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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린다. 문이 닫힌다.
문은 무언가가 들어오기 위해, 또는 나가기위해 열린다. 이번에도 그랬다. 문은 두 명의 사람을 문 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들은 이 방이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기 위해 들어온 것 같았다. 이 방은 병실이었고 2인실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았을 때 두 명 중 한 명은 간호사였다. 한 명은 사복을 입고 있지만 손에 들린 환자복으로 보아 이 방에 새로 들어온 환자가 분명했다.
“승윤씨, 신입이에요.”
승윤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힌 소리에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다가 간호원의 말이 있어서야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윽고 다시 TV에 집중했다. 간호원은 신입이 사용할 침대를 정리하며 신입에게 조용히 말했다.
“룸메이트가 좀 무뚝뚝하죠?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게 완전히 조용한 사람도 아니고, 문제가 있다면 자기 내킬 때만 말이 많아진다고 할까? 승완씨, 잘 지내봐요. 그래도 유일한 룸메이트인데.”
간호원은 말을 마치고 승완을 올려다보았다. 승완은 미소-예의상이라는 느낌이 조금 드는-를 지어보였다. 간호원은 승완에게 병실에서 행동해야하는 규칙 같은 걸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모든 설명을 다한 간호원은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챙긴 물건을 들고 문 앞에 서 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몸을 돌려 승완과 승윤을 모두 보았다. 그녀는 말했다.
“두 분이 잘 지내보세요. 참 공통점이 많은 거 같은데. 2인실에서 나이도 비슷하고 ,이름도 비슷하고, 그리고 또…….”
그녀가 말하던 중간에 그녀의 손이 끼어들어 그녀를 막았다. 그녀의 왼손은 그녀의 입을 쥐었다.
“그리고 또?”
그녀의 막은 입술을 보며 여태껏 TV만 보던 승윤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녀는 아니라는 말과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병실에서 사라졌다. 병실은 두 명만 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침묵했고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TV만이 그들의 어색함을 메우고 있었다.


말을 먼저 꺼낸 건 승윤이었다. 그것도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침을 먹고 TV를 보다가 재미가 없었는지 TV를 끄더니 슬리퍼를 신고 침대에서 나왔다.
“잠깐 나올래요? 음료수 살게요.”
문 앞에서 그는 승완에게 말했다. 승완은 고개를 저으며 흐릿한 미소로 거절했지만 승윤은 막무가내였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나와요.”


4층 야외 휴개실에 들어와 승윤은 문 옆에 있는 자판기에 돈을 넣었다. 그는 코카콜라를 뽑았다. 뒤늦게 따라 나온 승완은 오렌지음료를 골랐다. 음료수를 승완에게 넘기고 거스름돈까지 챙긴 승윤은 난간으로 가 등을 기댔다. 승완은 그 뒤 벤치에 앉았다.
“고등학생이지? 내가 형인 거 같으니까 말 놓을게.”
승윤은 캔 뚜껑을 따며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하지만 승완은 캔 뚜껑을 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캔을 쥐고는 승윤의 말을 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답변이 없었다. 승윤은 그런 승완을 보고 한 번 피식 웃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승윤은 하늘을 향해 담배를 불었고 그게 공기중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다시 승완에게 말 걸기를 도전했다.
“그래서, 언제 죽는데?”
자극적인 단어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벤치에 앉아 조용한 눈으로 캔만 바라보던 승완은 갑자기 무서운 눈빛으로 승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은 눈만큼이나 강한 어조를 띄고 있었다.
“누가 그래요?”
승완은 말 그대로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승윤을 보았지만 승윤은 그 눈빛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난간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담배를 피웠다.
“나 조금 있으면 죽는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다크한 포스를 24시간 꾸준히 뿜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냐? 그런 질문하기 부끄럽지 않냐? 그리고…”
승완은 화를 내려고 했다. 모르면 닥치라고, 아는 척 하지 말라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려 했다. 하지만 승윤의 다음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 간호사가 하려다 지 손으로 입 막고 하지 못한 말, 뭐였을 거 같아?”
승윤은 승완을 쳐다보았다. 장난기 같은 건 찾을 수 없는 건조한 눈빛이었다. 승완은 뭔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캔을 보았다.
“그 간호사 참 생각 없네요. 그래서, 그 쪽은 무슨 병이에요?”
승윤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마신다음 하늘을 향해 뱉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였다.
“폐암.”
승윤의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런데 폐암이라니. 게다가 그는 폐암이라고 말하면서 담배를 놓지 않고 있었다. 지금 농담해요?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승완의 표정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고 있었다. 승윤은 승완의 표정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예상하고는 답하였다.
