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Dragon Knight (2)

by 윤주[尹主] posted Apr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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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또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

 시내의 한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버스 손잡이를 쥔 채로 서 있다. 그녀의 왼손은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그녀의 손을 휘감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누구래, 그 할아버진?’


 여자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긴 모르는 사람이 대뜸 자신을 불러, 자신이 불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통은 늙은 사람이 정신을 놓았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고 없었던 일로 넘겨 버릴 것이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그 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진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상야릇한 기분이 자꾸만 여자의 신경을 자극하는 탓에, 손잡이를 잡은 여자의 손은 다소 신경질적인 면이 있었다.


 ‘빌릴 거라구? 그건 뭐야? 난 그 할아버지를 본 적도 없단 말야.’


 이윽고 정신을 차린 여자아이는 붉은 기운을 잔뜩 휘감은 채 빛나는 그 구슬을 황급히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여전히 그녀를 의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예희. 왜 그런 일에 자꾸 신경 쓰는 거야. 바보같이.’


 누군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감각이 무딘 아이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자책한다.




 한편, 축제 준비가 한창인 이른 새벽 섬의 풍경.

 새벽 첫 배가 노를 저어 힘겹게 해안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시기에 돛은 불필요했고, 때문에 배 위의 돛은 거의 완전히 접힌 상태였다.

 아직 해안까지는 조금 거리가 남았음에도 갑판 위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섬의 해안에서부터 신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불의 행렬을 보기 위해서였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기지개를 펴며 섬 전체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문득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거대한 성화대를 향하고 있었다. 인간의 불로는 절대로 불이 붙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성화대였다.


 “좋은 아침이군.”


 사내는 중얼거리며 매의 눈처럼 매섭게 성화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잠시 후 희한한 광경 하나가 들어왔다. 섬 뒤편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거대한 날개가 그 광경이었다. 새벽녘은 아직 태양 세슘의 빛이 바닷물 위로 솟구쳐 나와 충분히 만물을 비출 정도로 밝지는 않았지만 드래곤 날개를 한 여자의 모습을 식별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잠시 주변을 선회하던 여자는 이윽고 한 줄기의 강렬한 불꽃을 성화대를 향해 뿜었다. 거의 동시에, 거대한 불꽃이 성화대로부터 포효를 내지르며 힘차게 솟아올라 흑남빛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장관을 바라보던 그가 씨익 하고 웃었다. 축제의 불길은 잠이 덜 깬 새벽 공기마저 몰아세우며 거세게 타올랐다.




 다시 예희의 시선.

 예희는 접시 위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성냥개비가 접시 위에서 일정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성냥개비로 벌여 놓은 허술한 진안에서 붉은 구슬은 빙글빙글 제 자리를 돌았다.


 “어떠한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아?”


 예희가 진의 다른 문으로 구슬을 굴려 놓더라도, 구슬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태극의 어떤 속성도 구슬의 속성과 부딪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리라. 결국 예희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인간의 것이 아니야.’




 같은 시간, 미르세린의 축제 장소.

 신전의 문은 전날에 이어 바깥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빵과 포도주의 수확제. 두 가지의 음식은 다른 음식들과 함께 신전을 찾은 모든 손님들에게 제공되었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신전 안은 축제의 열기로 완전히 점거 당했다.


 “여러분께서는,”


 한참 달아오른 축제의 장 한 가운데에 미르세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신전 앞의 널따란 공터를 점거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곧 정면의 신전 건물 앞에 임시로 마련된 단상 위로 향했다.


 “이곳에서, 혹은 타지에서 이 수확제를 위해 오셨습니다. 혹은 이교도 분들께서도 이 자리에 참석해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쁨과 유대감을 함께 누리는 인류, 유니안이며, 이 세계의 소중한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나 모든 부차적인 것들보다도…….”


 미르세린의 말끝은 갑자기 일어난 사람들의 술렁거림으로 인해 완전히 뭉그러졌다. 특히 교황과 성황이 이끄는 원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더욱 더 술렁거렸다. 절대적인 믿음을 강요당하는 그들에게 독자적인 한 종교의 수장인 미르세린의 말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같은 원교의 신을 믿기는 하지만, 이 섬사람들은 원교 신앙과 불의 힘에 대한 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앙의 중심에서 그들을 이끄는 것이 미르세린이었다. 정작 자신들은 교황에게서 이단 판정까지 받았으면서도 그들은 원교와 모든 종교에 대해서 손을 내밀고 있다. 하지만 충격은 원교 신앙 자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에게도 아직 2년이 채 되지 않은 가르침은 아직 완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라면 그들을 받아 줄 수 있지만 신앙자로서 라면…….하지만 2년 전부터 미르세린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포용적인 교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반응에도 미르세린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나아가 신족, 마족, 유니안, 다른 종족들. 이들 모두가 저마다의 존귀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아니 하늘 위에서 지상의 모든 것을 똑같이 점으로만 인식하는 드래곤 일족까지도 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차피 모두는 빛에서 혹은, 어, 그늘에서 온 자들인데도 말입니다.”


