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71 추천 수 2 댓글 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쩌다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나는 막 들어온 자동차를 향해 달려 나가며 따끔거리는 목을 쓰다듬었다. 눈알도 시큰거리는 게 지금 거울을 본다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주차장엔 이미 주차되어진 차들로 한 가득이었다. 골드타임의 한복판, 다시 말해 L백화점 매출의 노른자위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차요원인 나에게는 그저 지옥 같은 시간일 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악마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이 주차장엔 각종 발암물질 등을 포함한 배기가스가 가득하겠지. 바싹 마른기침이 나도 모르게 콜록 터져 나왔다. 앉을 시간도 없었고 앉아있을 의자 같은 것도 없었다. 일을 시작한지 불과 1주일도 되지 않은 종아리가 무척이나 뻐근했다.


 카드 값만 아니었다면,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카드를 만들어가지고 이 불행을 자초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 죽을 것만 같았다. 만들어 놓고 쓰진 않아도 되니까 일단 카드 좀 만들어 달라던 과 선배의 부탁. 뭐, 그까짓 카드쯤이야. 그 정도로 선배의 환심을 살 수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을 듯싶었다. 물론 처음엔 선배의 말처럼 만들기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저주받을 카드 따윈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이 차 이름이 렉시오... 였던가?’


 이번에 들어온 차는 전면에 큼지막한 ‘L'자가 새겨진 차였다. 렉시오가 맞던가 싶으면서도 어차피 내 차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차 안으로 선글라스를 쓴 중년의 여성과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창문은 역시 열리지 않았다. 수신호로 천천히 렉시오를 비어있는 주차공간으로 인도했다. 후방주차를 해야 했던지라 차는 여러 번 앞뒤로 왔다 갔다 했지만 간신히 주차공간에 차를 구겨 넣을 수 있었다. 멈춰진 차의 양쪽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두 여자가 코를 찡긋하더니 인상을 구겼다. 배기가스 풍미의 스모키향이 콧속을 후벼대니 차마 견뎌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오아시스를 향하는 사막의 여행자처럼 서둘러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목까지 내려와 있던 마스크를 다시 위로 올릴 수 있었다. 창문을 내리지 않는 운전자에게는 입모양과 수신호로 안내를 해야 하다 보니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먼저 일하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 따끔거리는 것도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진다는데 지금 같아서는 내 목구멍에서 피가 토해질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주차장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등짝에 와 닿는 콘크리트 기둥의 온도가 제법 시원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치이익, 김현수씨 지금 당장 3층 주차장으로 오기 바람.

 

 순간, 허리에 찬 무전기에서 나를 찾는 호출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나는 무전기를 허리춤에서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이쪽 버튼을 누르고 말하면 되는 거였나?

 

 -김현수입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잠시 그쪽의 응답을 기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괜히 불안해진다. 혹시 내가 무전기 사용법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큰 바위 얼굴 그 인간이 분명했다. 난 서둘러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호출에 늦어지면 그 인간 성격에 무슨 소리를 해댈지 모르니까 말이다.

 

 처음 출근을 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나를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이 인간이었다. 그는 나를 처음보자마자 대뜸 그 큰 얼굴을 들이대며 대학생이냐 물었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했고 곧이어 어디 대학 학생이냐 묻기에 아무 생각 없이 K대학에 올해 입학했다고 말했었다. 좋은데 다니네. 내 어깨를 툭 치며 넓적 얼굴이 사람 좋게 씨익 웃었다. 나는 대기번호 받고 간신히 들어간 거라 자랑거리도 안 된다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마주 웃어보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설마, 이것이 불행의 시작일 줄이야! 그 이후 무슨 이유인지 이 인간은 나만 봤다하면 정말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어대며 시비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대학생은 이렇게 출근시간을 안 지켜도 되는 거냐며 불과 1분 지각한 나를 붙잡고 사단이 난 것처럼 잔소리를 해댔고, 메케한 주차장 공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러지기라도 하면 하긴 대학생들이 이런 장소에서 일하자니 기가 차긴 할 테지 하며 내 속을 벅벅 긁어댔다.

