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신선식품을 보관하는 방법

by 시우처럼 posted Mar 0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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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식품을 보관하는 방법

 

여긴 대체...”

 

이상한 방이었다. 현수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왜 자신이 이런 낯선 장소에 누워있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사방이 하얀 방. 벽에는 창문도 작은 문이 달린 흔적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방이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것이 희기만 해서 어디가 벽이고 바닥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모서리나 벽이 꺾어지는 부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사방이 평면처럼 느껴졌다. 마치 음영법과 원근법이 상실된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멍한 정신을 조금 더 가다듬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환하기만 한 방안의 조명에 눈이 부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수는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가벗고 있어?’

 

그들은 왜인지 모두 알몸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현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지만 현수 역시도 입고 있었던 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

 

자신이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현수는 급히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가렸다. 무언가 가릴 만한 것을 주변에서 찾았지만 방안에는 발가벗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이상한 분위기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 옆에 가만히 누워있는 희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왜 그녀가? 그녀 역시도 현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누워있었다. 순간 현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여태껏 벌거벗은 채로 나란히 누워있었단 말인가. 민망해진 현수는 다시금 몸을 덮을 무언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역시나 주변은 황량하기만 할 뿐이었다.

 

현수는 난감한 마음에 희진을 흔들어 깨웠다. 애당초 그와 그녀가 이런 장소에 누워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희진과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라면 혹시 무언가 알 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으음...”

 

깨어나려는 듯 희진이 인상을 구겼다. 이윽고 감겨있던 눈꺼풀이 파르르하며 힘겹게 들어 올려졌다. 그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무기력하게 좌우를 오갔다. 희진의 시선이 마침내 현수 쪽을 향했다.

 

벌써 도착한 거예요?”

 

그녀가 두 팔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몸을 쭈욱 잡아당겼다. 사실 이 상황에서 스트레칭이라니 황당한 마음에 쓴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애당초 느긋한 성격의 그녀였다. 더불어 상황파악도 늦은 편이었다. 설마, 아직도 차 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일어나보실래요?”

? 일어나라니... ? 그런데 왜 제가 여기 누워있죠?”

 

희진은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하지만 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희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현수 역시 왜 자신들이 여기에 누워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에게 뭐라도 물어볼 참이었는데.

 

! 현수씨. 왜 옷을 다 벗고 있는거에요!”

 

현수의 벌거벗은 몸을 본 희진이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눈을 가렸다. 하지만 발가벗은 것은 현수만이 아니었다. 희진 역시도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심각하게 결핍되었음을 느꼈으리라.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여전히 두 눈은 꼭 감기어진 상태였다.

 

나한테,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반면 현수는 여전히 상황파악 못하고 엉뚱한 곳에 신경 쓰고 있는 희진의 모습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짓이라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두 팔을 꽉 움켜줬다. 지금은 옷을 벗었느니 벗겼느니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닌데.

 

희진씨, 눈 좀 떠봐요! ?”

“...”

제발요. 뒤돌아있을 테니까. 부탁이에요.”

 

현수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앉았다.

 

자요. 방금 뒤돌아 앉았으니까. 알았죠?”

 

하지만 이런다고 그녀가 눈을 뜰까? 평상시에도 늘 이상한데서 고집을 부리는 그녀였다. 장담할 수는 없었다.

 

옷은, 제가 건드린 게 아닙니다. 저도 눈을 떠보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희진씨만 옆에 누워있고... 게다가 회사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희진이 듣던지 말든지 현수는 간략하게 현재 상황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믿어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밖엔 그녀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

 

여긴 대체 어디죠?”

 

마침내 희진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행히 주변을 살펴본 모양이었다. 정상인이라면 이 이상한 방의 풍경을 쉽게 받아들이진 못할테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 여기였죠.”

 

현수의 말에 희진이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마 그녀 역시도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무척 애를 쓰고 있으리라.

 

희진씨는 제 뒷좌석에 앉으셨었죠? 혹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나는 거 없으세요?”

 

이번에도 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개를 좌우로 저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뒤돌아 앉은 탓에 현수가 그것을 보지 못한 걸지도. 그러한 희진의 태도에 현수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쪽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는 한은 이쪽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것도 무의미했다.

 

혹시 꿈일지도 몰라요.”

