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에 대해 읽다

by 윤주[尹主] posted Mar 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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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이 백석이 쓴 것이란 사실 외에 나는 그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인터넷에서 그 시를 찾아 읽곤, 나는 곤혹스러웠다. 과연 이 시 어느 부분이 그토록 그녀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그녀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기분으로 이 시를 읽었을까? 그녀만큼이나 낯선 시를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놓고 있으려니, 문득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최근엔 러시아 소설들을 보고 있어요. 왠지 마음에 들었거든요."


 좋아하는 책에 대해 묻는 내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러시아 소설이요, 하고 한 마디 거들고서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금세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했다. 내가 아는 러시아 작가는 톨스토이뿐, 그것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따위 우화풍 이야기밖엔 읽은 적이 없어서였다.

 자기 책 취향에 대해 숨기는 기색도, 그렇다고 딱히 뽐내는 기색도 없이 그녀는 무덤덤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 입을 통해 솔제니친,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인명이 흘러 나왔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거장과 마르가리타>처럼 낯익은 제목과 함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같이, 전혀 낯선 제목도 혼재되어 나왔다. 그렇다고 그녀가 러시아 작품들만을 읽는 건 아니라서, 개중엔 카뮈의 <암병동> 같은 제목도 간간히 등장했다. 그 때 그녀는 웃으면서, 최근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고 있는데 제법 재미있다고 추천해 주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안 거지만, 그녀가 추천해준 <첫사랑>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풋풋하고 상큼한 이미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섬뜩하고 냉소적인 이야기였다.

 그녀가 줄줄 읊어대는 도서 목록이 내겐 너무 낯설어 기가 죽었던 걸까. 도중에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기까지 난 그녀 앞에서 단 한 마디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선지, 그녀에게 던진 내 질문은 다소 짓궂고, 보기에 따라선 은근 가시 돋친 말이라고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혹시, 그런 책은 안 좋아하세요? <갈매기의 꿈>이라든지, <어린 왕자>같은."


 제 딴에는 우스갯소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이후 돌아온 그녀 반응은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잘 모르겠는걸요.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내게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맥이 풀렸다.

 이런 그녀지만 그래도, 리모델링 후 재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교보문고를 함께 찾았을 때 문구 코너에서 한동안 무밍 캐릭터를 홀린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역시 여자는 여자구나 싶기도 했다.




 반대로 그녀가 내게 좋아하는 책이 뭔지 물었던 때도 있었다.


 "<살인자의 건강법>이란 책 아세요? 아멜리 노통브라는 작가가 쓴 건데."


 낯선 작가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아마 저도 모르게 한 동작이었을 것이다. 분명 그녀는 그 책에 대해서도, 작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는 듯했다.

 그 다음 번 만남 때 그녀는 왠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못마땅한 듯 자꾸 나를 쳐다보면서, 할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그녀는 내가 소개한 그 책을 읽었다고 했다.


 "어째서 그런 작가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어땠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묘한 표정을 하고선 이렇게 답했다. 표정의 의미야 어쨌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는 그 작가를 좋아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비슷한 일은 이후로도 몇 차례나 더 있었다. 나는 <철도원>과 <달콤한 나의 도시>를 좋아했고,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신선하게 보았다. 반면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이 대책 없이 낙관적이고 훈훈한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최소한 책 취향에서만큼은 나와 그녀가 교점 하나 없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던 셈이다.

 뭐, 그래. 솔직히 나와 그녀 모두가 좋아하는 소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모종의 동기로 <폭풍의 언덕>을 읽게 되었을 때 나도 그녀도 이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품은 소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것은 지독히 '여성적인 비극'이었다. 감상적이라는 점에서 여성적이었고, 엇갈리는 남녀의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란 점에서 비극적이었다. 나와 그녀가 동시에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이 책의 여성적인 면이 끌렸고, 그녀는 그것의 비극적인 측면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느새 우리는 이 책 내용을 가지고 서로 진지하게 감상을 나눌 정도로 빠져 들어 있었다. 그녀는 <폭풍의 언덕> 바로 그 책 내용에, 그리고 나는 <폭풍의 언덕>에 푹 빠져 있는 그녀에게.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녀는 비극을 좋아하는 걸까? 왜 그녀는 그런 얘기들을, 음침하고 암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책들을 좋아하는 걸까?




 그게 언제였더라, 어쨌건 꽤 늦은 저녁이었단 것만은 기억이 난다. 그녀 전화를 받았을 때, 난 이전에도 대여섯 번은 넘게 보았을 <왓 위민 원트>를 배꼽잡고 낄낄대며 보는 중이었다. 그녀 말에 따르면 그것도 일종의 '재능'이었다. 수십 번을 보고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양, 진심으로 웃고 즐기는 건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 표정만은 지독이도 한심한 꼴을 보고 말았단 얼굴을 하고선.


 "지금 나올 수 있어?"