 

 나중에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인간은 대학생, 그것도 이름이 조금이나마 알려진 대학교 학생이 주차 요원으로 들어오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괴롭히고 못되게 군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벌써 대학생이라고 말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그만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내 낌새가 심상치 않자 그는 쯧쯧 혀까지 차며 짧게 한숨을 내 쉬더니 그 인간이 팀장 친척 동생이란 소문이 있으니 일 계속할 생각이면 대들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어두라는 친절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역시나 그 넓적 얼굴은 자신의 존재를 나를 갈굼으로써 증명하겠다는 듯 죽기 살기로 날 씹어댔다. 하지만 결단코 참아내야만 했다. 앞으로도 핏발이 곤두서는 나날들이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첫 월급을 받는 날까진 버텨내야만 했다. 내가 카드를 만든 것도 모자라 연체까지 됐다는 걸 부모님이 아시면 그야말로 난 죽은 목숨. 이 땅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순간의 굴욕을 견뎌내는 것쯤이야.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굴욕의 역사를 새로 쓰더라도 한 달만 버텨내면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계단이 이렇게 많았던가. 3층까지 내려가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엘리베이터를 탈 걸. 나는 급한 마음에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둘러 뛰어내려온 탓인지 숨이 가빴지만 나는 지체 없이 문을 열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쪽 편에 그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가 있는 모양인지 어떤 사람 앞에서 굽실굽실하느라고 정신이 없어보였다. 무슨 일이지? 내가 빠른 걸음으로 그 인간에게 다가섰다.

 

 “아, 저기 오네요. 야, 너 뭘 하다 이렇게 늦었어!”

 

 이 인간은 날 보자마자 버럭 화부터 낸다. 난 얼굴 근육이 뒤틀려옴을 느꼈지만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학생들은 다들 이렇게 선배가 오라고 하면 한참 뜸들이다가 나타나다 보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또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걸고 있다. 속에서 욱하고 천불이 일어난다. 생긴 건 썩어빠진 감자처럼 울퉁불퉁해가지고 그 뱁새 같은 눈으로 날 노려본다. 생각 같아서는 욕과 함께 야무지게 버무린 멱살 뒤흔들기의 맛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카드 명세서와 부모님의 야차 같은 모습이 가까스로 내 이성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왜 날 부른 거지?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랬다는 건가요?”

 

 넓적 얼굴 앞에 서있던 양복 차림의 때깔이 번지르한 남자가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멍청한 얼굴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툴긴 해도 나름 열심이 일하던 사람 불러 놓고는 지금 다들 무슨 수작들이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직원이 사장님 차에 흠집을 냈지 뭡니까.”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불안한 느낌이 등골을 휘감아 돌았다. 무언가 나를 둘러싼 음모가 착실히 진행되어 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음모라기엔 이건 너무 빈틈이 많았다. 흠집이라니. 난 오늘 한번도 3층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

 

 “저기,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저는 원래 1층...”

 “아, 잠시 만요. 현수씨 잠깐 나 좀 보지.”

 

 오해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넓적 얼굴이 중간에서 내 말을 잘라 먹었다. 그리곤 죄송하다는 듯 그는 양복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내 옷자락을 붙잡고 저쪽 구석으로 향했다. 나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 인간을 바라보았다. 사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 음모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말이다.

 

 “왜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요? 김현수씨 말이 좀 짧네?”

 

 아이고, 이걸 그냥 확! 어느새 꽉 쥐어진 두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넓적한 얼굴을 으깬 감자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냥 여기서 끝장을 봐? 끌리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하지만... 아! 나를 옭죄는 신용의 달콤했던 유혹이여. 주먹은 가깝지만 신불자의 그늘은 더욱 무섭구나.

 

 “무슨 일이시죠? 그리고 흠집이라뇨? 전 오늘 3층에 내려온 적도 없는데요.”

 

 애써 감정을 추슬렀지만 드문드문 앙다물어진 어금니 소리가 말 속에 녹아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말이지. 저 분 자동차에 흠집이 났는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서 말야.”