 

대답 없는 희진에 대한 현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마침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

 

뜬금없는 그녀의 선언에 현수는 당황한 나머지 순간 할 말을 잃고 되물었다.

 

체육대회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고 그래서 저도 자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꿈속에서 만난거죠. 우리 둘이.”

 

그야말로 논리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추리였다. 꿈이라니. 이렇게 생생한 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현수는 작게 한숨을 내쉈다.

 

그런데 왜 저희 둘만 이곳에 떨어진 거죠? 다른 회사 사람들도 자는 사람은 많았을 텐데.”

그건...”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현수는 볼 수 없었지만 희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꿈이든 현실이든, 더욱이 이런 상황이 꿈일 리는 없겠지만, 어찌됐든 이 곳에서 벗어날 방법부터 좀 찾아봐야겠는데요?”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향해 손을 내 밀었다.

 

일단 옷 같은 거리도 좀 찾아야 할 것 같네요.”

 

희진은 어느새 눈을 뜨고 현수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뒤돌아 선 채였다. 그녀의 눈앞에 현수의 탱탱한 엉덩이가 잡힐 듯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꿈이라기엔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현실일 리가 없었다. 희진은 분명히 버스 안에서 자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이런 상황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과 함께하는 조금은 야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꿈. 그녀는 조금은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현실이라니. 이렇게 밝은 곳에서 벌거벗은 서로의 몸을 확인하는 일은 현실에선 절대로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희진은 차라리 꿈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그가 내만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꿈이니까,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겠지. 다른 꿈들처럼 금세 잊혀지겠지. 하지만 언제 다시 그의 손을 잡아 볼 수 있을까. 현수의 체온을 확인하듯 희진은 다시 한 번 마주잡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일단, 나가는 문부터 찾아보죠.”

 

두 사람은 일단 출입구를 찾아보기로 하고 이리저리 방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현수가 아무리 뒤져보아도 출입문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문이 존재하기 위한 벽이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았다. 벽의 존재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걷다보면 멀리 펼쳐진 흰색의 공간이 갑자기 내 몸에 쿵하고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현수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침 그의 이마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출입구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방 안에 사람을 가두려면 반드시 밖에서 이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있어야만 한다. 교묘하게 감춰져 있을 뿐 잘 뒤지다 보면 분명히 출입구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현수는 다시 한 번 온 사방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훑었다. 조그만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히 그의 팔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확인했다. 그러나 작은 틈새 같은 것조차 현수의 손가락 끝에 걸리지 않았다.

 

벽이 아니면 천장? 아님 바닥에 출입구가 있는 건가?’

 

현수는 도저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수와 희진을 제외해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방안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꾀나 오랫동안 이곳에 방치된 모양인지 다들 축 늘어져있었지만 그들도 분명 사람이었다.

 

대체 누구야? ? 무슨 이유로 이렇게 사람들을 가둔 거지?’

 

미친놈이 분명했다. 이런 짓거리를 할 놈은 그런 부류의 인간밖에 없었다. 돈 많은 미친놈. 분명히 어딘가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언제까지, 언제까지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저기요, 현수씨. 저 사람들 좀 이상해요.”

 

희진의 목소리에 현수가 무심코 뒤돌아보자 그녀가 깜짝 놀라듯 몸을 두 손으로 가렸다.

 

, 죄송해요.”

 

당황한 현수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괜찮아요. 그보다 저기 왼쪽 벽에 기대 누워 있는 사람요.”

 

잠시 말이 없던 희진이 그들의 왼쪽 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 여전히 두 팔로는 애처롭게 몸을 가린 채였다. 뒤돌아 서 있던 현수도 그녀를 따라 두 눈을 천천히 왼쪽으로 향했다.

 

...”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현수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살펴보았다. 하지만 현수가 보기에는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 외에는 크게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냥 축 늘어져 있는 거 빼면 별로 특이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희진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럴리가요. 다시 한 번 잘 보세요. 저 사람들 팔이나 다리가 좀 뭉그러져 보이지 않나요?”

 

대체 무슨 소리를. 현수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팔다리가 뭉개진 사람들이라니. 아까도 분명히 봤지만 저 사람들은 분명 정상적인... ?

 

순간 현수는 놀란 나머지 제일 가깝게 쓰러져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축 늘어진 팔을 들어보였다. 이럴수가. 희진이 말한대로 그들의 팔을 이상한 모양으로 뭉그러져 있었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윤곽이 희미했다. 옆사람도, 그 옆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팔다리가 온전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머리 부분이 크게 훼손당한 사람도 있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이봐요!”