“이미 폐암이 발병된 상태에서 담배는 폐암에 관해 어떠한 악화도 시키지 못한대. 펴도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는 소리지.”
“그거 믿을만한 정보에요?”
“믿고 싶은 정보.”
담배를 끄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는 난간에 기대 바깥을 바라보며 콜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죽어도 싸죠.”
승윤은 승완을 보았다. 승완은 캔 너머의 허공을 보며 무언가에게 뭐에 홀린 듯 말을 쏟아냈다.
“폐암에 걸리고도 담배피는 걸 보면 당신은 정말 죽어도 싸요. 저요? 전 당신과 달라요. 당신같은 사람은 10년 후도, 1년 후도, 심지어 내일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만 보며 살아왔겠지만 전 달라요. 저는 당신과 다르게 살아왔어요.”
그의 흐리멍텅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전 언제나 미래를 생각해왔어요. 내일 모레 이런 차원의 미래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살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될지 그리며 현실보다는 미래를 위해서 살아왔어요.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당장은 참으며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병에 걸렸대요, 나 참. 신경성 위염이 확장되어서 위궤양에 걸리고, 위벽에 상처가 생겼는데 골육종에 걸려 그게 위에 침투되고. 이게 다 지르고 싶은 대로 못 질러서 걸린 병이래요. 자꾸 소심하게 마음속으로만 끙끙대니까 신경성 위염이 확장된 거래요. 난 어차피 미래를 사니까 미래에는 내가 너희들보다 대단해질 테니 당장은 조금씩 참아가며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서 죽게 생겼대요. 미래를 위해서 살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미래가 오기도 전에 죽게 생겼어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물이 떨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눈물은 차올랐다. 말과 눈물이 모두 뜨거운 가슴에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365일 뛰는 심장처럼 도저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젠 그렇게 안 살 거예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지르고 싶은 대로 지르고 그렇게 이젠 막 살아볼 거예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닥치는 대로 살아 볼래요. 마치 그 쪽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되는대로 막 살아보려구요.”
승윤은 화가 난다기 보단 어이없는 눈빛으로 승완을 쳐다보았다. 승완의 눈에서는 아직도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는 걸 보다가 승윤은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너 진짜 억울하긴 하겠다! 대학 한 번 가보겠다고 그렇게 공부하며 살아왔는데 세상에 수능도 못보고 죽는다니!”
승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승윤은 그의 옆으로 와 벤치에 앉았다.
“넌 어느 계절을 좋냐?”
“겨울이요. 추운 겨울.”
승윤은 마지막 남은 콜라 한 방울 까지 다 마시고 자리에 앉아 불리수거 함으로 캔을 던졌다. 캔은 아슬아슬하게 모서리를 맞고 들어갔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그리 맑은 날은 아니었다. 태양은 먹구름 사이에 감춰져 따스한 햇살을 느끼긴 어려운 날씨였다.
“나는 여름이 좋거든. 뜨거운 여름이 좋아. 그런데 지금은 여름이잖아. 여름, 지금은 바로 내 계절이니까 네가 막말한 거 내가 용서 할게. 내가 웃은 건 다음에 겨울이 오면 그 때 네가 날 용서해라. 그리고 그거 음료수 내 돈 내고 사 준 거니까 다 마시고 들어와라.”
승윤은 자리를 떠났다.


그날 저녁 어두운 병실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떴을 때 승완은 도둑이 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윽고 병실이라는 걸 깨달은 그는 승윤이라는 걸 깨달았다.
“거기서 뭐해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승윤의 목소리가 덮여졌다.
“네 말처럼 되는 대로 막 살아보려고.”
승완은 어둠에 눈이 익숙지 않아 핸드폰을 찾고 핸드폰 불빛으로 승윤을 비춰보았다. 승윤은 환자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물품들을 챙기고 있었다.
“어디 가요?”
묵묵부답으로 승윤은 가방을 챙겼다. 지퍼를 닫고 가방을 맨 후에야 승완은 이제껏 기다린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이제까지 내일도 생각하지 않고 막 살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며칠동안 병원에만 갇혀있었더니 갑갑해 죽겠다. 역시 병원은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며칠만이라도 바깥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승윤은 그 말을 끝으로 문으로 향했다. 승윤이 문지방을 넘으려할 때 승완이 소리쳤다.
“잠깐만요!” 승완은 다급히 말했다. “같이 가요.”