 “그런데요?”

 “거참, 대학생이나 된 사람이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어따 써.”

 

 그럼 너 같으면 이런 상황에 척하니 말귀를 알아듣겠냐? 학교도 다니다 말았다더니 뇌에 곰팡이가 폈나. 도대체가 사람이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이번 일은 현수씨가 한 걸로 하는 게 좋겠다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하지도 않은 과실을 뒤집어쓰라는 건가?

 

 “현수씨가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에선 이런 일이 터지면 누군가 반드시 책임자가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이번엔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에 사고가 난거라서 말야. 내가 위에는 다 이야기 해 놓을 테니까 이번만 현수씨가 한 걸로 하자. 알겠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화를 참아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단호히 거절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순간 이 인간이 팀장과 친하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여기서 거절하면 뭔가 안 좋은 이야기가 팀장 귀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는 건 못내 탐탁치가 않았다.

 

 “저기...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요? 그냥 회사에서 보상해주는거 아닌가요?”

 

 내가 머뭇거리며 말하자 넓적 얼굴이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참, 대학생이라 사회 경험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말야. 이봐, 김현수씨. 현수씨는 사회가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것처럼 보여? 대학생이라고 똑똑한 줄 알았더니 완전 애구만 애야.”

 

 넓적 얼굴의 말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인간은 굳게 다물어진 내 입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자기 할만 계속 늘어놓았다.

 

 “아무튼 내가 팀장님한텐 잘 이야기 해 놓을 테니까. 알았지? 너무 걱정하진 말고. 별일 없을 테니까.”

 

 그러면서 넓적 얼굴은 안심하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그런 그의 행동조차 이 인간을 죽여 버려야 할 이유 목록에 신속히 추가될 뿐이었다.

 

 “알겠어요. 대신에 위에는 잘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속마음과는 달로 나는 마침내 현실과 타협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한 달을 버텨내야 하는 입장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저 인간이 팀장이랑 친척지간이란 소문이 소문만은 아닌 듯 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막무가내여도 잘리지 않고 버텨내는 거겠지.

 

 “저기요. 제가 좀 바쁘거든요?”

 

 뒤에서 양복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넓적 얼굴은 곧바로 조르르 달려가 양복 남자 앞에 서서 손바닥을 비벼댔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다 해결됐습니다. 여기 직원이 계속 발뺌을 해서요.”

 

 발뺌? 또다시 내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내가 한 걸로 하겠다고 말해버린 이상 그 단어의 부적합성에 대해 따져댈 수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대들었다간 바로 팀장에게 넓적 얼굴 명의의 탄원서가 들어갈 테지만.

 

 “아! 됐구요. 여기 담당자 누구에요?”

 “담당자요?”

 

 양복 남자가 짜증이 듬뿍 묻어난 목소리로 담당자를 찾자 넓적 얼굴이 웬일인지 당황하며 되물었다. 주차장 담장자라면 바로 이 인간이 그렇게나 친하다는 팀장이었다. 그런데 왜 이 인간이 이렇게 난처해하지? 오히려 얼굴빛이 환해져야 정상 아닌가?

 

 “제가 담당자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갑자기 뒤에서 굵은 음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어느새 팀장이 우리 뒤에 서 있었다. 큰 키에 안경을 쓴 얼굴이 처음 보았을 때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팀장님!”

 

 넓적 얼굴이 깜짝 놀라며 팀장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역습에 놀라하는, 그러니까 사극 같은데 나오는 멍청한 오랑캐 장수 같은 표정이었다.

 

 “당신이 담당자예요?”

 “네, 그렇습니다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여기 제차 범퍼 보이시죠? 아까만 해도 멀쩡했는데 잠깐사이에 이렇게 긁어 놓는다는 게 말이 돼요? 이게 도대체 얼마짜리 차인 줄이나 알긴 아는 겁니까?”