 

현수는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힘주어 흔들었다. 한참을 흔들어 깨우자 마침내 그의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하지만 시체처럼 널부러진 그의 눈동자는 현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허공을 맴돌았다.

 

여보세요. 정신이 좀 드세요?”

나는...”

 

그가 바싹 말라 부르튼 입술을 간신히 띄었다.

 

나는 이제 죽고 싶어. 그러니까 이제 날 죽여줘. 제발...”

 

그가 허우적거리며 현수를 붙잡았다. 현수는 순간 섬뜩한 느낌에 그의 뭉그러진 손가락을 뿌리치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에게서 비롯된 절망과 좌절이 현수의 온 몸을 전율처럼 감싸고돌았다. 정상이 아니었다. 이 방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정상이 아니었다.

분명 완전히 돌아버린 놈이 분명했다. 사람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납치에 감금. 어쩌면 사람까지 죽이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 역시 저렇게 될지 모른다. 불안한 예감이 현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현수는 주먹을 꽉 쥐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저기 어딘가에서 희희낙락하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그의 적의에 가득 찬 목소리에 뒤쪽에 서있던 희진이 깜짝 놀라 현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니가 이러고도 온전할 것 같아? 회사 사람들이 우리 둘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가만있을 것 같냐고. 그리고 이 사람들 가족들도 가만히 있을까? 넌 언젠가 잡히게 되어있어. 알아?”

 

감정이 격해졌는지 말을 마친 현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온 것은.

 

대단하군, 대단해. 이번엔 제법 유통기간이 길겠는데?”

 

현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아니, 애초에 방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뒤돌아선 그의 눈에 황급히 몸을 가리는 희진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금발 머리를 한 남성이 싱글거리며 서있었다. 이 놈이다. 이 놈이 범인이야. 현수는 그 남자를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황량하기만 풍경 속에서 남자의 옷차림은 그 만큼 눈에 띄었다. 무릎언저리까지 내려오는 흰색 연미복에 흰색 나비넥타이, 윗주머니엔 흰색 코사지 까지. 어지간히도 흰색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간에서 혼자 옷을 입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심증을 굳히는 증거였다.

 

너냐?”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방긋 웃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네 놈이 우리를 여기에 가둔 놈이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징그럽게 웃기만 한다면 그 면상을 아주 아작을 내리라. 자기도 모르게 현수의 이빨이 으드득 갈렸다.

 

뭔가 상당히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오해라고? 그래, 어디 턱이 으스러져도 그따위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보자.”

 

현수는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꽉 움켜진 주먹을 녀석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비록 아마추어였지만 몇 년 전까지 복싱을 배웠던 현수였다. 그의 스트레이트가 제법 매섭게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순간 남자의 모습이 현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주먹이었던지라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려 자세가 휘청했다.

 

어이쿠. 갑자기 폭력이라니. 깜짝 놀랐네요.”

 

당황해하며 자세를 바로잡는 현수의 뒤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저리로 움직인 거지? 현수는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역시 이건 꿈이야. 어떻게, 방금까지도 현수씨 앞에 있었는데.”

 

희진이 놀란 얼굴로 또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아직도 꿈이니 뭐니 하는 그녀의 소리에 현수는 다시 뒤돌아서며 인상을 구겼다.

 

꿈이라니. 숙녀분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 녀석이 은근슬쩍 희진에게 다가서며 능글스럽게 웃었다. 희진도 낯선 남자가 성큼 얼굴을 들이밀자 놀라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당장 그녀한테서 떨어져!”

 

남자는 그녀를 향해 숙여진 상체에서 머리만 살짝 돌려 현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피더니 현수를 보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실 당신네들에게 그다지 관심은 없습니다만, 제 직업이 이러한지라.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하거든요.”

 

남자는 흰색 구두를 뚜벅거리며 현수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당신, 이름이 현수라고 했었지요? 그럼, 현수씨는 계란이나 우유하고 대화를 합니까?”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계란이야기를 왜...”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상황은 저에겐 계란하고 우유한테 말을 거는 거와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것 같이 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요즘엔 법적으로도 이런 걸 무척 따지거든요. 하지만 절차라는 게 아시다시피 꾀나 까다로워서.”