승윤은 당황하였다. 승완이 아까 그렇게 막 나가겠다고 말하였지만 그냥 하는 푸념 같은 것 일줄 알았다. 절대 일탈이란 건 꿈도 못 꿀 순둥이 일 것 같았다.
“너 살 확률이 얼마나 된대?”
“반반이요.”
“그 정도면 나처럼 도둑새끼처럼 숨어서 안 나가고 치료 다 받고 당당히 나갈 수 있겠네.지금 여기서 나가서 시간 버리면 살 확률 반반도 안 될지 모른다?”
승윤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 승완은 침대에서 달려 내려와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요! 어쩌면 살아서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겠죠! 살 확률이 반이나 되니까!” 승완의 표정은 아주 애절하지만 강인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확률도 반이나 된단 말이에요…….”


“헬멧 없어요?”
125cc짜리 붉은색 오토바이가 그들 앞에서 빛났다. 승윤은 오토바이 올랐다.
“신호 다 지키고 횡단보도 건널 때는 오른손 꼭 들고 그러면서 막살게?”
승완은 승윤의 뒷자리에 탔다. 시끄러운 시동음을 내고는 오토바이는 발진했다.
오토바이는 시내를 뚫고 달렸다. 웬만한 신호는 승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종종 보이는 차들은 마치 멈춰있는 그림처럼 그들이 보인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오토바이 뒤로 잊혀져갔다. 승완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암 선고를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죽음의 느낌이었다. 얼굴에 끝없이 불어치는 강풍은 그야말로 죽음이라는 건이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너무나 두려워 눈을 감았다. 승윤을 꽉 쥐어 잡았다. 승윤의 휘날리는 긴 뒷머리가 승완의 얼굴을 자꾸 때렸다.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정신을 사납게 했다.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롤러코스터가 빨리 종착점에 도착하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시끄러운 엔진소리도 바람도 속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승완은 드디어 눈을 떴다. 그곳은 싸구려 여관 앞 주차장이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고는 여관으로 향했다. 승완은 내렸지만 너무 어지러워 잠시 숨을 고르다가 여관을 향해 들어갔다. 승윤은 카운터에서 방을 잡고 방을 찾아 갔다. 승완은 헐레벌떡 그를 따랐다.
여관의 복도는 습하고 어두었다. 차버리면 뚫릴 것 같은 나무문에 승윤은 열쇠를 꽂아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승완은 치를 떨었지만 방안은 더 가관이었다. 4평 남짓한 방에 딸려있는 가구라고는 수납장, 장롱, TV. 도배도 기분이 왠지 안 좋아지는 싸구려 푸른색 도배지. 다행이도 화장실은 있어 씻을 수 있긴 있을 거 같았다.
“이런대서 자게요?”
승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이불을 피기 시작했다.
“그럼 호텔을 원했냐?”
“호텔은 아니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부자 아니었어요?”
“왜, 그런 착각을 했는데? 내가 병원 2인실 써서?”
승완도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승윤은 다 핀 이불위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누웠다.
“안 씻어요?”
승윤은 몸을 틀어 옆으로 누웠다.
“불 좀 꺼줘.”
승완은 불을 껐다. 그리고 화장실의 불을 켰다. 화장실에 들어가 씻으려다 더러운 화장실 내부를 보고는 그 생각이 싹 가셨다.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었고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따뜻한 물도 그리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세수를 하는 것으로 씻는 걸 마치고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핸드폰 불빛으로 잘 자리를 찾아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찬 물로 세수를 해서 그런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뭐 할 거예요? 할 거 정해놨어요?”
“응. 하나 생각나는 거 있더라.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해보지 못한 거. 할 수 없었던 거 하나가 생각나더라.”
“그게 뭔데요? 이제까지 해보지 못한 게?”
“공부.”
승완은 승윤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창문도 없는 방에서 승윤이 보일리 만무했다.
“겨우 그거 하려고 병원을 뛰쳐나온 거예요? 그런 건 병원에서 해도 되잖아요.”
“말했잖아. 병원은 나랑 안 맞는다고. 갑갑하기도 하고. 뭘 하더라도 나와서 하고 싶더라.”
“근데 왜 하필 공부에요? 하고 싶은 걸 다 해본 거예요, 아님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없어요?”
“그냥 이제껏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아왔는데, 너 같이 앞을 보고 달리는 놈들은 어떤 생각일까 어떤 기분일까, 뭐 그런 거지. 그런 넌 내일 할 거 정했어?”
순간 승완은 승윤이 멋있어 보였다. 어떻게 언제나 저렇게 당당할까? 그는 망설임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모르겠어요……. 아직은.”
