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2 01:29

고목

조회 수 362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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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친우를 부르는 목소리로 새순을 불러 내었고, 여름은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을 새순에 감염시켰으며, 가을은 애인을 쓰다듬는 손길로 잎사귀를 물들였다.

'그리고 겨울은 냉랭한 바람으로 이들을 죽여버렸지'

인간은 자연에게서 배운다. 그들의 인공물 중에는 자연물을 닮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의 파괴 본성도 또한 자연에게서 배운 것일 뿐이다.

고목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계(四界)를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곳에 자리 잡은 씨앗이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긴 적이 없었다. 그 사실에 불만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자신의 뿌리가 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때 부터 그녀는 그 뿌리로 땅을 강하게 움켜 쥐어갔다. 그 때부터 그녀는 셀 수 없이 많은 이파리와 꽃과 열매를 잉태하였고,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그러나 더이상 겨울을 탓하지 않는다. 겨울의 바람은 비록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을지라도 어김없이 그녀에게 되돌려 주었다. 도도한 겨울은 자신의 잘못을 또 다시 뉘우치고 부드러운 봄바람으로 그녀를 임신시키곤 하였다.

'냉랭한 바람만이 사랑에 빠진 단풍들을 죽이지는 않지'

그녀는 거부감을 자제할 줄 알았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녀는 산에게서 부동심을 배워왔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것은 단지 알고 있던 것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미처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어느날인가 문득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곤 한다. 그녀 앞에서 묵묵히 사색에 잠긴 인간을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어쩐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론 주체하지 못할 만큼 뜨거운 것은 얼음까지도 태워버리니까'

고목은 손가락 두 마디 만한 나무 막대 끄트머리에 피어있는 붉은 꽃봉우리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그 꽃에 이름을 붙인 적이 있었다. 하늘바라기. 얕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붉은 꽃봉우리가 가리키는 곳은 분명 하늘이었다. 그 언젠가 해를 그리워 하며 자신을 한 없이 키워 올리며 해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허리가 부러져 고사하고 만 어느 꽃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고목은 이 하늘바라기를 잘 알고 있었다. 번식력이 강하고 양분을 흡수하는 속도가 여느 풀나무보다 빠른 넝쿨 식물이었다. 자라나는 것도 빠르지만 죽는 것도 찰나였다. 그녀는 하늘바라기가 한 달 이상 살아 있던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 번은 하늘바라기가 고목이 살고 있는 산에 피어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도 하늘바라기에게 자신의 몸을 침식당했다. 그러나 간절한 봄의 부름 덕분에 간신히 호흡을 고를 수 있었고, 지금은 그때의 상처도 다 아물어서 희미한 기억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활활 불타오르다가 마침내 스러져 버리지만'

하늘바라기가 고목을 괴롭힌 것은 한 두번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목은 하늘바라기를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매번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자신을 내주곤 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양분을 얻지 못하는 가여운 하늘바라기는 자신이 붙어 있는 나무 막대에게서 양분을 있는대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나무 막대는 더 이상 내 줄 것이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말라가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하늘바라기 또한 그 나무 막대와 함께 고사하고 말 것이다.

"이거나 받아라"

나무 막대를 들고 있던 인간이 그것을 고목을 향해 툭 던졌다. 하늘바라기는 바람에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그녀의 몸에 닿자 마자 무섭게 번식하기 시작했다. 온 몸이 말라가는 기분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아내며 하늘바라기의 붉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애처로웠다. 수만, 수억의 자손을 순식간에 낳으면서도 자식들과 함께 죽어야 할 운명.

고목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온 몸 구석구석에 하늘바라기를 옮겨 놓았다. 마치 잉태했고 또 보내 주어야 했던 수많은 이파리 와 꽃과 열매들을 자신이 피워냈던 것처럼 자신의 나뭇가지 위에서 하늘바라기를 꽃피워 내었다. 그 고통은 산고의 고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하늘바라기를 자신에게 옮긴 인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인간도 그녀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멋적은 듯 턱을 쓰다듬다가 뒤돌아 가면서 말한다.

"그냥. '너라면' 이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고목은 밤새도록 하늘바라기를 피워내려 하였지만, 느닷없이 쏟아진 폭설 때문에 전부 얼어 죽어 버렸다. 그녀는 쓸쓸하게 하늘바라기가 있던 가지들을 바라보았다. 가지는 모두 새카맣게 말라 있었다. 차가운 눈이 닿을 때마다 껍질이 죄다 벗겨지려는 것같은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지만, 진정으로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은 죽어서도 시체 한 점 남지 않는 하늘바라기였다.

햇살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밤새 느닷없는 폭설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하늘은 맑았다. 고목은 알고 있었다. 그 폭설은 겨울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서 바람으로 끌어다 온 것이란 걸. 그리고 그녀는 또 겨울을 사랑하고 말았다는 것을. 곧 새순을 잉태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나뭇잎과 꽃과 열매의 어머니였다.


==========


뱀발.


본문에서 하늘바라기는, 불입니다.


오래 전에 작성한 것이라 지금 보니 어색한 문장도 있고 고목이 읊조리는 생각도 부끄러워 오글거립니다만,

지금의 생각대로 수정하고 변형하면 그때의 감정이 회손될 것 같아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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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윤주[尹主] 2011.01.22 21:10

     오래전 글 보면 낯선 느낌 들때가 있죠 ㅎㅎ

     잘 봤습니다. 개인적으론 '불'이나 '타오르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나무가 '불타오르다'같은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예전에 쓰신 글이라니까요^^;

  • ?
    타이머 2011.01.24 08:32

    역시 그 부분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인데 너무 대충 넘어간 듯한 기분이죠 ㅠ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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