 

 아마 사람이 자동차와 같다면 양복 남자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헤드라이트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기세였다. 나는 힐끗 자동차를 살펴보았다. 자동차 앞에는 시옷 모양의 프로펠러가 새겨져 있었다. 저 차 이름이 뭐였더라? 벤처였던가? 분명히 길거리에서 가끔씩 본 것 같은데.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팔뚝 길이만큼 도색이 벗겨진 앞 범퍼를 살폈다. 막 까진 피부의 속살처럼 긁힌 부분이 애처로워보였다. 팀장이 손끝으로 스크래치가 난 부분을 쓰윽 만졌다. 그에 손가락에 혈흔이 묻듯 허연 페인트가 묻어져 나왔다.

 

 “빠르게 처리해 드렸어야 했는데.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다시 양복 남자를 향해 돌아선 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뒤늦게 팀장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넓적 얼굴은 아까부터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바쁘시겠지만 잠시 저희 백화점 1층에 있는 고객 센터에 들러주시면 바로 보상 처리해드리겠습니다.”

 

 팀장이 내민 명함을 양복 남자가 거칠게 낚아챘다.

 

 “아 진짜 미치게 하네. 어이, 거기 당신. 내가 당신네들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보여? 괜히 시간이나 잡아먹게 만들고. 30분이면 당신네들 하루 일당이랑 맞먹어 알어? 그래놓고 이깟 범퍼 긁힌 거 보상해주면 다라는 거야 뭐야?”

 “죄송합니다.”

 

 팀장이 아예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했다. 팀장의 사과에 잠시 우리를 노려보던 양복 남자는 말 속에 가시를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늘은 내가 바빠서 이정도만 하지만 팀장인가 뭔가 직원 관리 좀 똑바로 좀 하쇼. 내가 당신네들 목가지 못 자를 것 같아? 아,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게다 사람 짜증나게 만드네.”

 “죄송합니다.”

 

 거듭되는 팀장의 사죄 때문인지, 아님 시원스레 뽑아댄 독설로 스트레스를 해소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침내 양복 남자는 앞으로 지켜볼 거란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접혀졌던 허리를 폈다. 저기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양복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번쩍이는 옷들도 다 명품들로 도배를 한 거겠지. 돈 좀 있다고 유세떠는 저런 인간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엘리베이터 안으로 양복 남자가 사라지자 팀장이 나와 넓적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되긴요. 김현수 씨가 그런 거죠.”

 

 넓적 얼굴이 비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팀장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

 

 “김현수씨. 정말 김현수씨가 한 게 맞습니까? 제가 알기론 당신은 1층 담당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게, 아직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자기가 일하는 층을 헷갈렸다고...”

 

 넓적 얼굴이 황급히 내 대변인이나 된 듯 떠들어댔다. 나는 아까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어쩐지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척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친척이라기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김현수씨.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 저 차 범퍼 수리비가 얼만 줄이나 알고 있습니까? 대충 잡아도 300만원이 넘습니다.”

 “300만원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설마 팀장이 넓적 얼굴이랑 짜고 나를 놀려 먹는 건가 싶어 둘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세상에. 300만원? 무슨 자동차 범퍼 수리비용이 중고차 가격이랑 맞먹는단 말인가.

 

 “게다가 일단 회사에서 처리는 하겠지만 수리비용이 현수씨 월급에서 차압 된다는 건 알고 있죠?”

 

 뭐? 지금 뭐라고? 차압? 뭔가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는 듯 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300만원이라고 하면 내가 갚아야하는 카드 값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결국엔 이런 거였구나. 나는 분노에 가득차서 넓적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내가 맘에 들지 않기로서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나한테 뒤집어씌우다니. 세상에나. 월급이 차압되는 상황은 알바를 그만두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더 이상 넓적 얼굴한테 휘둘릴 순 없었다.

 

 “아니에요. 전 아닙니다. 이게 다 박용철씨가 시키는 바람에...” 

 “웃기지마, 이 새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팀장님 이 자식 말 듣지 마세요. 미친 새끼가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구라를 쳐?”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넓적 얼굴이 이젠 나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젠 참을 수 없었다.