해가 밝으면 부모님이 찾으시겠지? 나는 정말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걸까? 살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이렇게 나와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정말 있긴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 그리고 작은 후회들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 찾았어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승완이 말을 하였지만 저 어둠 속 승윤에게서 답변이 없었다. 벌써 그의 의식도 어둠 속으로 가 버린 것일까? 승완이 약간 실망하려 할 때 승윤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뭔데?”
“만약 세상이 내일 멸망한다면 멸망 전 날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할 거, 뭘 거 같아요?”
승완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승윤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섹스?”
한심했다. 저런 인간을 순간이나마 멋있다고 생각한 승완, 본인이 한심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승윤은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뭔데? 세계 멸망 직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할 거라는 게?”
승완은 그의 물음에 다시 설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그 설렘이라는 걸 여과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바로…… 고백이요.”
“고백?”
“네, 정말 내일 당장 죽는다면, 죽기 전 날 가장 하고 싶은 건, 가장 해야 할 건 그 동안 말하지 못하고 속안에 꽁꽁 숨겨두기만 했던 말을 꺼내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가장 후회가 없지 않을까요? 만약 정말 그렇게 돼서 온 세상이 모두 힘들게 감춰왔던 고백으로 가득 차게 된다면, 세계 멸망이라는 거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 같아요. 죽음이라는 거 그리 슬프지만은 않을 거 같아요.”
“그게 네가 생각한 일탈이야?”
승윤의 말에 승완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하였다.
“음……, 일탈이라고 해서 정말 생각 없이 놀아야 하나요? 술 마시고, 담배피고, 여자 사서 자고 이런 것만이 일탈인가요? 모처럼 억눌린 생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막 놀고 싶진 않아요. 정말 하고 싶었던 걸 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저에게 맞는 일탈인 거 같아요. 마치 형의 일탈은 ‘공부’인 것처럼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형의 일탈이 더 황당하고 웃긴 거 알아요?”
승윤은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내가 지금 공부를 하는 행위를 ‘일탈’이라 일컫다니……. 단지 나는 죽기 전에 미래를 사는 이들의 기분을 잠깐 느껴보고 싶을 뿐이다. 현재를 살아왔던 나에게 미래를 산다는 건 ‘일탈’인 걸까? 하지만 분명한 건 승완의 설레는 목소리를 보건데 날이 밝으면 그가 할 행위는 ‘일탈’이 맞을 거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일탈을 오랜 시간 동안 고대해 왔던 것 같았다. 그저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행위일 뿐인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어쩌면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걸 ‘일탈’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볼 수 없는 여관 밖 하늘은 끝이 없을 것 같은 진한 어둠에서 깊은 바다색으로 점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다색조차 옅어지기 시작하였고 불그스름한 빛이 밝아왔다. 그렇게 빛이 세상을 뒤덮는가 싶더니 그렇게 결국 해가 떠올랐다.


승완은 뭔가 달라졌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또는 달라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변화하고 싶었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미용사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염색을 하고 싶어서요.”
미용사는 데스크로 가더니 책자를 가지고 왔다. 거기엔 여러 가지 머리색이 나와 있었다. 승완은 그 책자를 받아들며 자신의 머리색을 고르기 시작했다. 붉은색, 파란색, 은색과 같은 튀는 색깔을 위주로 고르다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나랑 어울릴까? 승완은 한숨을 쉬며 웃음을 짓고는 자기가 고른 머리색을 미용사에게 보여주었다. 아주 연한 갈색머리였다.


승윤은 도서관에 들어갔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스크린모니터에서 좌석표를 뽑는 일이 그는 어색하기만 했다. 도서관과 그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이질감이 존재했다. 그처럼 남자가 귀에 피어싱을 한 채 돌아다니는 사람은 당연한 것처럼 볼 수 없었고 심지어 머리가 어께까지 내려올 만큼 기른 사람도 본인밖에 없는 것 같았다.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를 입은 편한 복장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갖추어 입고 다니는 사람도 꽤 있긴 하였지만 도서관을 다니면 다닐수록 본인과 맞지 않는 장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위계질서가 잘 짜여진 원숭이 우리에 들어온, 그 사회가 어떤지 모르는 한 마리의 캥거루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공부를 했다. 무슨 공부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부터 영어가 가장 끌렸으니까. 국어는 머리 아팠고, 수학은 어지러웠다. 하지만 다른 언어라는 건 묘한 끌림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영어사전이 좋았다.
