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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에 의한 작가와 독자의 관계>


 


 영화 <그린 마일>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사형 집행일을 앞둔 한 사형수가, 그때까지 감방에서 돌보며 길들인 쥐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장면이다. 한 간수가 자신이 키우겠다고 말한다. 사형수는 내키지 않는 듯 반응한다.
 그때 다른 한 간수가 쥐 마을에 보내자고 말한다. 사형수가 흥미를 보이자 그는 즉석에서 다른 간수와 말을 맞추어 있지도 않은 쥐 마을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인다. 플로리다 어딘가 있다는 커다란 천막 마을. 수많은 쥐들이 거기 살면서 방문객들을 위해 매일 공연을 펼치는 곳. 어른은 10센트, 아이는 2센트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입가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띄워진다. 죄수는 조금 걱정을 던 눈치다.



 눈치라 하니까 말인데, 평소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산다. 문학동에 거주하시는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쓰기 시작한 당신의 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고민해본 적 있을까? 힌트는 위에서 말한 간수와 사형수의 대화에 있다.



 많은 경우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가지만 우리가 쓰는 글들은 모두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흔히 ‘동기’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은, 실제론 주변 환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의식을 우연히 잡아낸 결과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돌보지?’라고 묻는 사형수의 문제의식처럼.



 물론 모든 문제의식은 글로 이어지지 않는다. 글보다 훨씬 쉬운 해결 방법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콜라 한 병을 사기 위해 A4 반 페이지 글을 쓰기보단 그보다 훨씬 작은 천 원짜리 지폐 몇 장만 있으면 된다. 사형수가 키우던 쥐 역시 간수가 돌봐주는 게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현실적이란 것은 어떤 측면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란 말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경우,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그 현실적인 제안을 불분명한 이유로 거부한다. 사형수는 간수에게, ‘대장님 집은 숲 속에 있잖아요.’ 라면서 그가 쥐를 돌볼 수 없을 거라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나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그가 말한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안 좋은 머리는 급하게 생각을 짜낸다. ‘아마 말하지 않은,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를테면 미련 같은.’ 그래, 사형수는 사실 쥐를 돌봐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죽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사형수는, 잘 이해되지 않는 논리로 현실적 대안을 거부한다. ‘독자’라 불리는 인종들을 비롯해 세상 대다수 사람들이 이 사형수와 같다. 프로이트의 생각처럼, 사람들은 자아 아래 이드의 시커먼 늪지대를 하나씩 가지고 드러내지 않는다.
 ‘쥐 마을’은 그런 사람들에게 던지는 환상적 대안이다. 실존하지 않는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란 이름의 간수는 금새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마치 실재하는 것인 양 포장한다. 명심하라. 거짓말이지만 잘 꾸며 사실처럼 보이지 않으면 ‘독자’란 이름의 사형수를 안심시킬 수 없다.



 물론 아무리 완벽한 거짓말을 짜냈다 하더라도 환상은 환상, 사형수가 ‘쥐 마을’이 실존하지 않는 거짓임을 모를 리 없다. 물론 내가 스티븐 호킹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의 순진무구한 사형수는 그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세상에 순진무구한 사람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그 사형수 역시 ‘쥐 마을’이 거짓이란 건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에 그가 안도한 것은 그 이야기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 아니라, 실은 이야기를 해준 간수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독자는 결코 순진하지 않다. 그들이 이야기에 대해 열광하는 건, 이야기가 너무나 ‘리얼’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본 작가의 면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①문제 제기가 일어나면 ②현실적 대안이 제시되고, 많은 경우 해결되지만 ③어떤 이는 대안을 거부함으로써 현실 이외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을 잘 붙잡은 누군가가 ④환상적 대안을 제시,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면 그제야 이 환상적 대안을 발전시킨 ⑤이야기가 등장하고 ⑥독자와 작가의 소통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등장 전까지의 과정은 대개 현상으로 드러나거나 보이지 않는 과정이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고, 일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모를까. 자기 삶과 관련 없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단 사실을.



 21세기 오늘날,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소통 수단으로서 소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TV며 인터넷, 휴대전화 등등 온갖 소통 수단이 발전한 이 세상에 활자 텍스트가 그 다른 모든 소통 수단들과 어떤 다른 장점이 있기에 살아남는지. 많은 이론이 있지만 나는 이런 의견을 선호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관음증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관음증이란 남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 세상 어떤 소통 매체보다 더 관음증에 호소한다. 창도 시민들에게 물어보자. 3인칭은 관찰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며, 1인칭은 그 내면까지 파고들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다. 새로 산 책 냄새를 맡는 페티시가 있다고도 하더라. 이미 텍스트를 넘어서 그 텍스트를 제공한 이들에 대한 욕망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라면 원서와 번역서, 재판 등등이 모두 내용만 같지 물리적 성질이 동일하지 않을 텐데 애서가라고 굳이 냄새까지 맡아볼 이유가 없으니까. 이러한 욕망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작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의 변형이다. 작가는 노출증 환자란 말도 있으니까. 인터넷 야동이 이렇게 다양한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던가?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은 세상 어떤 소통 수단보다도 더 강력하다.



