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Dragon Knight (4)

by 윤주[尹主] posted Apr 2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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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 부르셨습니까.”


숨이 고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막히는 것을 억지로 뱉어내는 목소리, 그 소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 직후에(그리고 문이 열리기 바로 전에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신전 복도를 잔뜩 울렸다) 레이븐이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모습이었다.


“놀랐나 보네? 급하게 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차라도 마실래?”


미르세린은 태연히 그에게 차를 권했다.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가 레이븐 몫의 찻물을 따르고 있었지만 레이븐은 전혀 차를 마시려고도, 그가 누군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제가, 방금 듣기로는 미르세린님께서…….”

“약간은.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야. 레이야 에겐 이미 말했던 거지만, 레이븐이 이제 왔으니 다시 말하는 것이 옳겠지?”


그제야 레이븐은 레이븐 몫으로 부은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 차를 건네는 레이야를 보며, 레이븐은 당연한 것을 생각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미르세린의 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레이야가 미르세린 신변에 관련된 중요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리 없었다. 레이야가 신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을 때, 레이븐은 이미 미르세린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미르세린의 주변 일은 자신이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미르세린의 무릎 위에서 쑥스럽게 사람들을 바라보던 아이는 자라 있었고, 이제는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빼앗아 가고 있었다. 레이븐은 어느새 자신이 레이야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갔다. 자신이 공유하던 미르세린의 비밀을, 어느새 레이야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그런 불편함은 더욱 커졌다. 레이븐 본인은 미르세린과 상하 관계 이상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래부터 자신은 떳떳한 인간이 아니니까. 하지만 미르세린은 떳떳하지 못한 자신을 측근으로 여겨 주었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이었다. 레이야가 없었더라면 그 행복은 아마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한 일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자신과는 달리 레이야는 떳떳한 인간이다. 본 출생을 알 수 없는 것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악마의 아이라는 소문까지 있었지만, 미르세린은 그런 소문들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며 오히려 신전 밖에서 맡겨져 키워지던 레이야를 신전 내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기까지 한 것이다. 그것이 헛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레이븐에게만큼은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레이야는 분명 악마다. 미르세린은 악마에게 현혹당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야를 보는 그의 눈은 서서히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정작 레이야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서 앉아 차 다 식겠네.”


미르세린의 재촉으로 레이븐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이야의 옆은 간신히 피해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면서도 그는 굳이 시선을 레이야로부터 피했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레이야뿐이 아니었다. 대륙의 입식 문화와는 다르게 이 조그만 섬은 좌식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레이븐은 어색하게 자신의 앞에 개인별로 놓인 작은 탁자 위로 왼팔을 조금 기대었고, 그런 레이븐을 보며 레이야는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남에게 숨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는 레이야만의 방어적인 습관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이곳에 온 만큼 확실하게 적응을 해서 보란 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어린 탓에 기억이 없다는 것은 변명이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과거를 되도록 버리고 싶었다. 과거에 얽매어 있으면, 그녀는 여기에 온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현재보다 더 매력적이었을 과거를 과감히 버린 그녀이기에 과거보다도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 나갈 필요성이 누구에게보다도 자신에게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미르세린은 자신의 과거를 캐묻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받아들여 주었다. 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미르세린을 돕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은혜, 부모조차 베풀어 줄 수 없는-사실, 그녀는 부모가 무엇을 베풀어 줄 수 있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은혜는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 지금 막 미르세린이 재차 이야기하려는 사안은, 그런 레이야 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되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다 해야 할 그런 과제가 레이야의 눈앞에 놓여 있다. 남은 것은 그 동안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갚아 버리는 것. 미르세린은 레이야를 들뜨게 만들었던 그 사안에 대해서 레이븐에게도 똑같이 설명해 주었다.


“주사님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사님 나름대로 이상하다는 것쯤은 느끼셨을 거야. 레이븐에겐 어떻게 이야기를 했기에, 후후, 레이븐이 이렇게 급히 뛰어온 걸려나??”


여유 있는 미르세린의 태도는 레이븐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여유 있는 태도는 안도감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함만 가중시킬 뿐이다.


“아침까지도, 지금도 확신은 없지만…….”


찻잔을 들던 레이븐은 다시 찻잔을 내리고 미르세린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긴장한 탓인지 목은 말라붙는 느낌인데, 미르세린은 이야기를 자꾸만 망설이고 있었다. 참지 못한 레이븐은 결국 차를 들이켰다. 하지만 동시에 미르세린이 말을 던졌고, 그 말을 들은 레이븐은 머금고 있던 찻물이 다시 그대로 밖으로 내뿜기 직전까지 간 것을 억지로 참았다.


“뭐, 뭐라고 하셨죠? 장, 장난치시는 거죠. 예? 설마…….미르세린님!”


레이븐을 바라보며 미르세린은 차분하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레이븐에게 이야기를 한 자신을 책망하는 표정이 살짝 숨겨져 있었다. 때문인지, 미르세린의 미소에는 왠지 어색한 점이 있었지만, 레이븐은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장난 아냐. 그리고 확신도 아냐. 단지 축제 때 일어난 이상한 일 때문에 내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아닐까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점은 확실한 거 아니에요!”

“그, 그렇지. 헤…….헤헤.”


미르세린은 허탈한 듯 웃었다. 절망감은 레이븐에게도 컸다. 미르세린이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 이상, 이 신전이 있어야 할 필요성도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 신앙을 이끌 신이, 하루 사이에 그들의 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레이븐은 다시 미르세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불꽃의 데칼트’는, 사라진 겁니까?”

“모르겠어. 응답하지도,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아. 더 이상 내 부름에 응하질 않아.”