주위에 전자사전을 쓰는 사람이 종종 보였다. 하지만 그는 두꺼운 영어사전 하나만 가지고 영어기초 문제집을 파고 있었다. 전자사전을 살 돈이 없어서 사전을 쓴다기 보단 그는 그냥 그렇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종이장을 넘기며 영어사전을 찾는 게 좋았다. 진짜로 공부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찾은 단어에는 사전에 형광펜으로 그으며 찾았다는 표시를 반드시 했다. 왠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승완은 시험기간이라 학교에 서 일찍 끝났을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학교 앞에서 기다릴까 생각해보았지만 학교 앞에는 보는 눈들도 너무도 많아 도저히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을 거 같았다. 시계를 보니 시험기간이라 하여도 그녀가 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 거 같아 일단 아파트 내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지율희. 그녀는 고1 때 같은 반이었다. 그가 여자들과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서로 친하다거나 대화를 자주한다거나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은 같은 반 학우로서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고 종종 메신저로 말을 걸어 와주어 대화하기도 하였다. 그녀와 한 대화는 내 머릿속에 기억되었고 메신저의 기록은 내 컴퓨터 하드안에 저장되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그의 심장은 최고 속으로 달리고 있는 증기기관차처럼 멈추질 않았다. 그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녀가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나지 말기를. 그녀가 나타나면 내가 고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녀가 저 집 앞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왔으면. 오랫동안 기다려온 시간이지만 아이러 니하게도 승완은 그 시간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승완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이라도 하듯 그녀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다른 아파트에서 종종 보이는데도 그녀의 모습은 한동안 눈에 띄지 않았다.


소름끼치도록 열람실 안은 조용했다. 공책에 필기하는 소리 지우는 소리 자세가 불편해 약간의 의자 끄는 소리 정도가 전부였다. 그 침묵 속에서 승윤은 불편했다. 자꾸만 폐 쪽이 아파왔고 기침이 나오려고 했다. 식은땀이 차갑게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도저히 그는 집중을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는 일어나 조용히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열람실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병원을 나온 걸 후회할 뻔 했지만 승완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함께 뛰쳐나온 녀석이 있는데 내가 여기서 후회를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한 번 씁쓸하게 웃고는 그는 오토바이로 바람이나 쐴까 해서 도서관을 나왔다.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는 그의 오토바이에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제가 실수로 커피를 오토바이에 흘렸어요. 대충 닦기는 했는데 문제 있으면 연락주세요.
고봄나 010-xxxx-xxxx'
포스트잇을 떼고 오토바이를 살펴보았다. 별로 커다란 이상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더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거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시동을 걸어보았다. 시동도 시원하게 잘 걸렸다.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냥 포스트잇을 버릴까 하다가 누굴까 궁금해 졌다. 어떤 착한 사람-또는 멍청한-이 별 것도 아닌 이런 일에 그냥 모른 척 지나가도 모를 일인데 자기 전화번호까지 남기며 사건을 해결하려 했을까? 저녁시간도 다가오는 것 같았고. 같이 밥이나 먹을 겸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잠시 후 도서관에서 한 여성이 도서관에서 나와 나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이는 20대 초중반으로 보였고 머리는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파란색 민소매 원피스는 그녀에게 퍽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오토바이 주인이신가요? 제가 책을 보면서 걷다가 커피를 흘렸었거든요. 문제가 있다면 제가 보상해드릴게요. 제가 그래도 꽤 열심히 닦아서 외관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지금 이걸 보면서도 외관상 문제가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 내가 아끼는 오토바이를 이렇게 만들어 놨으면서. 보세요, 봐. 이게 문제가 없나.”
물론 오토바이에는 문제가 없었다. 승윤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문제를 발견할리 없었다. 하지만 뭐라 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을 때 승윤이 말했다.
“저도 이런 걸로 크게 문제 만들긴 싫고, 그냥 밥이나 한 끼 사세요.”
아직 그녀는 승윤의 장난을 눈치 채지 못한 거 같았다. 승윤은 곁눈질로 그녀가 본인의 장난을 눈치 챘나 보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생이라면 상당히 부담스러울 거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왔다. 그는 뻔뻔히 음식을 주문하였고 그녀는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잘 먹을게요.”
승윤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어색할 수 있는 분위기를 그는 자연스러운 대화로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이름이 고봄나씨 라고 했죠? 실례지만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스물넷이요.”
그가 두 살 아래였다.
“동갑이네요. 저도 스물넷인데.”