 <그린 마일>의 사형수 일화가 제시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는 소설의 역할이 당장의 현실 문제 이상의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이란 점이다. 혹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소설은 늘 현실 문제 이상을 내다보아왔다. 많은 분들이 좋아한다는 이상의 <날개>도 그렇고, 조세희 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발은 땅에 딛고서 치열하게 살아오는 인물들을 그렸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눈만은 항상 하늘의 달을 향해 있었다. 운동권, 비운동권, 사회주의, 보수주의 어떠한 사상 논리 아래 쓴 소설이라도 상관없다. 모든 글은 현실 문제 이상을 바라본다. 글 쓰는 이들이여. 우리는 늘 현실 이상의 무언가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판타지 소설이 앞으로 감수해야 할 역할이다. ‘쥐 마을’ 이야기처럼 지극히 환상적 대안 바탕으로 썼다 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은 항상 현실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욕망을 찾아 제시하려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환상적 대안 속에서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 또한 요구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세 판타지에서 이세계 소환 판타지, 최근의 게임 판타지로 이어지는 취향 변화 추세를 보라. 판타지에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져 감을 알 수 있다. 아직 나오지 않았단 포스트 한국 판타지의 대표주자는 리얼리티성이 극도로 강조된 현실 배경 판타지일 거란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게임이란 구조 내에서만 환상적 대안과 안도를 얻을 수 있는 게임 판타지 한계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서 색다르게 체험할 수 있으면서도 현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현실 기반 판타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지 않을까 생각하는 탓이다.



 판타지는 ‘환상적 대안’을 어느 소설보다 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동시에 리얼리티는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창도 시민으로서 바라는 건, 창도 분들이 이런 글들을 많이 써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또 글에 대한 각자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서로 치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이것이 공론이라고 이야기하실지 모르겠다. 리얼리티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추구해야 할 리얼리티가 무언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건 침묵해야 하기 때문인가?



 변명을 조금 하자면, 리얼리티의 추구 방향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황석영이 생각하는 리얼리티와 이문열이 생각하는 리얼리티의 차이가 두 사람의 삼국지를 그렇게나 다르게 만들었다. 작가가 리얼리티에 대해 어떻게 정의내리고, 어떻게 리얼리티를 추구해나가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보는 ‘자신 내면의 거울’일 것이며, 동시에 독자가 보는 ‘작가를 향한 작은 유리창’이 될 것이다.


 


200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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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 이벤트 파이팅입니다!!


상금이나 평가단 문제만 아니면 정기 이벤트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참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응원용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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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Yes-Man 2009.10.27 05:13
    저도 그린마을을 봤는데... 톰행크스 나오고, 그 아마겟돈에서 나오는 흑인나오는...
    // 윤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리얼리티, 그것은 판타지라는 이름을 떠나 '소설'이라는 분류에서 단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판타지가 내용의 배경이나 세계관이 비현실적인 것이지 현실을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벋어나고자 유희적으로 쓸 수도 있겠습니다만, 판타지 소설도 하나의 소설의 장르로서 인정 받기 위해서는 흔히 말하는 '작품성'이라는 것이 있어야 겠지요. 몇분에게는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중고등학교 때 소설가가 꿈이었던 이유가 판타지 소설이 멸시 받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특히 한국 판타지 소설 말입니다. 잘 살펴보시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주제를 가지고 썼거나, 인간의 위대함(드레곤이나 다른 종족과 다른 인간이 갖는 감정 등)을 주제로 한 소설도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 보면 소모적이고 허섭스레기 소설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속에는 진흙속에 진주가 있고 그것들이 싸잡혀 멸시되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소설을 쓰며 자신의 머릿 속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고, 독자들과 공감하는 것은 정말 두근거리는 것입니다. 즐기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주제가 있는, 그저 소모적인 것이 아닌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뜻 있는 소설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연스럽게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판타지 소설의 가장 큼 장점은 쉽게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즐기고 재밌으면서 뜻있는 소설, 저는 그것을 꿈꿔왔습니다. 그것이 글쓰기 실력이 부족한 저로 끝나기 보다는 글 쓰는데 있어 저보다 능력있으신 분들이 저의 꿈을 이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 한가지 더하자면 자기의 개념과 사고를 확고하게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글을 볼 때는 한걸음 물러나 자기의 의견을 말하되 작가의 의견도 이해야고 존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정말 그 속에 감춰진 것이 많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벤트를 열면서도 많이 걱정했구요. 그리고 또한 독자의 의견을 받는데 있어도 자신의 의도와 다르다 할지라도 충분히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서로 살아온 길과 그 길 위에서 경험한 것들이 다르니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조금 양보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분쟁이 아닌 의견을 주고 받는 바람직한 토론의 장이 될 것입니다.
  • ?
    RainShower 2009.10.27 11:44
    현실 이상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글쓴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찾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글을 쓰는건 역시, 그 무언가를 찾기위함이고, 또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함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현실 이상에서 무언가를 찾으면서, 현실을 반영한다. 정말 말로는 쉬우나,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현실, 리얼리티란 제 생각엔 되도록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야기를 듣고, '이건 말도 안돼'라는 소리가 적을 수록 보편적인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세계관이나 관념을 고수한 상태에서 모든이의 공감을 받아드릴 수 있는 소설. 모순적이게도 초이상주의적 글. 그러한 글을 쓰려면 일단 작가 자체가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분명, 아무리 작가가 리얼리티를 추구하였더라도, 그 리얼리티는 결국 작자의 세계관과 관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리얼리티의 반영에 있어서도, 소설로써 얼마만큼의 현실을 반영하느냐도 개개인의 입장에서 다르기도하고... 물론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로 현실과 이상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소설이 있다면(모든이를 공감시킨다까지 포함), 아마, 지구탄생 이래 최대의 역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실과 이상을 적절히 갖춘 소설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이론은 없으나.,도대체 어느정도의 비율로 현실과 이상이 섞여야하는가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다양하고 수많은 독자 입장에서...]