 

 “뭐? 미친 새끼? 야, 이 개 같은 새끼야. 지금 누가 거짓말을 하는데!”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훨훨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피가 거꾸로 솟고 눈 옆이 붉게 달아올랐다. 억울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난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꼴사납게 질질 짜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위로 들어 올린 내 두 눈에 천장에 붙어있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빨간 눈을 깜박이며 내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CCTV요.”

 “응?”

 

 나는 여전히 고개를 위로 향한 채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CCTV엔 다 찍혔을거 아네요.”

 

 내 말에 넓적 얼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무, 무슨 소리야. CCTV라니? 그런걸 아무나 확인 할 수 있는 줄 알아? 세, 세상 물정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만?”

 

 넓적 얼굴은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했다. 하긴 내가 오늘 3층에 내려온 일이 없는 이상 CCTV에 내 모습이 찍혔을 리가 없지. 이 인간이 무슨 이유로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그 어떤 헛소리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침착하자. 나는 떨리는 호흡으로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혹시 확인이 안 되나요?”

 “아뇨, 애초에 CCTV라는 게 그런 목적으로 있는 거니까. 가서 부탁하면 확인 할 수 있을 겁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팀장에게 물어보았지만 역시 확인이 불가능 할 리가 없었다. 꽉 조여진 옷의 단추가 풀리듯 갑갑하게 조여 오던 무언가가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럼 가서 확인해 보도록 하죠.”

 

 팀장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CCTV라. 아마 지하 1층 관리사무실에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서둘러 팀장을 쫓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넓적 얼굴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 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팀장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제가... 차를 옮기다가 바퀴가 돌아가 있는 걸 못 보고... 그런데 저 새끼는 돈 많잖아요? 팀장님, 저 새끼 명문대 출신이래요. 그러니까 돈 많을꺼 아니에요. 부모도 잘 살꺼고.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동차 수리비 같은 건... 이번 달에 어머니 병원비가 많이 나와서 그래서...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닥에 머리까지 찧어대며 넓적 얼굴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빗방울 같은 눈물이 투둑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이 인간 갑자기. 난 갑작스러운 넓적 얼굴의 태도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김현수씨는 자리로 돌아가서 계속 일 해요.”

 

 팀장이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들을 뒤로하고 걷는 내 마음이 떫은 감을 통째로 씹은 듯 텁텁했다. 내가 잘못 한 건가? 분명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자꾸만 마음이 뒤숭숭 했다. 나는 위층으로 향하는 비상구의 손잡이를 잡았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대동맥을 타고 심장까지 내달렸다. 문을 열고 도망치듯 발을 내딛는 내 등 뒤로 넓적 얼굴의 우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는 듯 했다.

?
  • profile
    시우처럼 2011.02.11 07:26

    이 망작은, 제가 지난주 합평 시간에 들고 나갔다가 개박살이 난 작품입니다. ㅋㅋ

    그나저나 a4 10장에 가까운 분량인지라 게시판에 올리려니 장난아니네요. ;;

    아무튼, 설정이 빈약하다는 평과, 넓적얼굴이 너무 바보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더랬죠. ㅎ;;

    글을 쓰려고 하면,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 같아요.

    대충 설정 잡았더니 다들 귀신같이 집어내시더라구요.

  • ?
    소나기ⁿ 2011.02.11 09:24

    그래도 표현력이 부럽네요..

     

    부끄러워서 전 소설접기로 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그저 나중에 시나리오 완성하면 그때 갈무리 해서 다시 올리려고요..ㅡ_ㅡ;

  • profile
    시우처럼 2011.02.11 19:54

    네엣? 그만 두신다니! 그럴수가...

    그러고보니 글까지 삭제 하셨네... 헐..

    님, 그 식물의 복수 올리셨었죠?

    재미있었는데.. 다음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

    좀 더 제 속 마음을 솔직히 표현할 걸 그랬나요.

  • ?
    The위험 2011.02.12 01:52

    불행이라 재밌어 보인다

  • profile
    시우처럼 2011.02.12 03:52

    안녕하세요~! ^^

  • profile
    클레어^^ 2011.02.12 03:35

    팀장님 덕분에 위기를 넘기는 현수씨네요.