 어딘데, 하고 묻는 내 말이 건성으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막 접어들던 찰나였다. 계단에서 위층 발코니에 선 여주인공을 바라보며 멜 깁슨이 지극히 고전적인 구애를 하는 장면이 묘하게 낯설어 전화 받다 말고 무심코 화면에 한눈을 팔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째선지 목소리에 평소와는 달리 힘이 빠져 있었다.


 "우리 집 옥상."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 집은 15층 계단식 아파트였다. 한밤중 늦은 시간 어째서 옥상 문이 잠겨 있지 않았던 걸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대충 걸칠 옷만 주워 입고 뛰어 나갔다. 가는 동안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정신없이 맴돌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최상층으로, 다시 계단을 걸어올라 옥상 문을 열어젖혔을 때, 건물을 타 넘는 세찬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런 날씨에, 여긴 대체 왜 올라 온 거람? 주위를 두리번대다 보니 옥상 한쪽 모서리에 그녀 모습이 보였다. 똑바로 서서 발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녀가 그날따라 유독 애처롭고 가냘파 보였다.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와.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을 때 나는 다짜고짜 그 말부터 했었다. 그녀는 괜찮다면서, 되레 나를 자기 쪽으로 불렀다. 다가가면서 발아래 세상을 언뜻 보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까마득한 아래 주차장을 빼곡히 채운 자동차들이 죄다 장난감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야, 이런 데로 불러내고. 그것도 이 늦은 시간에."


 애써 태연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먼발치를 내려다보며,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있지, 오늘은 내 남은 생애 가장 최고의 날이야."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제 할 말만 계속 이어갔다.


 "마찬가지야. 어제는 오늘보다 더 나았고, 앞으로 내게 어제보다 더 나은 날은 찾아오지 않겠지. 나뿐만 아냐.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어째서 그렇게 부정적인데?"


 참지 못하고 끼어든 나를 보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부정적이라니? 그래,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생각해 봐. 오늘이 남은 생애 가장 최고의 날인 건 나뿐만이 아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그렇다는 거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바닥을 향해 끝없이 추락해가는 존재인걸."


 그녀 얘기를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영화 <해프닝>에서 본 한 장면, 고층건물들로부터 사람들이 비 오듯 길거리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제멋대로 떠올린 상상에 소름끼쳐하며 나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이 부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다고 생각해? 그건 아마도 맨 처음 태어났을 때였을 거야. 그렇다면 말이야, 이런 생각도 들 법하지 않아? 누구나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한다면, 누가 더 앞서 가든, 누가 약간 더 뒤쳐지든 별 상관없다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얼핏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책 이야기 외 자기 얘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있지, 남들이 자꾸 나를 앞질러간단 기분 느껴본 적 있어? 난 줄곧 제자리걸음하는 것만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어느 샌가 내가 뒤쫓아 갈 수 없을 정도로 멀찍이 앞서가는 거야. 성적이 되었건, 컴퓨터가 되었건, 아니면 다른 기술이 되었건.

 처음엔 모든 사람들이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기어 올라간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자꾸만 초라해 보이더라? 계속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자신도 없어지고……."


 그래서 모두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그런 상상을 품었다.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하며, 이해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비극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선사한다. 어째서 그녀가 이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어느 정도 납득은 되었다. 하지만 역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난 너무 겁쟁이라 그녀가 그리는 세계의 모습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바닥을 향해 추락해 간다는 건 내 입장에선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병적인 시선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억지를 부린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사실 떨어져 내리지도, 기어오르지도 않는단, 그저 자기 위치에서, 적당히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갈 뿐이란 그런 억지.




 이렇게나 다른데도 서로 사랑한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책 읽는 취향도, 성격도, 주위를 바라보는 관점도 모두 다른데도 그녀는 나를 여전히 좋아한다. 게다가 나도 역시.

 대체 난 그녀 어느 구석이 마음에 든 걸까.

 최근에 만난 그녀는 그리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비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이 공평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점도, 심지어 여전히 러시아 작가들 소설을 찾아다닌다는 사실마저도.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그녀 무릎 위에 책 한 권이 올려 있었다. 체호프 작 <귀여운 여인>. 그녀가 요즘 읽고 있단 그 책을 어쩐지 나도 읽고 싶단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아니지, 정말 나는 그녀가 읽는 책 내용이 궁금했을 뿐이었을까?

 어쩌면 책이 아니라 그녀 본인을 찬찬히 정독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정말이지, 받아들일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받아들여보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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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써보려 했다가 컴퓨터가 고장나서 놔두었던 한 화짜리 단편입니다;;
 컴퓨터는....과로 및 관리 부실 진단을 받아서 부품을 교체하게 되었네요; 어떻게든 되는 게 어디에요;; 좀 아깝다 싶은 건, 제가 기계에 대해서 잘 몰라서, 돈을 들여 고쳐야 했다는 것 정도일까요...

 암튼 내일 오후 다시 또 뵐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