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ybreak

by RainShower posted Sep 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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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엔 언제나 적이 있습니다.


 


닿기만해도 부스러질 정도로 잔인한 운명이며.


 


그대 손엔 언제나 검이 있습니다.


 


어떤것이라도 베어버릴 정도로 강인한 의지이며.


 


적과 검은 언제나 모순이며.


 



그대도 모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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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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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r u a n i s i a >


 


[------------------]


 


*  *  *


 


 새의 지저귐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자리잡은 작은 마을.


 


 푸른 나무잎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하늘의 축복으로 보이는 그림같은 마을에 한 소년이 버려졌다. 소년이 버려진 시기는 온 대륙이 17개의 나라로 갈라져 피튀기는 영토전쟁을 벌이던때. 하지만 인적이 드믄 이 마을은 전쟁의 손길이 닿지 않아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 난리를 용케도 피해서, 여까지 도망쳤구나."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은 상처투성이 옷을 입고 쓰러진 소년을 일으켜 등에 업는다. 업는 순간 노인의 다리가 간헐적으로 흔들린다.


 


 "아이쿠, 나이가 들었구만 나도..."


 


 인상을 찌그리면서도 소년을 버리지않고 숲길을 따라 마을로 향하는 노인의 뒷모습이 희미해져간다.


 


 


*  *  *


 



 구원.


 


 온몸에 스며드는 온기를 느끼고 처음 떠올린 단어였다. 그 피투성이 광란의 축제에서 도망쳤다는 것조차 기적같은데,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절말의 나락속에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굴린 애처로움이 하늘에 닿은건가.


 


 살아있어서 행복해요.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끊어질듯한 다리의 고통따위 구원의 빛에 사그러든다. 환한 미소같은 따스함에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기나긴 꿈자리에서 일어나 알아차린다.


 


 모두다 죽었다는 걸.


 


*  *  *



 소년은 오늘도 마을 뒤 작은 언덕에 앉아있다. 마을 공터에서는 같은 나이또래의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수해를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 탈색이라도 된듯 새하얀 머리카락때문에 따돌림이라도 당하는걸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소년의 눈빛은 너무도 공허했다. 외로움, 우울함, 슬픔조차 비치지 않는 불투명한 망막.



 소년은 마치 속이 텅빈 돌석상처럼 언덕끝에 위태롭게 있었다.


 


 작은 잔디가 바람에 쓸린다. 그 율동에 소년의 백발도 흐느적거린다. 언덕바로 앞은 수해로 낙하하는 절벽이 있는데도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소년. '바람구멍'이라고 불릴정도로 거친바람의 언덕이건만 소년은 겁먹지 않는다.


 


 아니, 아예 신경을 안쓰고 있다.


 


 매혹적인 꿈나라에 빠진듯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년. 그런 소년을 깨우려는 듯 한껏 기세를 올려 부는 바람. 꽤나 힘을 쓴 모양인지, 소년의 앞머리가 비산하며 이마를 들추어낸다. 그와 동시에 꿈의 커튼이 말려올라간 모양인지 소년의 눈동자가 뚜렸해진다.


 


 어느새 그림자는 길게 드리웠다. 태양은 수해끝에 간신히 걸려있었다. 이제 곧 어둠이 찾아올시간. 소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직도 다 낳지 않은 상처덕에 걸음걸이는 비틀거린다. 가끔씩 넘어질뻔하지만 주변의 나무를 잡고 간신히 버틴다. 소년이 언덕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서자 뛰어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들어간다.


 


 부모님들의 이끌림에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속에서 소년의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이 있었다.


 


 소녀의 연두빛 눈동자로 말괄량이같은 고집이 옅보인다. 누구든 처음보는 순간, '골목대장'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어쩐일인지 소녀는 소년을 한차례 지긋이 바라보더니 자기 집으로 간다. 평소에 아이들의 시선을 무시하던 소년이지만 그 소녀의 눈빛만은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매번 저런식으로 소년을 쳐다보는것이었다. 겉으로는 못본척하면서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는 소년.


 


 마을 변두리에 작은 집. 소년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서 오렴. 테아."


 


 막 들어오는 소년을 할아버지가 반겨준다.


 


 "네, 다녀왔어요."


  


*  *  *



 식사중에도, 설거지후에도 할아버지는 소년을 슬프게 바라본다. 그도 그럴것이 소년이 이 마을에서 살게된지 벌써 1년인데, 전혀 이곳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기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멍한 채로 언덕위에 올라갈뿐. 자주 소년이 쩔뚝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하는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가진 할아버지. 삶의 끝자락에서 얻은 아이가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리저리 뒤흔든다.


 


 "걱정이구나..."


 


 지금은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을 소년을 생각하며, 할아버지는 한숨을 쉰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결코 소년을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입은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결코 얕볼만큼 할아버지는 미숙하지 않았다. 분명, 어린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겠지. 그렇기에 할아버지는 오히려 소년이 평범하게 되지 않는것을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그윽한 눈빛은 창밖의 어딘가를 아련하게 바라본다.


 


 깨끗한 창문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로 깨끗한 밤하늘인건지, 유난히 별이 두드러진 밤이었다.



