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엔 유난히 작가들이 많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취미작가였다. 그냥 취미로 직장이 끝나면 집에 와서 글을 쓰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 중엔 실력이 뛰어나서 잡지에 글을 보내기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이원용 씨의 글을 제일 좋아했다. 그 아저씨는 동네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두 잡지 중 하나인 ‘진개장’의 편집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원용 아저씨는 우리 옆집에 살았는데, 내가 심부름 하고 남은 돈으로 아이스께끼를 하나 사 들고 오던 날에 그를 집 밖에서 만났다. 그는 얇은 면 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그 몰골이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최근 엄청난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담배와 커피가 섞인 듯 매우 불쾌한 구취를 풍기며 뭔가 열렬하게 설명했지만, 나는 코를 싸매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진개장’의 편집장과 매우 친했고, 덕분에 매주 금요일엔 조판공 아저씨를 도와 ‘활자상자’에서 원고를 찍는 것을 도울 수 있었다. 최근엔 거의 일의 반을 도맡아 하기도 할 정도로 나는 유숙했다. 그 당시엔 아직까지도 활자를 찍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판공일이 필요했다. 하여간 그때도 나는 어김없이 조판공 아저씨를 도와 활자를 찍어내다가 이원용 아저씨의 글을 발견했다. 제목은 없었다.
“아니 영애야 왜 여길 영국의 왕궁인 듯 양 유유한 모양으로 걸어 온 거야. 엉아는 영애 너 가 여기에 온 것을 아시고 있니? 아마도 우리의 엉아는 영애 너 가 여기에 아무도 알 수 없게 온걸 알 수 없을 거야. 암, 알 수 없지. 어서 엉아와 엄마와 아우가 아직도 아주 어린아이 같은 영애 널 언제 오나 하며 어림은 커녕 예상도 못 하여 안심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영애 너 가 오길 그냥 원하고만 있을 거야, 암. 아름다운 너의 엉아와 엄마와 아우가 애타게 원하는 영애 너는 어서 원래 왔던 곳으로, 너의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야만 될 거야.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같이 어리광 같은 행동은 안돼.”
글쎄, 아주 잘 쓰여진 글은 아니었으나 뭔가 독특한 느낌의 글이었다. 글이 어찌됐건 나는 이걸 찍어내야 했다. 기세 좋게 ‘ㅇ’이 담긴 상자에 손을 뻗었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시 한번 손을 상자 안에 넣어 보았으나 만져지는 것은 빈 상자의 밑바닥과, 거기에 쌓인 얇은 먼지들뿐이었다. ‘ㅇ’ 상자에 ‘ㅇ’은 한 개도 없었다. 두려움에 빠져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조판공 아저씨에게 달려가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아저씨! ‘ㅇ’이 한 개도 없는데요!”
“뭐라고?”
“그러니까, 조판실에 ‘ㅇ’이 한 개도 없어요.”
“뭐, 상자 안에 한 개도 없단 말이야?”
“몰라요. ‘주간문학’지 녀석 중 한 놈이 와서 몽땅 가져갔는지도 모르죠.”
“망할 놈들! 그러면 어쩔 수 없다. 그래, 이게 최선의 방법이야. 어서 가서 그 놈들이 가진 모음자들을 전부 뺏어와.”
“그거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요, 일단 글은 오늘밤 내로 찍어내야 하는데, 어쩌죠? 안 그랬다간…….”
“이원용 씨한테 혼쭐좀 나겠지.”
조판공 아저씨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긴 글이냐?”
“별로 긴 글은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군, 그럼 지금 빨리 가서 ‘ㅇ’ 대신에 다른 자음을 집어넣자. 아무도 저런 녀석의 글 따위는 자세히 보지 않겠지.”
“예에.”
내가 대답하며 조판상자로 돌아갔다.
가끔 이 인쇄소에서 모자라는 글자가 나오면, 그것 대신 ‘ㄱ’을 넣었다. 모자라는 문자는 그리 많이 나오질 않았으므로, 독자들은 가끔 ‘ㄱ’이 나오지 않을 자리에 ‘ㄱ’이 나오면 그저 단순한 인쇄소의 작은 실수로 여기고 넘어갔다. 언제나 글자가 모자랐을 때 ‘ㄱ’을 쓰도록 배워왔던 나는 ‘ㅇ’대신에 ‘ㄱ’외에 다른 자음을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글을 자세히 읽어보다 깜짝 놀라서 혼자 중얼거렸다.
“ ‘ㄱ’을 집어넣는 수밖에. 근데 이건 참 ‘ㅇ’이 많기도 한 글이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ㅇ’대신 ‘ㄱ’을 넣어 인쇄를 마쳤고, 돌아온 월요일에 나온 이번 ‘진개장’의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가니 격개갸 괘 겨길 격국긔 곽국긴 듯 갹 규규한 모갹으로 걸거 곤 거갸. 걱가는 격개 너 가 겨기게 곤 것글 가시고 깄니? 가마도 구리긔 걱가는 격개 너 가 겨기게 가무도 갈 수 겂게 곤 걸 갈 수 겂글 거갸. 감, 감 수 겂지. 거서 걱가과 검마과 가구가 가직도 가주 거린가기 같근 격개 널 건제 고나 하며 거림근 커녁 계삭도 못 하겨 간심도 할 수 겂는 삭태게서 격개 너가 고길 그냥 권하고간 깄글 거갸, 감. 가름다군 너긔 걱가과 검마과 가구가 개타게 권하는 격개 너는 거서 권래 괐던 곳그로, 너긔 가늑한 집그로 돌가가갸만 될 거갸. 기제 더 기각 거린개같기 거리곽 같근 핵독근 간돼.”
이 알 수 없는 글로 야기된 소동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요상한 글은 이교도에 전하는 암호문이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교도를 두려워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원용 씨의 집이 끈끈이인 양 파리떼처럼 몰려들었지만 이원용 씨는 집에 없었다. 그는 사라졌고 동네의 그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 이후로는 그의 유령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합당한 대상을 찾지 못하자 대중들의 분노는 결국 가라앉았으며,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어떤 학자는 ‘진개장’의 편집장이었던 작가가 옳지 못한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을 풍자하기 위해 한글의 처음, 기본이라 할 수 있는 ‘ㄱ’만으로 된 헛소리를 쓴 것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을 통해 풍자하기 위해 억지스럽게 ‘ㄱ’자를 넣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나의 실수에 의해 만들어진 이원용 씨의 글 본문을 해석해 대기만 급급했지, 글 아래에 작게 쓰인 이원용 씨의 이름이 ‘기권굑’이라고 나온 것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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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엘런 포의 'X 투성이의 글'을 배낀글
고대 문서 복원 시리즈 1
요즘 별일없이 바쁘네요 ㅋ
갑자기 E가 없는 영어소설이 떠오르네요... 제목을 잊어버렸지만...(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E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