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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마을의 시들을 읽던 중 마음을 잡아 끄는 시가 있어 이렇게 감상문을 남깁니다. Yes-Man 님의 선례도 있고 하니 용기를 내어 보지요. 두서없더라도 용서 바랍니다. 본문은 [이곳] 을 참조해 주세요.

 

=======

 

시의 제목은 지극히 수학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삽입된 그림은 다름 아닌 [어린왕자]의 보아뱀 삽화입니다.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의 겉모습과 그 내부이지요. 그 삽화는 [어린왕자] 에서 화자의 그림 1호와 2호입니다. 어른들에게 보아뱀을 그려 주고서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보지요. 그림 1호를 본 어른들은 모자가 왜 무섭냐고 오히려 되물어 보고, 작중 화자는 그림 2호를 보여주었습니다. 다음은 그림 2호를 보고 난 다음 어른들의 반응에 대한 [어린왕자]의 대목입니다.

이번에 어른들의 반응은 왕뱀의 뱃속인지 거죽인지 하는 내 그림을 집어치우고 지리학, 역사, 수학 그리고 문법이나 열심히 공부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하여 여섯 살 때 위대한 화가로의 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정규분포' 라는 제목과 이 삽화의 에피소드가 결합되면 HelenKiller 님의 작중 의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여기에 시 마지막 사족처럼 덧붙인 '고3 기록' 이라는 글이 결합되면 그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모습은 정규분포표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대입수능시험에서의 9등급제 또한 정규분포 형태이지요.

 

수험생들은 모두 정규분포표의 어느 위치에 자신이 해당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화자의 의미를 빌리자면, 수험생들은 모두 보아뱀에게 잡아먹혀 있는 셈입니다.

 

[어린왕자] 에서 표현된 보아뱀은 코끼리를 머리부터 삼켰습니다. 따라서 목구멍으로 나오려면 뒷걸음질을 쳐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한걸음 한걸음이 버겁고 힘들 것입니다. 수험생처럼요.

 

화자는 보아뱀에게 소화되고 있는, 식물도 아닌 초식 '동물들' 을 걱정합니다. 제자리에 뿌리박혀 바람의 의지에 의해서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식물이기 보다는 어딘가를 바라볼 줄 알고 원하는 것을 직접 찾아 나설 줄 알며 꿈을 꿀 수 있는, 그러나 생명의 위협에 항상 긴장하고 있는 초식동물들입니다. 그들은 화자의 곁에 있는 낯익은 대상들입니다.

 

화자는 그들이 소화되어 배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물과 위액에 의해 더러워지고 상처받고 절망하여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보아뱀의 목, 1등급을 향해 힘겨운 뒷걸음질 치기를 바랍니다. 뱀은 한 번 삼킨 먹이를 쉬이 뱉어내지 않습니다. 내장을 신축하여 안으로 안으로 밀어 넣지요. 거기에 등 떠밀려 저항 없이 앞으로 걷다가는 언젠가는 한낱 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의지를 가지고 뱀에 저항하여 뒷걸음질 쳐야만 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자가 보아뱀에게서 벗어나 보아뱀을 잡는 것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소화되지 않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이겠지만, 좀 더 큰 의지를 가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미 보아뱀의 배설기관을 베어내고 탈출하여, 먹어도 먹어도 부족해지지 않는 풀을 찾아낸 초식동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덧 1.

수능 시험의 정규분포표는 왼쪽으로 갈 수록 높은 등급인 모양이군요. 제가 400점 만점 세대라 가물가물 하네요. 그림 1호와 2호의 좌우가 뒤바뀐 것과 마지막에서 두 번째 행을 보고 알았습니다.

 

덧 2.

 -1.88σ 와 -2.47σ 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뜻하신 바는 잘 이루셨는지요. 아니면 뱀의 목을 베어내고 꿈의 풀을 찾아 떠나셨는지요. 모쪼록 좋은 결과 있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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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1.01.13 17:16

     어떤 시인지 궁금해서 들여다보고 왔습니다 ㅎㅎ 정말 기발한 시 같네요. 타이머님 감상 아니었으면 절대 못 읽었겠죠. 좋은 감상 감사합니다^^


     전 타이머님과 조금 생각이 다른 게, 이 시 화자가 아무리 큰 의지를 갖는다고 해도 보아뱀을 잡는 데까진 이르지 못할 것같아요. 보아뱀은 화자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까지 집어삼킬 정도로 크고, 저항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수동적인 동굴이 아니라 능동적인 괴물입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조직적인 저항이 필요한데, 보아뱀 속에서도 먹힌 자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요. 좀 더 약한 초식동물들은 어깨쯤으로 밀려나고,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육식동물(시에서 나오진 않지만)은 보아뱀 턱밑까지 오를 수 있고...이런 치열한 경쟁에선 저들끼리 협력할 가능성조차 없죠.


     시에서 묘사된 수능 체계는 차라리 지옥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 유럽사람들이 생각하던 바로 그 지옥, 커다란 귀신이 죽어 들어온 영혼들을 남김없이 집어삼키는 그 지옥 말이죠. 설령 탈출한 사람들이 있다곤 해도, 그들은 초죽음이 되어 자기 경험담만을 세상에 남길 뿐 지옥 그 자체 목을 베진 못할 거예요. 타이머님이 말씀하시는, 목을 베고 나와 초지로 떠난 초식동물(육식동물도 아니고 심지어 초식동물)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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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2011.01.13 17:51

    시도 정말 좋지고 감상도 진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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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乾天HaNeuL 2011.01.17 02:38

    좋은 감상을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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