미친 새끼. 완전히 미쳤구나?”

 

현수는 이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당신들의 반응을 보니 지금 자신들이 어떤 처지인지도 모르시는 것 같군요.”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이 우릴 여기에 납치해 놓은 상황 외엔 알아야할 다른 상황은 없을 텐데.”

아아, 역시 몰랐던 거네요.

 

현수의 대답에 남자는 난감하다는 듯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드려야 할지... 일단 이런 케이스는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해서요.”

상부? 무슨 납치 조직인거냐?”

납치조직이라니, 무슨 그런 험악한 말씀을. 저흰 그저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도매상일 뿐인데요.”

 

남자의 말에 현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설마 우릴 팔아넘길 작정인거냐? 그렇게 하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아?”

 

그러자 남자가 잠시 손바닥을 들어 올려 현수를 제지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갑자기 뭐야. 현수는 그의 그런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잠시 후 남자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죄송해요. 상부의 허가를 받느라. 그나저나 아까 뭐라고 하셨죠?”

우릴 팔아넘길 생각이냐고 물었다.”

 

분노로 가득찬 현수의 음성이 날카롭게 남자를 향했다.

 

, 그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이미 다른 분들은 다 인수인계까지 마쳤거든요.”

 

다른 분들? 불편한 감각이 현수의 가슴팍을 가득 채웠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설마...?”

, 당신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대체 무슨 말을. 적어도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인데 그들을 다 어떻게 했다고? 현수는 눈앞이 벌게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들을 어떻게 한 거냐?”

 

남자는 잠시 현수와 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미소를 머금은 채 열렸다.

 

죽었습니다. 그것도 단번에요. 깨끗한 죽음이었죠. 아마도 고통은 없었을 겁니다.”

? 지금 너 뭐라고 한거야? 죽었다고?”

 

현수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현수씨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죠? 회사사람들을 다 죽였다니. 꿈이라곤 해도 이건 너무...”

 

희진이 끝내 말을 잊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현수 역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현수가 남자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얼굴 한가득 웃음 띤 얼굴로 현수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흰 허가를 받은 업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현수의 가슴 한복판이 갈라지고 찢어졌다. 얼마 전 태어난 첫째아이 자랑을 늘 늘어놓던 박대리도,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며 술잔을 붙잡고, 현수를 붙잡고 아이처럼 울어대던 이 주임도, 죽었다고? 아니 네놈이 죽였다고? 무언가 목을 타고 울컥거리며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두 눈가가 뜨거워졌다.

 

죽어.”

?”

죽어. 죽으라고. 죽어, 이 개새끼야!”

 

현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녀석의 웃는 얼굴을 딜 수가 없었다. 울먹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하얀 방을 가득 매웠다. 눈 안에 작은 이슬이 울렁거렸다.

 

바보인가요?”

 

콰당 소리를 내며 현수의 몸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남자는 어느새 저만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왜 이해를 하질 못하죠? 혹시 당신들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젠 틀렸어. 현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놈은 악마다. 대체 왜 날 살려둔 거냐. 나도 같이 죽일 것이지 왜!

 

그럼, 우리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희진이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아뇨, 오히려 그 반대죠. 그 버스에 탔던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당신들 역시 죽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그딴 헛소리 집어치워.”

 

바닥에 쓰러져 있던 현수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네들은 도통 죽음을 받아들이질 못하는군요.”

그렇다면 제가 죽었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희진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증거라... 왜 당신들은 항상 그런 왜곡된 정보만을 원하죠? 당신들의 육체로 느끼고 인지할 수 있으면 그게 사실이라는 겁니까? 그렇게나 스스로를 믿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웃기지마.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죽었다니. 지금 그걸 믿으라고?”

 

현수의 말에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증거라면 있습니다. 당신네들 입맛에 딱 맞는 증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부디 자신의 발밑을 한번 살펴보시길.”

 

현수와 희진은 고개를 숙여 발밑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뭘 보라는 거야?”

 

현수가 목소리에 잔뜩 불만을 담은채로 투덜거렸다. 현수의 그런 태도에 남자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곤 인상을 썼다.

 

, 정말. 형편없는 관찰력이군요.”