    그러한 면에서 미루어,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차라리 강력한 환상을 추구하려면 아예 가능한한 현실을 배제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 아니면 극단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던지. 하지만 이 또한 이상적이지요.

    그러니까.. 제 말은 소설에서의 현실과 이상은 어떻게든 이상적일 수 밖에 없고...

    자연히 글쓴이 또한 리얼리티를 가미했다지만 이상적으로 쓸 수 밖에 없고, 독자들 또한 리얼리티를 인식하지만 역시 이상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그 반대도) 그러므로 그것은 추구해야할 일이기 전에 당연한 일이다. 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윤주님의 좋은 글을 보고선 이런 허접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ㅠㅠ



  • ?
    Rei 2009.10.27 20:23
    그래서 얼음과 불의 노래가 재밌지
  • profile
    윤주[尹主] 2009.10.27 21:34
    Yes-man/제 손을 떠난 순간부터 그 글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라는 점, 인정해야죠. 만약 독자가 작품에 대해 작가과 다른 입장을 가질 경우, 그건 작가가 충분히 자기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글 스스로 독자에 의해 2차 생명력을 부여받은 경우일 겁니다.

    RainShower/어떻게든 이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자신만의 조합법 정도는 있는게 좋겠죠. 문제 제기는 굉장히 적절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문제 제기입니다, 아무튼.

    Rei/얼음과 불의 노래 재미있나요? 판타지 붐 시절에 대량으로 쏟아져나온 장르소설들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아서...차후에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profile
    Yes-Man 2009.10.27 21:46
    음... 전달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지만, 독자가 작가의 표현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죠. 사실 제 입으로 하긴 뭐하지만, 제 시 같은 경우는 재대로 표현에 대한 이해(왜 이표현을 썼는가라든가)나 주제에 대한 이해가 잘 못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렌샤삼촌이나 어느정도 내공을 쌓으신 분들은 이해를 해주시지만, 아예 이해를 모하시는 분들도 많아서요.
    뭐, 그런 것도 이곘지만, 배려라는 것이 필요하다는겁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분이 제 시를 평가하시는데 있어 무작정 재대로 이해하시지도 않고 대충 평가를 해버리시더군요. 그것은 표현의 문제를 떠나 이해를 하지 않고 자기 주관적인 것으로만 시를 본겁니다. 문제는 제 표현에 대한 것을 설명드리는데 있어 그분이 아예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경험차이라기보다는 배려가 부족하다라고 생각됩니다. 내 손을 떠나면 나만의 작품이 아니게 되지만 분명 작가로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독자에게는 분명 화를 느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배려는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저는 최대한 타인의 의견을 존중해주려고 정말 노력합니다. 배려없이 주장만 한다면 누가 그 주장을 귀 기울이겠습니까?
  • profile
    Yes-Man 2009.10.27 21:47
    첫째줄에 '효과적'이 아니라 '비효과적'
  • profile
    Yes-Man 2009.10.27 22:10
    정리하자면, 독자가 2차 생명력을 부여하는 선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작가의 의견도 '인정'해 주는 선을 말하는 겁니다. 글 쓴 사람은 작가인데, 자기가 다르게 해석했다고 작가의 의견을 아예 무시하다니요.
  • ?
    Rei 2009.10.28 22:05
    얼음과 불의노래 외국판타지입니다
  • ?
    청량요플레 2009.10.28 22:15
    10주년 기념이라지만,
    이런 내용은 창게보다 시발장이 어울릴 것 같아요.
  • profile
    클레어^^ 2009.11.12 10:16
    우으으... 저도 리얼리티 생각해서 소설을 현실감 있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배경지식도 별로 없고, 어쩌다 쓰다 보니 막장드라마 뺨치는 구성이 되어 버린다는게 흠이랍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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