만큼 심신을 녹이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선생님. 그 애태움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보다는,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마치 가질 수 있을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더 빠져든다고 합니다. 단지 그랬을 뿐일까요?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해 주시길 바라지 않습니다.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이 그저 결단코 아닐 뿐입니다.

그 족적이 빛나듯 새겨졌으니까요.

 

 유리코가 이제껏 알아 왔던 세계를 뛰어넘는 매력에 이끌렸던 것입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 오히려 한 때의 부푼 꿈이었으면 좋았을까요? 주책없는 소녀의 장난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좋았을까요? 마음 한쪽이 떨리는 심정으로, 거부할 수 없는 주마등

처럼 사색의 빛깔인 채 떨쳐낼 수 없는 사색마저 그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거짓말 같아서 웃고 싶지만 거짓말이 아니라 더는 어쩔 수가 없네요.

 

 그저 적어내면 될 것을, 끝끝내 지지를 거부하는 손이 계속해서 펜을 미끄러

뜨리는 원인일 것입니다. 떨리기만 하는 채인 손을 쥐어 잡아 진정시킬 여력이

없는 것도 영향이 있을 터입니다.

 

 다시금 멋없는 편지지를 깔아 놓으면서, 문득 예기치 못한 상념에 빠져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몰라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아, 그래. 어쩌면 그랬을까요? 단순히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곤 뒤이어 수긍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가까이 있어도 마음은 멀어지는 법이라 했습니다.

유리코는 이제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미 버팀목이 있는 나무는 기대어

설 벽을 찾지 아니하듯 선생님께는 눈을 돌리지 않게 할 새가 있었지요.

 

 아니, 눈을 멀게 하는 새였습니다. 그 요사한 울음소리로 시선을 묶어 진실을

오도하는 새가 붙어 있었기에, 당신을 기대어 줄 고임목에는 시선조차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아, 슬프게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소녀는 다만 분노하지도

못하고 그저 모른 체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성택의 자비를 구걸하였습니다. 유리코는 곁에 있되 곁에 있지 아니했어요.

소녀는 상황을 타개할 생각도 없이 그저 절망하여, 감히 신세를 저주하고 원흉을 매도할

수조차 없는 수렁에 스스로 굴러 들어갔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명명백백합니다. 애초부터 선택을 잘못 하고 있었지요. 진취적으로

행동해야 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했을까요? 소녀의 실책을 깨닫고

한탄하는 시절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스스로 갈구하여야 할 영원한 질문일 것입니다. 함부로 예상해 보건대,

죽는 날까지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되네요. 다만 선생님. 그러나 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소녀들이라면 으레 누리기를 원하고, 반드시 누릴 것만 같은 세상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만약 소녀가 잘못 생각했다면 이 세상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세상은 망가지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힘들어하지도 않은 채 흘러가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어긋나 보이긴 해도 사실은 속절없이 바라볼 정도로 온화하게

움직입니다. 네. 살아있습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껏 보내온 시간과, 그 세월에

함유시켜 쌓아온 노력은 덧없이 아무것도 아닌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 수채물감처럼

씻겨 내려갈 뿐일 테니까요.

 

 결국에는 아무 것도 얻은 게 없는 채로, 이렇게 쓸쓸하게 퇴장할 뿐이지만, 그래도

잊히는 것은 달갑지 않습니다. 잊힌다는 것은 허무한 종말입니다. 스스로 존재했다는

것조차 떳떳하지 못한 상황에 망각됨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궁극의, 세상으로부터의

작별일 것이니까요.

 

 때문에 지금 이렇게 알지도 못할 신음으로 힘들게 호흡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펜을

놀리려 하는 것입니다. 이 글자 하나하나가 유리코라는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기 위해

벼려지는 새파란 타치가 될 것입니다.

 

 소녀를 세상에 새기겠지요.

 

 헌데 그런 기대감과는 별개로, 이런 심리에 어떠한 기시감이 찾아옵니다. 오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서운한 느낌이지만, 반대로 절망하거나

한탄하지 않습니다.

 

 네, 유리코는 이미 실패했지요. 저는 한낱 작은 새에게 밀리어 다만 있는 것, 있으면

좋은 것 정도로만 인지되는 작은 버팀목이었으니까요. 다만 선생님. 선생님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나름은 특별한 버팀목이었던 것입니다.

 

 홀로 고백하건대, 소녀는 선생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유리코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비로소 갈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삭아 없어지듯 홀로

침잠하듯 잠겨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아, 명멸하듯 흔들리지만 유리코는 직시하고

있습니다. 제 세계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니, 아니,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롯이 유리코의 잘못일 것입니다. 호언장담하듯

내뱉은 통보는 그저 허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탈색되어 이젠 최후를 고하듯, 변명도 되지 못할 만큼 신랄하게 날을

세우지도 못한 채, 도리어 소녀를 싸구려로 만드는 종언을 읊습니다. 다만 선생님. 이

편린이 결코 유리코의 상처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소녀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선생님께서 아실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서 더 묘한 바램에 기댈 수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구식 태엽 시계처럼, 저의 시간은 빛바랬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돌아보지

않으실 터입니다.

 

 저도 장밋빛처럼 부풀어 올라 그러한 것을 희망하며 맥없이 웃어버리던 때가

있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텅 빈 화람처럼 실없이 쓸쓸하고 고될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겠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스스로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저는 이 애틋함이

없는 채로 사나운 노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그렇다고 느낍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작금의 상황에 와서 제가 어찌 우유부단하지 않고 있었겠습니까?

 

 유리코가 남기는 편지를 보게 된 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반응이

어떨지 쉽게 연상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제 와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녀의 이 공허로 가득 찬 심장에 찾아온 미증유의 손길이, 다시금

일렁이는 환희의 꽃으로 가슴을 수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렸던 펜이 힘을 냅니다. 상황에 이기지 못해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에 얽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불쌍한 코케시가 생기 있게 일어나 스스로

춤춥니다. 알 수 없는 열망이지만 열락은 아닌 듯 모호한 열기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구들을 수놓습니다.

 

 최후의 최후에 당도해서야 소녀는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정을 떨쳐내어 시선을

속이고, 마음을 보듬어 절규하는 일 따위 하찮은 것입니다. 눈물도 필요 없이 소녀를

흘려보냅니다. 모든 것이 끝끝내 화사하게 영글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몸을 옥죄는 환희를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제 스스로 새기어지는 편지지를 바라보니 단정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 사실 유리코는

이제 와서 행복을 바랄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제 스스로 굴러 떨어진 오욕의

시련들이 저를 쓰리게 만들지 않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선생님.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런 사심의 첨가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망가져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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