 

그러나 희진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안색이 하애져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숙녀 분께서는 역시 예리하시군요. 네 맞습니다. 그림자죠. 당신네들에겐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림자라고? 현수는 놀란 마음에 다시 자신을 발밑을 살폈다. 역시 남자가 말한 대로 자신의 밑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현수는 황급히 남자의 발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어떤 장치를 이용한 걸 거야. 어쩌면 벽에서 빛이 나는지도. 그래서 그림자가 사라져 버린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녀석의 발밑에는 짙은 음영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그림자가 없는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건 당신들이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죠.”

우리가 영혼이란 말인가요?”

 

희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빙고. 드디어 진실에 눈을 뜨셨군요.”

그깟 그림자가 없다고 죽었다는 걸 믿으라는 거야 지금?”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현수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믿음의 문제는 당신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웃기지마. 무슨 개수작이야.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것 같아? 회사사람들을 어떻게 한 거야? 왜 우리만 여기에 남겨둔 거지?”

 

속사포 같은 현수의 질문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방금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신의 동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당신 둘을 포함해서요. 이게 아니면 혹시 어떻게 죽었느냐가 궁금하신 겁니까?”

 

현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남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불행히도 사고가 있었습니다. 운전사가 그만 깜빡 졸았다고 할까요. 그렇게 차선을 벗어난 버스는 부실한 가드레일을 뚫고 다리 밑으로 추락. 거의 20m 가깝게 떨어졌어요.”

?”

. 그렇다고 그 기사 분을 원망하진 마시길. 그도 그 순간에 잠들고 싶어서 잠든 건 아니니까요. 저희도 조용히 작업을 해야 해는 형편이라 종종 그렇게 운전사를 잠재우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게 딱 좋습니다. 사고사. 그런 건 그저 하루 밤 뉴스거리 밖에 안 되니까요.”

사람들은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희진이 낯빛이 하얘진 채로 간신히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동료 분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병원에 가서도 금방 죽어버렸죠. , 조금은 지지부진 버티던 사람도 있었는데 내장이 밖으로 터져버려서는 오래 버티진 못했죠.”

그럼 왜 저희만 이곳에 있는 거죠?”

 

희진의 눈동자가 공포로 가득차 크게 흔들렸다.

 

그건 아직 당신들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는 좀 까다로워서요.”

웃기시는군. 방금까지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현수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현수의 질문에도 남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오해가 있으실 수도 있겠네요. 다시 말씀드리면 반쯤 죽은 상태라고 할까요. , 당신네들의 말로는 식물인간 상태라고 하더군요.”

 

식물인간? 현수는 남자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기가 찼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지금 나보고 식물인간이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놈이 확실했다.

 

그럼, 아직 우리가...?”

 

혼란스러운 듯 희진이 말끝을 흐렸다. 남자는 희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식물인간이 되면 보통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망하죠. 그러니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할까요?”

그래, 니 말이 맞다고 치자. 나도 회사사람들도 모두 죽었다고 치자고. 그럼 왜 우릴 죽인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우리를 죽였냐 이 말이다.”

 

그러자 남자가 일순 얼굴을 굳힌 채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네들은 왜 소나 돼지 같은 것들을 죽입니까.”

그건 우리가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 아냐.”

위선 아닌가요? 목적이 타당하면 그렇게 수없이 동물들을 죽여도 괜찮다는 겁니까?”

 

갑자기 녀석이 웃기지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럼 자신은 채식주의자라도 된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리 채식주의지라고 할지라도 타인의 가치관을 이렇게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선택 받은 거야. 우리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대가로 그들은 종족의 종속을 보장받지. 그 정도면 서로 공평한 거래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 역시 먹고 살아야 해서요. 다시 말해 저흰 지구인의 영혼을 먹습니다. 육체 안에서 성숙한 자의식을 에너지로 삼는 거죠. 덕분에 당신 지구인들도 이렇게 종족 보존을 할 수 있으니 겸사겸사 좋은 것 아닙니까?”

 

잠깐, 방금 녀석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데. 지구인... ? 지구인이라고?

 

... 도대체 누구야?”

 

현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향해 물었다.

!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지구 담당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ĸŀдюξъ 라고 합니다.”

조뉄...?”

아뇨, ĸŀдюξъ이요. 하긴 지구인은 이 발음이 영 어색하겠군요. 그냥 편하게 존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자칭 존이라는 녀석이 다시 싱긋 웃는다. 희진은 겁에 질린 듯 주춤거리며 녀석에게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설마 당신... 외계인 인가요?”