그건 신에게도 재앙이야. 레이븐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신의 휘하에서 그의 힘을 대변하는 최고 존재는 총 일곱이었다. 신과 같은 빛에서 태어난 고귀한 자 둘, 케찰코아틀과 용황. 천사들과 드래곤 종족을 이끄는 것은 신과 함께 이 둘의 몫이었다. 나머지 다섯은 그러나 처음부터 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었다. 혼돈 내에서 빛이 있었던 동시에 어둠도 있었다. 그들의 경전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이 어둠에서 태어난 신의 대변인들을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했지만, 그 대변인들은 빛의 존재들과 천공에서 머물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땅에 서길 선택했다. 그리고 어떤 두 사람의 순교(미르세린은 그렇게 그들의 죽음을 불렀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둠 태생의 대변인들은 신과의 거리를 조금 더 멀리하고 인간과의 거리를 조금 더 가깝게 하려고 애썼다. 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은 데칼트. 천사와 용과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특징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는 고대의 존재들은 세계의 사방과 중심에서 인간을 보살피는데 힘을 다했다. 빛의 독선을 견제하던 어둠은, 그렇게 하여 힘을 잃기 시작했고, 이제 이 섬사람들의 신이었던, 그 어둠의 하나가 완전히 소멸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빛의 독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레이븐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다음의 말을 꺼내는 것을 자신의 의무처럼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마법이라면 해제법도 있을 겁니다.”


그가 희망을 건 것은 바로 신전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서들이었다. 하지만 미르세린은 쉽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의미를 이야기해 주는 것은 놀랍게도 레이야였다.


“그러한 마법은 이 신전 장서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찾아보기까지 해 보았지만…….”

“레이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어! 더군다나, 네가 무슨 수로 그 많은 장서들을, 그리고 ‘그 책’까지도 보았다는 거야!”

“레이븐.”


레이븐을 제지시킨 미르세린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물어 입 안을 데웠다. 떨리는 몸이 조금 편해지는 느낌에 미르세린은 한숨을 토하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레이야 는 이미 그 장서 모두를, 하다못해 표제만이라도 모두 알고 있어. 외우다시피 하고 있단 말이야. ‘최후에 오는 자의 서’까지도.”

“설마,”

“맞아, 레이야는 내 지식을, 내 신전력을 모두 알고 있어. 똑똑한, 아이니까.”


대신관의 신전력이 어떤 것인지를 레이븐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로고스Logos의 방식으로 자연의 문자를 읽었을 때, 마법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신전의 용량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마력까지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비록 그 마력을 마법 형태로 바꾸는 것은 사용자의 능력에 달렸고 신전 내에서만 가능한 힘이기는 하지만, 그런 위험한 능력은 항상 보호 장치가 있다. 대신관과 그의 후계자만이 그 위험한 능력을 익힐 수 있다. 일반 사람이라면 사용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마법을, 레이야가 알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레이븐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레이야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어쨌든, 아직 내 마력이 약해졌다는 것도, 더 이상 신이, 데칼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아직은 이 셋만 아는 비밀이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기왕 이렇게 된 거.”


미르세린은 쉽게 말을 했지만, 상황은 그리 쉽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데칼트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신전 내의 사람들 중에서도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미르세린이 주기적으로 정해 놓은 축제에서 데칼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워 할 것이고, 더 이상 신앙을 보낼 신이 사라졌다는 것 때문에 신전, 나아가 섬 전체가 위험해 질 수도 있었다. 별다른 통치 기구가 없는 작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실상 신전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신관들은 모두 관리들이나 다름없이 각종 잡다한 사무까지도 맡아 보고 있었고, 대신관인 미르세린의 결정은 장로들의 큰 반대가 없는 한 그대로 섬 전체가 취해야 할 행동이 되었다. 그것은 미르세린이 어떤 통솔력이나 군사력 따위가 다른 군주들처럼 강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불꽃의 데칼트라는 그들의 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세 사람만은 불꽃의 데칼트가 정확히는 미르세린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섬 전체가 혼란해지기 이전에 레이븐이 걱정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머리가 혼란해지는 것이었다. 한 순간에 많은 충격을-그 충격이 대부분 레이야에 관련된 것이었지만-받은 그의 머리는 쉽사리 그 충격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헛바퀴를 굴렸다.


“도대체가, 저로서는 혼란스러운 것들뿐이라…….어떻게 해야 할지.”


레이븐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동안 갑자기 뭔가를 생각해 낸 미르세린은 레이야에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레이븐에게까지는 도달하지 않는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레이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미르세린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과, 미르세린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 모두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그 당혹스러움을 겨우겨우 감당해 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미르세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한참 동안이나 듣지 못했다.


“예?”

“레이븐도 도와주란 말야. 블러드 크로스. 어디 있는지는 알지? 그걸 가져오라구.”


그걸 쓴다는 것은……. 레이븐은 혐오감이 가득 담긴 표정을 하였지만, 그 말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하여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면 야. 그는 방문을 나서 신전 어딘가로 향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즐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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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DK> 4화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 들어가기까지 지나치게 오래 걸리네요. 그런 부분에서 미숙한 구석이 엿보인단 생각이 듭니다;;

 암튼 본격적인 한 주의 시작이네요. 모레 <생일 축하해...> 마지막 화를 올리고, 주중에 <LDK> 5화를 올리고나면, 그때부턴 정상적으로 <시크릿> 연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시크릿>은 초고 작성을 끝내고 오늘부터 퇴고를 하려고 합니다. 연재는 퇴고 진행과는 상관없이, 초고 단계에서 끝까지 진행할 계획입니다. 도중에 중단되는 일 없이 나흘에 한 번 꼴로 올릴 수 있겠죠^^;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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