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3 01:08

남기는 것

조회 수 452 추천 수 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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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친구랑 농담처럼 한 말이 있었다. 죽어서도 안 잊혀지려면 ‘수험생’을 괴롭히면 된다고. 정철처럼 엄청난 해석질이 필요한 일을 해버리던가, 뉴턴처럼 물리 과목 입문 자체를 밟아버리던가. 그건 고등학교 때였고, 그 때 내 눈에 볼 수 있는 세상을 그 정도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침 들어온 게시글에는 그 댓글이 가득했다. 가끔씩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도나 ‘xxx님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표현이 있긴 했지만, 결국 모든 표현이 그러했다. 나 역시도 담담하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표현을 했다. 그런 표현을 적으면서 예전에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은 음식을 아까워서 계속 먹는 엄마한테 ‘이제 그만 밥숟가락 내려놔’라고 했다가, ‘지금 나보고 죽으라고?’라고 반문 받은 일. 그러면서 ‘뒤진다’, ‘죽는다’, ‘먼 길 떠난다’, ‘밥숟가락 내려놓는다’ 등등 한국말에 참 많은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일. 갑자기 그 일이 떠올랐다. 그 댓글을 남기는 나는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학생답다면 학생다운 거였지만, 방학 때는 언제나 점심쯤에나 일어나니까. 나는 정말 표현 그대로의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그 게시글의 주인공에 대한 포스트를 읽었다. 왠지 오늘 화난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주요 뉴스’에는 그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 내가 그 주인공을 발견한건, 실시간 검색어와 인기 많은 포스트들을 메인에 띄운 것. 그걸로 알 수 있었다. 나는 TV를 잘 보지 않으니까, 뉴스도 안 보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더 TV를 틀기 두려웠다. 혹시나 TV에서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봐. 그러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켜고 싶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오른쪽 어깨가 아팠다. 이럴 때는 왼손잡이이고 싶다. 마우스를 왼손으로 잡으면 왼쪽 어깨가 아플 테니까. 결국 노트북도 덮어둔 채, 소파에 기대서 꺼진 TV를 보고 있었다. TV를 켜고 싶지 않으니, 영화나 볼까 하는 생각에 일어나서 DVD를 모아둔 장을 보면서 어떤 것을 볼까 고민했다.
 먼지가 가득 쌓여서인지 손끝이 살짝 간지러웠다. 그러다가 오늘 주인공의 영화가 눈에 띄었다. 결국 ‘뭔가를 남기면 잊혀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슬픈 건, 그 주인공은 오랫동안 있었지만, 과연 나 이후로도 기억해줄까.
 일부러 그 DVD를 외면한 채 다른 DVD를 꺼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꺼낸 DVD의 감독과 배우 이름을 보았다. 외국 이름이다. 그리고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배우 때문에 봐서 감독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가 아팠지만, 다시 노트북을 켜서 감독의 이름을 쳐봤다.
 1965년~ 2005년.
 그래, 뭘 남겨야 잊혀지지 않을까라는 내 고민은 굉장히 가벼워졌다. 이렇게 같은 DVD를 남긴 두 사람인데도, 오늘 떠난 이는 내게 기억되고, 이전에 떠난 이는 떠났는지 조차 모르니까.
 꺼낸 DVD를 그대로 켜서 봤다. 그러면서야 생각했다. 뭘 남기는 게 아니라, 어떠한 것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 영화를 본 후에, 다시 DVD가 꽂혀있던 자리에 그대로 꽂으면서 꺼내려했던 DVD를 쳐다봤다. 내가 왜 저 영화를 좋아했었지? 아, 담담해서. 아니, 담담한 영화는 많은데. 아, 우는 순간에 울어서. 아니, 그런 영화도 많아. 그렇다면 왜 좋아했지?
“내가 찍고 싶었던 이야기였으니까”
 오늘 일어나서 점심 먹는 거 빼고는 입을 열지 않았던 입을 처음으로 열었다. 엄청 잠겨서는 듣기 싫을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그 말이 입에 나온 것은 좋았다.
 간만에 서랍을 열고는 먼지 쌓여있을 예전의 노트를 꺼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험생에게 기억되지는 않았겠지만, 내 기억에 남은 내 처음 완결 콘티! 먼지를 과감하게 손으로 털어내고는 첫 장을 열어봤다. 어설픈 그림들과 ‘천재는 악필’이라는 자기 위로가 가득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래, 해보자. 어떠한 것이라도 남겨보자.
 오른손으로 펜을 잡고 다시 콘티들을 옮겼지만, 이상하게 오른쪽 어깨는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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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소설을 썼네요.

자판을 치는 지금도 사실은 오른쪽 어깨가 아파요.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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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1.01.23 06:42

     세상님 글은 늘상 수필인지, 소설인지 의심케 한다니까요 ㅎㅎ 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망 기사는 저도 오늘 우연히 봤네요...대단하신 분입니다. 전 기껏 해야 오육십대나 되는 분인줄 알고 있었는데 ㅠㅠ

  • profile
    idtptkd 2011.01.27 22:12

    왠지 이렇게 소설이다 라는 느낌보다는 혼자서 생각해서 쓰는 느낌으로 쓰면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더라고요.

    네, 그 사이에 많은 글을 남기고 가셨죠...

  • ?
    乾天HaNeuL 2011.01.25 05:55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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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ptkd 2011.01.27 22:12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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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우처럼 2011.01.27 03:04

    저는 부모님에게 존대말을 쓰고 자란지라

    식사중인 어머니한테 '그만 먹어' 라는 말을

    반말의 명령조로 말하면 그냥 그자리에 밥상 뒤집어 지고 사단이 날텐데...

    으휴, 상상만 해도 무섭군요.

     

  • profile
    idtptkd 2011.01.27 22:15

    저도 친구가 존댓말을 하고 그러는 걸 알고는 저희집이 다르다는 걸 알았죠. 저희 집은 '안녕히 주무세요'정도의 고정적인 말이나, 장난을 칠때만 써요. 역시 집은 각각 분위기가 다르군요. 부모님 세대는 상당히 엄격했는지, 저희는 꽤 풀어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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