외계인이라는 어감이 좀 귀에 거슬리지만. 당신들의 입장에서는 네, 외계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현수는 점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외계인라니. 분명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도, 알 수 없는 혼란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그래 그럼 존, 너희 종족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먹는다고 치자. 그럼 우린 왜 이렇게 그냥 남겨둔 거지?”

 

인정하긴 싫었지만 현수는 이 녀석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보를 쥐고 있는 건 이 녀석이 유일했으니까.

 

그건 우주규약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흰 합법적인 기업이거든요. 중소기업이긴 해도 나름대로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서 우주 연합 정부의 표창도...”

무슨 개소리야. 난 그딴 건 몰라.”

 

퉁명스러운 현수의 반응에 존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현수를 바라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런가요. 하긴 지구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좀 적절하진 않은 듯싶네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존은 잠시 현수와 희진을 바라보았다. 존의 눈동자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균형이 무너져 내리는 저울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까 말씀드린 우주규약 동물편 37조를 보면 아직 육체와 연결된 동물은 식용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장창고에 그런 영혼들을 분리시켜 따로 보관하죠. 그래서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면 저흰 그 과정에 어떤 불법적인 개입 없이 그들을 그들의 행성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럼... 연결된 육체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죠?”

떨리는 희진의 목소리에 존이 바로 대답했다.

그런 경우엔 저흰 그 영혼에서 에너지를 추출해 바로 포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시장으로 팔려나가죠. 다행히 지구인의 영혼은 꾀나 인기가 좋아서요. 진열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그림을 뽐내듯 존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금세 안타까운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구석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자신들이 처음 말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죠.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오래되면 저렇게 영혼이 뭉개져버린답니다. 처음엔 손과 발끝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몸통과 머리까지 뭉개지죠. 그리고 마침내는...”

 

녀석이 잠시 말을 멈추고 그 사람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그의 육신이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형체를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땅속으로 스며드는 걸까, 아니면 증발되고 있는 걸까? 뭉쳐진 크림 같았던 그의 덩어리가 점점 규모가 작아졌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누워있던 곳은 작은 얼룩도 없이 말끔하게 본래의 하얀 공간으로 돌아왔다.

 

존이 현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냉장고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죠? 이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긴 말하자면 영혼의 냉장고라고 할까요? 다시 말해 최대한으로 영혼이 부패하는 걸 늦춰주는 장소죠. 다시 말해 신선식품을 썩지 않게 보관하는 곳이라고 할까요?”

 

냉장고라니, 내가 지금 냉장고에 들어와 있는 거라고? 현수는 그의 황당하기만 한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방금 그 영혼 같은 경우엔 유통기간이 지나 상해버린 식품이라고 할 수 있죠.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이곳에 들어온 지 지구 시간으로 한 20년 쯤 된 됐네요. 그 정도면 어느 정도 강인한 사람도 저렇게 자아가 뭉개져버리곤 하죠. 이런 경우엔 방금처럼 폐기처분해 버린답니다.”

 

현수는 심장 안에 커다란 칼이 통째로 들어와 속을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두 손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미친놈의 헛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밑에는 그림자가 없었고 바닥에 걸레처럼 구겨진 사람들은 신체의 여기저기가 뭉개져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수에겐 이런 일은 절대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수의 표정이 급격히 흐트러졌다. 입술의 양끝이 패배한 개의 꼬랑지처럼 아래로 축 늘어졌다. 울 것처럼 그의 턱 언저리도 씰룩씰룩 떨려왔다. 그에게 존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현수가 떨려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존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채로 대답했다.

 

혹시 다시 살아난다면 지구로 돌아가게 되겠죠. 그냥 이대로 죽게 된다면 아마도 금세 팔려나가겠지만요. 현수씨의 영혼은 현재로썬 상당히 신선하니까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돌아가면, 돌아가면 다시는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는 건가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희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슨 말씀이시죠?”

늙으면요. 늙어서 병들어 죽으면 어떻게 되는거죠? 또 다시 당신들의 먹이가 되는 건가요?”

 

희진의 물음에 존이 잠시 희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이었다.

