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서 버려, 그런 건."
"어째서?"
쓰레기통 앞에서 그는 멈칫했다. 손에는 영수증이 한 장. 좀 전에 점원이 준 것이다. 여전히 그는 야무지지 못하다. 보고 있자면 한숨만 나온다.
"방금 거 카드 쓴 거지? 이런 거 다 개인정보잖아. 악용될 수 있대두, 이런 거."
"그 놈의 잔소리. 어떻게 넌 결혼하자마자 아줌마 티 팍팍 내냐?"
"왜, 넌 아직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아서?"
혀를 빼꼼 내밀곤 되받아쳐주었다. 그는 하하, 웃어넘긴다. 웃기기도 하겠다.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그는 표정이 굳었다. 눈으론 만삭의 몸을 힐끔댄다. 감춰지지도 않는 커다란 배.
"고생이다, 한여름에."
"말도 마, 아주 죽겠는데."
"그, 애 아빤 누구야?"
저 눈치 없는 놈. 눈치를 주자 시선을 피한다. 명랑했던 분위기가 일시에 사그라졌다. 오, 저 망할 놈. 그 얘긴 왜 꺼내는데?
"우리 신랑, 당연하잖아?"
이 정도로 해둬라. 말로는 안했지만 그라면 이해했겠지. 그 증거로, 봐라.
"그렇지? 당연한 거지?"
한심한 화상 같으니. 다시 한숨을 푹 쉬어본다. 뱃속으로부터 세찬 발길질이 느껴졌다. 무더위 때문인지, 환청까지 들려온다. 아빠아, 아빠아. 배를 쓰다듬으며 애써 진정시켜본다. 아니야, 얘. 이 사람은…….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지 물었다. 벽에 기대곤 괜찮다고 둘러댔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어 뱉은 말이 그것보단 진심이었는걸.
"이젠 못 만나. 아니, 만나기 싫어."
목소리가 죄진 양 가라앉는다. 바보 같아. 떳떳하지 못할 게 뭐야? 하지만 몸은 마음 같지 않았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휘청거리는 폼이 그렇게 보였다.
"그래, 그렇겠지."
남자는 두 말 않고 떠났다. 뒷모습이 몹시도 처량해 보였다. 내가 너무 매몰찼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폐기처분할 추억이었잖아? 철모르던 때 불장난 따위는.
그렇게 우리가 만났던 일은 함께 있으며 쓴 영수증과 함께 조각 조각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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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오늘도 나갔다 왔어?"
퇴근하자마자 남편이 하는 말. 부엌에 있으면서 속으론 뜨끔했다. 내다보지도 않고 대충 둘러대 보았다.
"응, 잠깐 산책. 근데 왜?"
"어딜 그렇게 자꾸 나가?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말하는 게 어쩐지 추궁하는 양 들린다. 괜히 속에서 짜증이 치민다. 당신이 걱정하는 사고가 뭔데? 내가 다치는 거? 애가 잘못되는 거? 굳이 말로 꺼내놓진 않았다. 그가 할 대답이야 뻔 하니까.
일부러 대꾸 않고 조용히 있었다. 흐흠. 헛기침 소리가 침묵을 깼다.
"나 안 볼 거야?"
어디가 이뻐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남편은 히죽 웃고 있었다. 커다란 과일바구니를 손에 들고서.
"어떤 거 좋아하는지 알아야지. 애 가지면 과일이 땅긴다며?"
"고마워, 자기."
치밀어 오르던 게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원래 이런 남자였다. 눈치 좋고, 비위 잘 맞춰주고. 남편 볼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이었다. 배에서 또다시 태동이 인 것은.
"어머!"
"왜 그래?"
남편은 이상한 듯 물었다. 또 한 번의 발길질. 이번엔 좀 전보다 세찼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편은 내 기색을 알아차렸다.
"여기 앉아. 많이 심해?"
"좀. 왜 그러지?"
"자기도 아는 건가? 나올 때 가까워졌다고."
"아직 두세 달이나 남았는데?"
"그거야 예상일이잖아. 어이쿠, 또 찬다."
태동을 느끼며 남편은 시시덕댔다. 나는 마냥 웃지 못했다. 꺼림칙한 태동이었다. 진동은 거칠었고 짜증스러웠다. 흡사 뭔가에 화내는 듯했다. 설마, 정체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남편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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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얘기했던 단편입니다.
3회 정도 나누어서 연재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 두 회 분 정도 더 올릴 계획이네요.
뻔하지 않은 얘기라면 좋을 텐데 어떠려나요;; 아무튼 재미있게 봐 주세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글로 쓴 것이 소설이라는 정의를 내렸을 때 뻔한 소재의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소설가들이 가장 탐내는 것 중에 하나라고 하죠. ^^. 역시 또 뒷 이야기가 기대되는 군요!!
그런데 이거 불륜인가요? 불륜이군요? 불륜....사랑과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