동갑이라고 거짓말 하여 자연스레 말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 속에는 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왠지 교양이 있어 보이고 기품이 느껴지는 게 말을 놓으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승윤은 그녀에게 말을 높이며 계속 대화를 이끌어 갔다.
“도서관에는 무슨 일로 다니시는 거예요?”
“임명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은지 어색한 티를 감추지 못하며 대답하였다. 승윤은 묻지도 않은 말을 마치 그녀가 물은 것처럼 알아서 대답하였다.
“저는 영어 공부 하고 있어요. 곧 멀리 가거든요.”
그렇게 대화는 승윤의 위주로 진행되었다. 나이부터 거짓말로 시작하다 보니 그 후 그에 입에서 나온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거짓말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집중하고 듣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의 거짓말은 짜임새 있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곧이어 음식이 나왔고 그 둘은 먹기 시작했지만 그의 말은 끊임이 없었다. 승윤 본인조차 내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싶을 정도로 말이 계속 나왔다.
봄나는 이제까지 그가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다보니 보게 되는 사람들도 달랐다. 그에게 그녀는 같은 언어를 쓰는 다른 종족 같았다. 이제껏 그가 보지 못해왔던 종류 사람이라서 그럴까? 그는 그녀에게 묘한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 더욱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와 대화를 하려면 그녀와 같은 종족의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대충 이야기를 끝낸 상태에서 그가 그녀에게 말한 그는 본래의 그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24세, 서울에 어느 이름 있는 대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었고 집은 지방에 있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살았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하며 들었지만 조금씩 자연스럽게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 맛있었다. 어? 봄나씨 입에 뭐 묻었어요. 아뇨, 거기 말구요. 잘 안 지워지는 거 같은데 화장실 다녀오셔야 될 거 같은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화장실에 가야만 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땐 약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지금 장난치신 거예요? 안 묻었던데?”
“그래요? 이상하네, 분명히 묻었었는데 가면서 떨어졌나?”
승윤은 장난이었다는 티가 확 나는 웃음을 지었다. “식사도 다 한 것 같은데 일어나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돌아와 앉지도 못하고 가방을 챙겨야만 했다. 그녀는 계산을 하기위해 지갑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을 하려고 하자 종업원이 말하였다.
“아까 저 남자분이 계산 하셨어요.”
봄나는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승윤을 바라보았고 승윤은 그냥 멋쩍은 듯 웃었다. 건물을 나온 뒤 그녀는 승윤에게 말했다.
“제가 계산해야 되는 거였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혼자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자꾸 아까 그 못생긴 남자 직원이 쳐다보잖아요. 빨리 계산하고 나가라는 눈빛으로. 그 눈빛이 너무 강력해서 저도 계산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네요. 그러게 이게 다 봄나씨 탓이에요. 왜 입에 뭐가 묻어서 화장실을 가셔서 제가 계산을 하게 만들어요?”
승윤은 그녀를 장난으로 나무랐다. 그녀도 그걸 알았기에 별로 기분 나쁘거나 그러진 않았다.
“대신 내일 밥 사세요. 내일도 입에 뭐가 묻어서 제가 낼 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일은 좀 저렴하고 맛있는 대로 가죠.”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는 웃었지만 잠시 혼자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같이 도서관을 향해 길을 걷는데 승윤의 눈에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승윤은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왔다. 편의점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콜라가 두 캔 들려 있었다. 후식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그녀에게 콜라 한 캔을 넘겼다.
승윤은 콜라를 다 마시고 캔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신문함에 버렸다. 그 광경을 본 봄나는 다시 뒤돌아가 신문함에서 캔을 꺼냈다.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달려와 다시 승윤 옆으로 갔다.
“그걸 다시 주워 와요? 차라리 저한테 뭐라고 했으면 제가 주울텐데.”
“아뇨, 내가 주웠으니까 행운은 내거예요. 좋은 일을 하면 행운이 쌓인대요. 이렇게 조금 씩 좋은 일 한 게 나중에 저에게 큰 행운을 안겨다 줄 것만 같아요.”
승윤은 웃었다.
“그걸 믿어요?”
“믿는 다기 보단 그냥, 믿어보고 싶어요. 그럼 세상이 더 좋아질 거 같기도 하고…….”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승윤은 딴죽을 걸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사람은 가끔 정말 믿는다기보다 믿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그거 알아요? 우리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어요.”
“설마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둘은 도서관에 도착해 있었다.
“아, 벌써 도착했네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전 입구에서 좀 쉬다가 들어갈게요.”
그의 말에 그녀는 인사를 하고 가려다가 다시 그에게 돌아서더니 말했다.