 

, 그런 경우라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늙어서 죽거나 병들어 죽은 영혼은 상품가치도 떨어지고 거의 수요가 없거든요. 그런 건 어디 불법 도축업체라면 모를까 저희 같은 정식업체라면 굳이 그런 싸구려 영혼까지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 죽었다 깨어난 영혼은 그 자체로도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다들 도축을 피하거든요.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희진은 그런 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존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작게 흔들더니 발끝을 세우고는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현수씨와 숙녀분의 가족 분들이 미련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건 그만큼 본인도 괴롭고 가족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물론 저희도 안타까운 일이고요.”

 

확실히, 인간이 갑자기 공중에 떠오를 리는 없지. 암울한 마음으로 현수는 지상에서 한 뼘 가량 떠오른 존을 바라보았다. 정말 난 죽은 건가? 죽어 버린 건가? 현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절망감이 현수의 온몸을 난도질하듯 찔러댔다.

 

,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네요. 아무래도 현수씨가 열정적이시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잠시 흥분을 좀 했나봅니다. 그럼 전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부디 당신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행운? 현수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존은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후였다. 좌절과 분노가 현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꿈이야. 그래. , 처음부터 모두 꿈이었어. 그렇죠? 현수씨, 이거 다 꿈인거죠? 그렇죠?”

 

희진이 흐느끼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계속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건 악몽이야 꿈일 뿐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현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데. 현수는 오른쪽 손을 들어 왼쪽 팔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런 온기라니. 죽은 사람의 체온이라기엔 너무도 따뜻했다. 하지만 이런 감각도 모두 거짓일 테지. 현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모님. 친구들. 현수의 머릿속으로 그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눈 주위가 먹먹해졌다. 아직은 더 살고 싶다. 현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참아내지 못한 눈물이 마침내 그의 볼을 타고 또르륵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울지 말아요.”

 

어느새 희진의 현수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꿈이니까. 아무리 악몽이라고 해도. 이건 꿈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꿈에서 깨기만 하면 되요.”

 

현수의 손을 잡은 희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도 꿈이라고 믿는 건가? 하지만 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외계인들의 냉장고라는 놈의 황당한 말도, 희진이 실성한 듯 떠들어대는 꿈이라는 말도 현수로썬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마주 잡은 희진의 손 역시 자신이 손처럼 따뜻하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현수는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현수 역시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난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비록 땀으로 흥건해져 버스 안에서 눈을 뜨더라도 죽음보단 그저 끔찍한 꿈일 수만 있다면.

 

현수 역시 맞잡은 희진의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꿈속에서 잠이 들면 꿈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듯 했다. 이렇게 잠이 들면 난 다시 현실에서 눈을 뜨겠지. 그리고 박대리와 이주임 그리고 동료들도 모두 함께. 언제나, 언제나처럼 내일을 살아가겠지. 내가 죽었다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 따위는 그렇게 꿈속의 일처럼 잊혀질 거야. 현수는 그렇게 천천히 무저갱 같은 의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현수가 눈을 뜬 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일까. 여긴 어디지? 잠시 밝은 빛에 적응하느라 현수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현수는 공포에 가득 찬 눈동자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얼굴이 뭉개진 사람이 그의 옆에 놓여있었다. 현수의 손 위에 올려진 무언가가 아이스크림처럼 차가웠다. 현수는 얼른 황급히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그의 손 위에 올려져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져 천천히 녹아 없어졌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현수는 떨려오는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감쌌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그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는 어디로 간 거지? 그가 다시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현수는 희진을 찾을 수 없었다. 희진은 물론 방금 전까지 자신에 옆에 쓰러져있던 사람도 이미 사라져버린 후였다. 현수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온몸의 세포가 빙글빙글 어지럽게 비틀거렸다. 손이 떨려오는지 현수는 주먹을 꽉 쥐었지만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난 어떻게 된 거지? 꿈틀대는 현수의 손가락이 여전히 상하지 않고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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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스크롤의 압박을 초래한 것에 대해 사죄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 놈은 소설 쓰기 강좌, 맨 마지막 수업 때 제출 했던 녀석입니다.

소재는 좋은데 충분이 깊이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보시면서 눈치채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제가 예전에 올렸던 글의 리메이크작입니다.(아셨을라나? ㅋ)

그 당시 아쉬웠던 점을 좀 고쳐보자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다시 섰지만

아직 제 능력이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내공이 안되는가 봅니다. 

나중에 다시 쓸 기회가 있으면 이번에 지적받은 부족한 부분을 반영해 다시 한번 써봐야겠다는

각오를 해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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