*  *  *



 점심이 약간지난 시간, '바람구멍'언덕에 망부석이 보인다. 예의 '테아'라는 소년이었다.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는 자세로 수해를 내려다보는 소년. 무아지경에 빠져든 소년은 흐리멍텅한 눈빛만 빼면마치 도를 닦는 수도승과 흡사했다.


 


 "야, 너 테아라고 했지?"


 


 문뜩 소년의 뒷덜미를 움찔하게 만드는 앳된 음성. 할아버지 이외에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게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 이외에 누구도 자신에게 말걸어주지 않는다. 물론 애초에 소년쪽에서도 말을 걸 의향도 없었지만.


 


 고개를 돌린 소년의 앞에는 매번 자신을 쳐다보는 붉은 머리의 소녀였다.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 이젠 말까지 걸어오네'라고 생각한 소년은 소녀의 기분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귀찮다는 기분을 표정으로 나타내었다.



 "응, 무슨 볼일이라도?"



 정떨어지는 대답이었다. '볼일이 없으면 말걸지마'라고 말하는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 도발에 걸려들지 않은 모양인지 표정도 목소리도 변함없다.


 


 "아니, 없어. 그냥 불러봤어. 너 항상 여기서 멍하고 있으니까 궁금해져서 말건거야."


 


 반격이라고 불러도 충분한 말이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소녀의 목소리에는 악의같은건 눈을 씻고봐도 찾을 수 없었다.


 


"상관마."


 


 '꺼져'라고 말하지 않는 점이 무섭다고나 할까, 소년은 매몰차게 말을 내뱉는다. 자신에게 말건것이 단순히 심심풀이였다는 고백을 듣고 소년은 기분이 나빠진것이다.


 


 "아니, 상관할꺼야. 너야말로 내가 상관하든 말든 상관하지마."


 


 소녀는 모순과 압박이 듬뿍담긴 억지를 부린다. 과연 첫인상과 별로 다르게 놀지 않는 소녀였다. 그 점에서 속으로 실소하는 소년. 이 이상 말려들면 괴로울것같아, 소년은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러자 문득 이 소녀가 자신을 자주 힐끗힐끗 쳐다본다는걸 생각하고는 가려던 길을 멈춘다.


 


 "아, 하나 물어봐도 될까? 너 말이야. 왜 나를 자꾸 쳐다보는거지? 기분나쁘게.."


 


 소년은 정말로 화가 난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 그거. 알았어. 말할께. 나 사실 너한테 관심있어."


 


 라고 엄청난 말을 간단히 해버리는 소녀.


 


 "...뭐라고? 너 지금 뭐...."


 


 마치 지뢰라도 밟은 듯한 표정으로 소년은 말을 더듬는다.


 


 "관심있다고."


 


 그에 반에 무덤덤한 소녀는 '놀리는게 아닐까?'라고 생각될정도로 아무렇지않게 말한다.


 



*  *  *


 


 


*  *  *


 


[------------------]


 


< D a y b r e a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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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뭐지?"


 


 엉망이 된 몸을 질질 끌고 집으로 도착해, 방문을 열었을때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마치, 내가 집을 잘못찾아왔나?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우경이는 편한하게 내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분명 이슈미아의 짓이겠지. 참내 헤어질때도 이런 민폐를 끼치고 가다니.


 


 "하아. 또, 거실인가.."


 


 장롱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내 거실로 나간다. 거실에 걸린 시계는 7:30을 가리키고 있었다. 의외로 이른 시간이었다. 꽤 많은 일들이 지나가서 한 10시나 11시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문뜩 텅텅 빈 위가 경고음을 보내온다. 찬장에 라면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냄비를 꺼내 물을 담는다. 가스레인지를 키고는 라면을 넣은 냄비를 올린다. 그것을 끝으로 주방을 벗어나 베란다로 나간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몸을 괴롭히던 달빛은 마주보고 선 103동과 104동 덕분에 이곳까지 닿지 않는다. 문득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흰 입김에 완연한 겨울임을 느낀다. 아이들이 없는 한밤의 놀이터는 침묵과 고요로 가득차 있었다. 그네는 저혼자 바람에 쓸려 흔들거리고, 시소도 조금씩 흔들려 '삐익'하고 귀신같이 울어댄다. 단지 가운데를 통과하는 도로는 퇴근시간이여서 소란스럽다. 가끔식 우리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도 보인다. 분명 야자땡땡이일테지. 그렇게 학교에 홀로 남았을때처럼 멍하니 있는다. 그러고보니, 이것도 오랜만에 해보네.


 


 뿌우우우-


 


 어디선가 어린이 장난감 기차가 낼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지지직' 소리가 뒤를 잇는다. 불이 물에 꺼지는 소리와 흡사하다고 느끼던 찰나, 곧장 주방으로 달려든다. 다행히 라면국물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가스레인지를 끄고 벨브를 잠근다.


 


 지겨운 라면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자 몸이 축쳐진다.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는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1주일정도였지만, 그래도 다시금 찾아온 이 조용한 식사가 너무도 반가웠다. 그러나 그 반가움 속에 알수 없는 공허감이 둥지를 틀었다. 알수 없는 공허감의 먹이가 된채 한참동안 젓가락질도 하지 않은채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유를 알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빠진걸까라고 뿔어가는 라면을 지긋히 쳐다보고 있자니.


 


 "아, 맞다. 계란"


 


 문뜩, 잊어버렸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