“저요, 사실 오면서 조금 고민해봤는데. 이거 말하는 게 웃길지 모르겠지만, 또 제가 오버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말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하려구요.”
승윤은 말없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그냥 말해야 될 거 같았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도서관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맞았다. 그 이야기는 그녀가 그에게 반드시 말해야 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에게 그 이야기는 반드시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인 것 같았다.
승윤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한 여름의 낮은 길었다. 해는 영원히 질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고 그것은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 해에게도 해당되었다. 느지막하게 해는 지고 있었고 그 때까지도 율희는 집에 오지 않았다. 승완이 그녀를 놓쳤을 리는 없었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으니까. 배가 고파왔지만 소변이 마려웠지만 설마 그녀가 그 사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아파트에는 불빛들이 들어왔다. 확실히 그녀가 몇 호 사는지 까지는 알지 못해, 그녀의 집에 불이 켜졌는지 안 켜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달이 태양을 대신해 하늘에 떠오를 때, 별들이 조금 씩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려 할 때, 가로등이 등불 아래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기다려왔던 실루엣이 보였다. 율희였다. 승완은 그녀가 가고 있는 그녀의 아파트 앞으로 뛰어갔다. 점점 다가오며 승완을 보았는지 율희가 먼저 인사했다.
“어? 승완아, 안녕? 여긴 어쩐 일이야? 어라? 염색했네? 하하 은근히 어울린다. 맞다, 너 그러고 보니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학교도 못나온다고 들은 거 같은데?”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그는 무슨 질문부터 답변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 율희야 안녕. 근데…… 학교에서 오는 길이야? 좀 늦었네.”
“우리학교 이번에 시험 일찍 시작해서 오늘 끝났잖아. 그래서 친구들하고 기분 좀 풀고 왔지. 너 같은 애는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시험기간에 이렇게 기분을 풀어야 한단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먼저 들어갈게. 만나서 반가웠어.”
율희는 그렇게 자기가 할 말만 하고 가버리려 했다. 승완은 힘없이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율희야!”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 여기서 너 기다린 거야…….”
그의 말의 힘이 힘겹게 그리고 힘을 담아서 말을 짜냈다.
“시험 끝났다고 했지? 내일 뭐해? 내일 같이 만나지 않을래?”
“너…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그녀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율희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승완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너 휴대폰 번호 몰라. 여기서 물어보진 않을게. 내일 우리 학교 앞 사거리 롯데리아 앞에서 11시에 만나자. 나 너한테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깐 너 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
그러니까 빨리 와야 돼.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하고 승완은 율희를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승윤의 생각보다 늦게 승완이 들어왔고, 승완의 생각보다 빠르게 승윤이 들어왔다. 그들은 함께 여관으로 들어왔다. 여관으로 돌아온 그 둘은 너무나 피곤했고 서로 대충 씻기만 하고 불을 껐다. 그 대신 TV를 켜 어둑한 여관방을 비췄다.
“야, 너 걔 사랑하냐?”
심야 쇼프로그램을 보던 승윤이 뜬금없는 질문을 갑자기 툭 하고 내던졌다.
“아직은, 그냥 관심이죠. 사랑이라고 하기엔 걔를 너무 모르는 거 같아요.”
“사랑한 사람은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한 사람은 있었어요.”
“누군데?”
승윤의 눈은 TV에 고정되어 있어 보지는 못하였지만 승완의 눈은 추억에 잠기는 듯 초점을 잃고 애틋하고 깊은 눈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눈의 초점은 돌아왔다.
“남의 비밀을 듣기 위해선 본인 이야기부터 풀어내야죠.”
“내 이야기?”
“네. 형 이야기, 들어보고 싶어요.”
