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영웅들의 지도

by 타이머 posted Jan 1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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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르는 곡괭이질에 파리처럼 날아 오르는 파편들이 귀찮다. A는 그런 파편에 이마를 내어주고서 아려오는 이마를 쓰다듬었다. 당장에 호된 소리가 날아온다.

- 놀지 말란 말이야.
- 잠시만 좀 쉬자고. 뭐가 그리 급한데 그래.

B는 그런 A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B자신도 지치긴 마찬가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해가 기울어가는 지금까지,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여태 곡괭이질만 해왔다. B는 곡괭이를 던져버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 하긴 쉬는 것도 필요 하지. 어차피 제일 깊이 파는 것도 아닌 것 같고.

A의 눈에 이미 저만큼 앞에서 굴을 파고 있는 사람들이 비쳤다. 대단하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출발선에서부터 곡괭이질을 해왔건만, 저들은 지치지도 않은지 정열적으로 파들어가고 있다.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힘을 주는 것일까. 자신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마는.

- 이봐.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나.

문득 B의 목소리가 A의 잡념을 깨운다. 그래. 고민해서 무에 좋은 것이 있을까. 저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불리는 자들이다. 언젠간 저 뒷모습까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파내려 가리라.

문득 A의 가슴에 오기가 찾아들었다. 저들도 하는데 내가 못할쏘냐. 저들을 따라 잡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저들의 뒷모습까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맞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A는 곡괭이를 집어 들고 바위 속으로 달려 들어가기나 할 것처럼 덤벼들었다. 어이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B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

이제는 다들 지쳐 버렸다. 캄캄한 어둠. 그러나 휴식의 시간이련만 정을 떼어내는 소리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른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영웅들의 지칠 줄 모르는 외침이었다. A는 아까의 그 열정은 어디 가버렸는지 큰 대 자로 누워서 자신이 파내려온 굴을 돌아보았다.

꽤 깊다. 입구에 반쯤 가린 초승달빛에 바위 파편들의 그림자가 기괴하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려고 몸을 길게 뻗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아마 저 녀석들도 영웅들에겐 질려버릴게 뻔하다. A는 피식 웃었다.

그때 그림자가 달빛을 가렸다. 구름인 줄 알았더니, 몇마리의 철새떼였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모양이다. 그때 B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고, A는 아무 생각없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 이 밤중에 웬 철새떼지.
- 영웅들인가보지.

B가 참지도 않고 웃었다. A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따라서 웃는다. 영웅들이라. B가 말했다.

- 길을 잃은 녀석들일거야. 불쌍하군.
- 그런데 저 녀석들이 길을 잃었는지 어떻게 알지.
- 다른 철새들과 길이 엇갈렸잖아.
- 그럼 그 녀석들이 맞는 길을 간 건지 어떻게 아는데.
- 글쎄.

B의 목소리가 곤란하게 끊어졌다. A는 이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을 하다가 동굴을 울리는 곡괭이 소리에서 박자를 찾아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만약 B가 말하지 않았다면 자장가를 불렀을 것이다. A는 피곤했다.

- 지도를 가지고 있을 거야.
- 무슨 말이지.
- 제일 앞에서 날고 있는 놈이 지도를 가지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매 번, 매 해 같은 곳을 찾아가겠어.
- 그도 그렇군. 그럼 우리의 위대하신 영웅들도 지도가 있는 걸까.
- 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렇게 깊이 팔 수 있었겠어.
- 음. 맞아. 그럴거야. 네 말이 옳아.

A는 눈을 거의 감으며 대답했다. B의 말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고, A는 더 이상 B의 말에 성의껏 대답 할 수 없었다.

- 아마 ...들은 이 굴을 ...면 무엇이 나오는... 있을...야. 저 ...에는 어떤 것이 ...지 궁금... 아?
- 궁금하지 않아... 따라 가기만 하면 되겠지 뭐...
- 그럼 왜 ...파는 ...? 궁금하... 않...

곡괭이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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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도, 목적도 모르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삽질(?)을 해야 합니다. 많이 파는 사람들이 유능한 사람들, 즉 영웅들이지요. 뭐, 그런 배경인겝니다.


2004년도에 쓴 글이 있길래 한 번 옮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