    그나저나 저 박용철씨 같은 사람이 회사에 있으면 진짜 미워죽을 것 같네요.

    게다가 명문대 다닌다고 다 부자는 아닌데...;;

  • profile
    시우처럼 2011.02.12 03:58

    사실, 명문대생인데 왜 주차장 알바를 하냐고 지적을 받았었어요.

    명문대생이면 좀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예를 들면 과외 같은 걸로 돈을 벌 수도 있을 텐데 하고 말이죠.

    그래서 이번엔 카드값을 100만원 이상으로 올렸는데, 느낌이 좀 변화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ㅎ

  • ?
    소나기ⁿ 2011.02.13 05:02

    완성되면 한꺼번에 올리려고요 ㅋㅋ

     

    이것저것 수정도 해야되고.. 부끄부끄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1:01

     합평은 그런 분위기군요;;

     그다지 이상하다 싶은 구석 저는 모르겠는데, 공부하시는 분들 생각하시는 건 좀 다른거려나요;;

     전 그냥 재미있게 봤습니다. 글이 많이 정돈되있달까, 그런 느낌이네요 ㅎ

  • profile
    시우처럼 2011.02.27 20:32

    다른 사람들의 이야이를 들어보면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평까지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한것 같아요.

     

    이상하다 지적받은 부분은 여기 올리면서 수정해서 아마 잘 느끼지 못하셨는지도.. ㅋ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3280 수집 검사/13/행성을 베는 칼 아르슈(3) 1 백수묵시록 2011.02.02 380 1
3279 성녀 4 까마귀 2011.02.04 386 2
3278 [추리] 가짜 ~프롤로그~ 6 뱀신의교주 2011.02.06 539 4
3277 [추리] 가짜 ~1화~ 4 뱀신의교주 2011.02.06 444 2
3276 포켓몬스터R-6 1 다시 2011.02.07 486 1
3275 [점점 산으로 가는 느낌이...]별의 노래(은영 편 - 23. 세인이의 속마음) 2 클레어^^ 2011.02.08 363 1
3274 희귀동물 추적관리국 그 1-만드라고라의 비명소리를 따라서 2 2011.02.08 782 2
3273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 (3) 6 윤주[尹主] 2011.02.09 433 1
3272 [급 발랄모드?]별의 노래(세나 편 - 23. 미안해...) 2 클레어^^ 2011.02.10 441 1
3271 착한 세상 -prologue- 2 The위험 2011.02.10 453 2
» L백화점 지하주차장의 하루하루 10 시우처럼 2011.02.11 571 2
3269 착한세상 -1.이 세상- 3 file The위험 2011.02.12 798 2
3268 [추리] 가짜 ~2화~ 2 뱀신의교주 2011.02.12 459 2
3267 단군호녀 20화! 거스를 수 없는 비명上(悲命)『호녀,버려지다.』 3 file ♀미니♂ban 2011.02.12 700 2
3266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고요...]별의 노래(진영 편 - 25. 임수현의 배신?) 2 클레어^^ 2011.02.12 370 1
3265 [단편]눈동자 2 시우처럼 2011.02.13 445 1
3264 사람이 하는 모험/완전판 프롤로그 1~2 2 백수묵시록 2011.02.15 376 1
3263 [솔로 관람불가?]별의 노래(은영 편 - 24. 세인이의 고백, 수현이의 고민) 2 클레어^^ 2011.02.16 367 1
3262 관객 모독 1 idtptkd 2011.02.16 352 1
3261 Liar's World [거짓말쟁이들의 세계] 1 모에니즘 2011.02.17 417 1
Board Pagination Prev 1 ...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 220 Next
/ 220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용약관] | [제휴문의] | [후원창구] | [인디사이드연혁]

Copyright © 1999 - 2016 INdiSide.com/(주)씨엘쓰리디 All Rights Reserved.
인디사이드 운영자 : 천무(이지선) | kernys(김원배) | 사신지(김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