이번엔 승윤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 또한 깊어졌지만 승완과 같은 애틋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냥 대단하지 않은 딱히 특별할 거 없는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한 삶을 살았었어. 그 땐 그렇게 우리 집이 평범하다고 생각지도 않았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걸 별로 대단케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몹시 대단하게도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았었어. 그렇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중학교 2학년 겨울 어느 날이었어. 하얀 눈발이 창밖에서 쓸쓸히 내리던 날이었지. 학교 창 밖을 바라보며 여행을 가셨다가 돌아올 부모님을 떠올렸어. 아니, 그들이 가져오실 선물을 더 기다린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무엇이었든 결국에 그건 필요 없는 일이였어. 어차피 부모님이나 선물이나 우리 집까지 오지 못했으니까. 교통사고였어. 역주행 하는 트럭에 부딪히고 즉사하셨지.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평범하지 않은 아이가 되고야 말았어. 어쩌면 미래라는 건 말야, 부모가 아닐까? 살인자들을 봐도 어렸을 때 나쁜 부모만나서 성격이 삐뚤어진 경우가 많잖아. 살인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잖아 부모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결국은 부모를 닮아가잖아. 그들에게 배워가잖아. 나는 아직 다 닮지 못했는데, 더 그들에게 배워야할 게 많았는데 어느 날 부모가 사라졌어. 그리고 내 미래도 그들과 함께 사라져 버린 거지. 그래도 뭐, 사는데 어려움은 없었어. 부모님이 따로 보험 들어놓은 것도 있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상당한 배상금을 받게 되었거든. 그 후로 그냥 저냥 되는대로 담배도 피면서, 술도 마시면서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까. 며칠 전에 병원에서 그러더라구 폐암이라고. 폐암이라는 게 초기에는 증상이 별로 없대. 남은 삶이 벌써 얼마 안 남았다고 하네, 얘네들이. 하루 두 갑씩 몇 십 년 피던 사람은 멀쩡하더구만. 어쨌든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게 됐지. 가지고 있던 재산의 대부분을 병원에 내놓게 되었고. 필요한 만큼만 쓰는 스타일이라 많이 남았는데 갖고 죽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병원에 내놓았어. 그러니 좋더라고 2인실도 주고. 그리고 그 병실에서 너를 만나게 되고, 내 이야긴 그게 다야.”
승윤의 말이 끝났다. 동시에 TV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중에 승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독하게 주인공 생고생시키는, 그리고 결말조차 배드 앤딩으로 끝나고 마는 슬픈 드라마를 본 기분이었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한 기분까지 들었다. 너무 말이 안 되는 일 같았다. 진짜 드라마들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자, 이제 말해봐. 네 얘기. 네가 사랑했다는 사람이야기.”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 아니에요. 전.”
“뭐야, 난 말했잖아. 상관없으니까 해봐. 네가 사랑했다는 사람 누구였는데?”
승완은 부끄러운 듯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요. 지금 장난하냐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줘요. 알아요. 되게 웃긴 일인 거.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학창시절에 한 번쯤 겪는 그런 일일 거라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땐 참 유치했었지, 하며 웃어넘길 그런 일일 거라고. 아무리 그렇게 생각을 해봐도 참 그 선생님이 전 참 좋았어요. 갓 선생님이 되어서 뭔가 서툰 모습이 좋았고 서툴지만 그래도 항상 웃고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어요. 학생 한 명, 한 명 배려해주며 나한테도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었어요. 그래도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요. 그저 선생, 제자 사이라는 거. 가끔 어른이 돼서 선생님과 만나는 상상을 종종 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건 정말 한 때 뿐이었어요. 저도 선을 지키며 그냥 선생님을 바라보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한 남자아이의 거친 반항에 눈물을 보이시는 일이 발생했어요. 너무 아이들에 게 편하게 친구처럼 다가가려 하니까 그런 일도 발생하더군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어떡할까 하다가 선생님께 익명으로 편지를 썼어요. 반 아이들 대부분은 선생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힘내 달라. 겨우 그 정도의 글을 썼어요. 그리고 몰래 선생님의 자리에 편지를 놓고 나왔죠. 그런데 결국 어떻게 제가 썼다는 걸 아시더라구요. 그 일을 계기로 좀 더 선생님과는 친해지게 되었어요. 좀 더 각별한 사제지간이 되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대부분 그래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꼭 이런 식으로 끝나요. 중 3말. 선생님이 결혼을 하시게 돼요. 저는 그 곳에 가 축가를 부르게 되었구요. 알고 있었어요. 아무리 친하더라도 단지 사제지간이라는 거. 생각하고 있었어요. 후에 추억하면 너무 유치해서 웃어넘길 그런 일일 거라고. 다 알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결국엔 눈물이 나더군요. 정말 일까요? 시간이 지나면 그저 웃어넘기는 학창시절의 유치한 추억이 될까요? 정말 좋았는데,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선생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까요? 아직은요, 제가 어려서 그런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승완의 대단치 않다는 이야기를 마치자 침묵이 흘렀다. 도서관의 열람실보다 더 방안은 고요했다. 그날 밤은 승완에 눈에 맺힌 눈물만큼이나 고요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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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尹主] 2009.09.10 03:44
    잘 읽었습니다. 다음 회는 언제쯤 올라오려나요?
    멋진 글인데 왜 추천 하나 없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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