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향기가 아스라이 퍼진다. 옷깃에 하나 둘 맺히는 물방울은 슬며시 내 옷을 적신다. 이른 새벽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어두운 밤이다.
이 시간이면 으레 있는 일이다. 달도 서편 너머로 기울어져버린 마당에, 호수에 퍼지는 물빛 향기는 별빛마저 훔쳐가버린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별빛이 그리워 이 새벽에 어기적 어기적 기어 나오곤 하는 것이다.
허파 깊숙하게 들어오는 차가운 안개가 답답하여 들이마신 숨을 황급히 뱉어낸다. 입에서 안개가 새로 태어나며 울부짖는다. 문득 담배를 물고 싶어진다. 이런 기분을 달래려고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
아직은 밤이다. 새벽과 밤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에 나에겐 아직 밤이다. 훤히 보이던 산마저 안개가 삼켜버리는 바람에 혼자라는 느낌이 이렇게 강렬하게 다가올 수가 없다. 나는 외로운 것일까, 아니면 고독한 것일까.
외로움과 고독은 무슨 차이일까. 밤과 새벽의 차이인가. 전에 홀로 - 역시 외로움과 고독을 씹을 때는 혼자일 때가 제격이다 -
곱씹어 보았을때, 나는 의지라는 칸막이를 썼던 것 같다. 내가 원해서 홀로 있을 때는 고독한 것이요, 그 반대가 외로운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외로울까 고독할까.
잠시 옆의 나무 밑둥에 기대어 앉아본다. 축축한 흙위로 드러난 뿌리를 다리삼아 걸어갈 것만 같은 나무다. 아무도 없을 때 이 나무는 정말로 걸어다니는 것은 아닐까. 어린아이가 장난감에 가지는 환상을 나무에 투영해 본다.
아직도 물빛 내음이 호수 위를 뒤덮고 있고 나 또한 그 속에서 젖어가고 있다. 안개는 내가 이 곳에 오기 전부터 호수에서 기어나와
있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안개가 기어나오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저 내가 본 것은 깨끗한 호수와, 어느샌가 얕게 깔리는
안개와 나도 모르게 나를 삼켜버린 물빛 향기 뿐이다.
이 나무도 어느날 갑자기 크게 다가오지는 않을까. 그리고 어느샌가 생겨버린 입으로 나를 부를런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해줄까.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올까? 어쩌면 내가 아는 누군가로 변해서 생긋 웃어 줄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 등을 받친 나무가 정겹게
느껴져서 손으로 쓰다듬어본다.
해가 떠오른다. 이제 곧 이 호수의 안개도 걷힐 것이다. 어느샌가 허파에 들어오는 안개의 느낌이 많이 상쾌하다. 벌써 안개가 스러지는 모양이다. 역시 담배는 피우지 않는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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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시인마을의 '안개추억' 이란 시와 연계한 글입니다.
지금은, 그 안개(?)를 결국 제 폐속에 담고 있지요.
아아, 늙었어... ㅠ_ㅠ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