 미르세린은 마지막 말을 뱉기를 조금 망설였다가 결국 거슬리는 단어를 고쳤다. 아직 사람들은 자신들이 빛이 아닌 혼돈에서 탄생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제 딴에는 그래도 더 유연한 단어를 택한 것이라는 것이 미르세린의 생각이었다. 결론은, 하면서 미르세린은 자신의 말을 끝맺었다.


 “결론은, 이 세계 누구라도 불필요하게 자신의 피를 흙바닥에 헌납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그리고 웅변은 훌륭했다. 사람들은 조금씩 박수를 치며 동의의 뜻을 내비쳤지만, 아직 그들, 심지어는 미르세린 자신조차도 그 이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론이 행동으로 변하기는 힘들다. 그 진리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사실이 신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버려지는 하급 드래곤의 시체였다. 드래곤 일족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 하급 드래곤은 드래곤 족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부모, 혹은 조부모의 혈통보다는 마력도 힘도 월등히 떨어져 드래곤 족에 의해 버려지다시피 한 자들이었다. 다른 종족들에게도 로-게슐링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드래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몬스터 정도로만 여겨졌고, 이 신전에서는 신관들의 훈련에 사용되고 있었다. 미르세린 자신에게조차 스스로의 교리는 아직 완전히 몸에 베이지 못한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 아까운 피를 뿌린 불쌍한 망령들에게 첫 잔을 바치며 축제를 시작하겠습니다.”


 곁에 있던 자에게서 포도주 잔을 건네받은 미르세린은 자리에서 일어서 잔을 높이 들었다. 하늘은 아직 맑고 평화로웠다.




 돌연 구슬이 회전을 시작했다. 옆에서 숙제를 하던 예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뭐 때문에?”


 성냥개비로 쳐 놓은 진은 이미 완전히 붕괴된 후였다. 붉은 빛이 접시 위를 빠르게 도는 것을 본 예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더니 엉겁결에 손에 잡힌 문손잡이를 돌렸다.


 “!! 왜, 왜 안 열리지?”


 아무리 힘을 가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예희는 곁눈질로 구슬을 보았다. 구슬은 어느새 책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포감에 예희는 문을 더 세차게 흔들었다. 문은 좀처럼 열릴 기색이 없었다. 예희의 마음속에서 공포가 커져가는 것과 보조라도 맞추듯 구슬은 점점 더 몸집을 불려갔다. 손잡이를 붙들어 비틀면서 예희는 절망했다. 


 “더 이상은…….”


 구슬은 마침내 예희의 등에 닿을 정도로 커졌다. 예희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끝없이 추락해갔다.




 ‘응?’


 미르세린의 손이 포도주 잔을 조금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허공을 올려다 본 그녀는, 그녀의 눈동자는…….


 “!!”

 “미르세린 님!”


 회백색이랄까, 아니면 붉은 색이랄까 하는 종류의 빛이 허공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단상 위의 미르세린을 그대로 관통시켰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그녀의 귀에, 그보다도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 이상한 복장의 여자아이가 그녀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다!!


 ‘누구지?’


 현기증이 이는 듯,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온 세상의 빛이 암전된 느낌을 받으며 미르세린은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갑작스레 쏟아져 내린 빛줄기에 신관이 맞고 쓰러지자 사람들은 겁에 질려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동요하고 있는 건 의외로 그 모퉁이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저 사내이지 않을까.


 “실패인가, 치잇.”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그의 앞에서 멈췄다. 뼈의 갑주로 무장한 여섯 마리의 말의 세찬 숨소리는 그의 귀를 귀찮게 한다. 그는 서둘러 예희의 껍데기 몸을 안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른 그가 단상을 노려보며 마부를 재촉한 뒤, 그의 행방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보랏빛 구름-섬 전체가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 꽤나 시끄러운 축제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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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DK>, 편의상 이렇게 부를 생각입니다, 두 번째 화 올립니다.
 준비중인 단편은 모레 <시크릿> 대신 올릴까 합니다. 당분간 이 글, <LDK>와 함께 그 단편을 연재할 계획이라서, <시크릿>은 길면 2주 가량 연재가 중단될 거 같네요. 비축분 더 충전해서 2주 후, 아마 5월 1일쯤이 될 거 같은데, 그 때 다시 연재할게요;

 이번 화는 장면 전환이 많았네요. 게다가 제대로 문장을 만들어 쓴 것도 아니어서, 일부는 도저히 안 되겠기에 고쳤습니다. 원본보다는 좀 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아마도요;;

 그럼 남은 하루 좋은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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